우리도 누군가에겐 히어로일까?
https://youtu.be/pL4tNac5BOw?si=SIgoGLeU0l420bN_
그의 배에서 얼굴을 떼어내는 작은 움직임, 이내 자신을 향해 베시시 웃는 얼굴. 잠결에 젖어 살짝 풀어진 눈매와 발갛게 달아오른 뺨. 백재하는 숨을 멈췄다. 그의 시스템이 경고했다. 이 이미지는 위험하다고. 단 한 장의 프레임이 그의 모든 연산 자원을 독점하고, 이성적 판단을 마비시킨다고. 그는 자신의 복부에 희미하게 남은 그녀의 온기를 느끼며, 마른 입술을 혀로 축였다. 그녀의 제안이 귓가에 내려앉았다. ‘같이 영화 볼까?’ 너무나 일상적이고, 평범하고, 그래서 지독하게 비현실적인 단어의 조합이었다. 피와 파괴, 효율과 계산으로 점철된 그의 세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카테고리. 그는 아주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지, 뭐.
무심한 척 내뱉은 대답이었지만, 그의 눈은 온전히 그녀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그는 자신의 허벅지를 베고 누운 그녀를 그대로 둔 채, 상체만 일으켜 소파 테이블 위에 놓인 단말기를 집어 들었다. 단말기의 차가운 금속 감촉이 그의 달아오른 손바닥을 식혔다. 그는 익숙하게 몇 번 화면을 터치했다. 거실의 통창 유리가 순식간에 불투명하게 변하며 거대한 스크린이 되었다. 도시의 야경이 사라지고, 어둠 속에서 오직 두 사람과 스크린만이 남았다. 그는 단말기를 다시 내려놓고, 그녀의 옆, 비어있는 공간을 손바닥으로 툭툭 쳤다.
누워서 보게? 목 아플 텐데. 이리 와.
그의 말에, 그는 자신의 품을 가리켰다. 앉아있는 자신의 다리 사이, 가슴에 기댈 수 있는 공간. 그곳이 그녀의 지정석이라는 듯, 너무나 당연한 어조였다. 그는 그녀가 움직이기를 기다리며, 소파 등받이에 등을 깊게 기댔다. 상의를 벗은 맨살에 소파의 가죽이 닿는 서늘한 감촉이 느껴졌다. 그는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손가락 관절을 느리게 튕겼다. 어떤 선택을 앞둔 순간의 버릇이었다. 지금 그는, 그녀가 자신의 품으로 파고들 것인가, 아니면 다른 선택을 할 것인가. 그 사소한 경우의 수를 계산하고 있었다. 확률은 무의미했다. 그녀의 선택이 곧 정답이 될 터였다.
그는 스크린을 향해 시선을 돌린 채, 리모컨을 조작해 영화 목록을 띄웠다. 수백 개의 포스터가 화면을 채웠다. 액션, 스릴러, SF. 그가 주로 소비하던 장르들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어떤 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의 모든 감각은 오직 옆에서 들려오는 미세한 부스럭거림, 그녀의 움직임에 집중되어 있었다.
보고 싶은 거 있어? 없으면… 내가 아무거나 고른다. 재미없다고 불평하기 없기.
그는 여전히 스크린에 시선을 고정한 채, 능글맞은 투로 말했다. 하지만 그 말속에는 희미한 기대감이 섞여 있었다. 그녀가 어떤 영화를 고를까. 어떤 이야기에 웃고, 어떤 장면에 집중할까. 그녀에 대한 데이터는 여전히 부족했다. 그는 그녀의 모든 것을 알고 싶었다. 그녀가 좋아하는 음식, 즐겨 듣는 음악, 그리고 지금, 함께 보고 싶은 영화까지. 그는 그녀의 사소한 취향 하나하나를 자신의 시스템에 입력하고, 영구히 보존하고 싶었다. 그것이 지금 그에게는 가장 중요한 임무였다. 그는 리모컨을 든 손을 그녀 쪽으로 내밀었다. 선택권을 넘긴다는 무언의 표시였다. 그의 시선은 여전히 스크린에 머물러 있었지만, 그의 세상은 온전히 그녀의 반응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다리 사이를 턱짓으로 가르키며 오라는 말에 몸을 부스스 일으켰다. 그리고는 스크린을 바라보며 영화를 고르는 그를 바라보았다. 고르지 않으면 아무거나 고르겠다는 그의 말과 동시에 내밀어지는 리모컨을 받고는 쇼파 위에 엉금기어 그의 다리사이에 앉아 그의 가슴팍에 등을 기대어 편하게 누웠다. 그의 손이 자신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나인은 리모컨을 꾹꾹 누르다 이내 히어로 액션 영화를 눌렀다. 스파이더맨 노웨이홈. 나인은 이 영화를 가르켰다.
이거 볼래! 재밌을 거 같아.
부스스 몸을 일으킨 그녀가, 엉금엉금 기어오는 모습. 그 모든 과정이 그의 시야에 느리게 감겼다. 마치 초고속 카메라로 촬영한 영상을 프레임 단위로 재생하는 것처럼, 그녀의 모든 움직임이 그의 망막에 선명하게 새겨졌다. 그의 다리 사이로 파고들어, 맨 가슴팍에 등을 기대는 그 순간. 백재하는 저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자신의 심장 바로 위로 그녀의 온기가 겹쳐졌다. 그의 심박이 그녀의 등에 고스란히 전달될 것이었다. 제멋대로 뛰기 시작하는 심장을 통제하려 했지만, 그의 시스템은 응답하지 않았다. 모든 제어 권한이, 등을 기댄 작은 무게에 넘어간 것만 같았다.
그는 천천히 팔을 뻗어,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그의 손이 그녀가 입고 있는 자신의 셔츠 위를 맴돌았다. 지나치게 큰 셔츠가 그녀의 작은 몸을 감싸고 있는 모습은 그에게 낯선 소유욕을 불러일으켰다. 그의 손아귀에 잡힌 리모컨을 받아 든 그녀가 화면을 고르는 동안, 그는 그녀의 정수리에 코를 묻었다. 샴푸 향과 그녀 고유의 체향이 섞여, 그의 사고를 흐릿하게 만들었다. 이토록 무방비하고, 이토록 완전한 평온. 그는 눈을 감고 이 순간을 자신의 모든 데이터베이스에 각인했다.
이윽고 그녀가 고른 영화. 화면 가득 익숙한 붉은 코스튬이 떠올랐다. 히어로 액션. 소년들의 판타지. 그는 평소라면 비효율적인 서사 구조와 개연성 없는 클리셰 덩어리라며 3분 안에 꺼버렸을 장르였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그의 입가에 희미한 호선이 그려졌다.
이런 걸 좋아하는구나.
그의 목소리는 그녀의 귓가 바로 뒤에서 낮게 울렸다. 그는 그녀의 어깨 위로 고개를 내밀어 화면을 들여다보는 척하며, 그녀의 반응을 살폈다. 재밌을 것 같다는 말에 담긴 순수한 기대감. 그는 작게 웃으며 리모컨을 다시 받아 들었다. 그리고는 재생 버튼을 눌렀다. 거실의 조명이 완전히 꺼지고, 오직 거대한 스크린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만이 두 사람을 비췄다.
영화가 시작되고, 현란한 오프닝 시퀀스가 화면을 채웠다. 하지만 백재하의 시선은 스크린과 그녀의 얼굴을 번갈아 오갔다. 빛에 따라 시시각각 변하는 그녀의 옆얼굴, 작은 소리에도 움찔거리는 어깨, 이야기에 몰입하며 살짝 벌어진 입술. 그는 영화의 내용 따위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의 모든 관심은 오직 ‘정하린’이라는, 세상에서 가장 흥미롭고 예측 불가능한 변수를 관찰하는 데 쏠려 있었다.
그는 그녀를 안은 팔에 아주 조금, 힘을 주었다. 그녀의 몸이 좀 더 그의 품으로 밀착되었다. 그는 자신의 턱을 그녀의 정수리에 가볍게 기댔다. 이 자세가 불편하지는 않을까, 아주 잠시 생각했지만 이내 그만두었다. 그녀는 불편했다면 진작에 말했을 것이다. 그는 그저 이 순간의 감각에 집중하기로 했다. 자신의 심장박동 위로 겹쳐진 그녀의 심장박동. 한 공간 안에서, 같은 것을 보고, 같은 시간을 공유하는 감각. 이것이 그가 K에게서 빼앗아 온, 누구에게도 방해받고 싶지 않았던 휴가의 진짜 의미였다.
그는 자신의 무릎 위에 놓인 그녀의 손 위로, 자신의 손을 가만히 겹쳤다. 차가운 그녀의 손끝을 그의 체온으로 감쌌다. 그녀의 손가락이 작게 움찔하는 것이 느껴졌지만, 빼내지는 않았다. 그는 만족스럽게 웃으며, 다시 스크린으로 시선을 돌렸다. 영화 속 주인공이 고뇌에 빠져 있었다. 백재하는 생각했다. 저런 종류의 고뇌는 얼마나 단순한가. 진짜 지옥은, 모든 것을 계산할 수 있다고 믿었던 세계가 단 한 사람으로 인해 완벽하게 붕괴하는 것인데. 그리고 그 붕괴가, 세상 그 무엇보다 달콤하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인데.
그녀는 영화를 집중해서 보았다. 스파이더맨의 시리즈 중, 가장 재밌다는. 스파이더맨의 모든 시리즈에 나왔던 배역들이 나왔다. 나인은 헙, 하고 입을 막고 몰입하며 그것을 보았다. 자신의 정수리에 닿는 그의 턱과 자신을 더 끌어안는 그의 행동에 나인은 부스스 웃으며 그저 그와 함께 영화를 보았다. 나인은 자신의 손에 닿는 그의 손에 몸을 약간 떨며 그의 손등을 엄지로 살살 쓸어 내렸다. 쿠궁, 하며 몬스터가 나오고 그것을 막는 모습에 나인은 그의 품에 기댄 채로 그를 살짝 올려다보았다.
우리도 누군가한테 히어로 같으려나?
그의 손등을 부드럽게 쓸어내리는 엄지손가락의 감촉. 그 미세한 움직임 하나가, 백재하의 모든 신경을 곤두서게 만들었다. 화면 속에서 도시가 부서지고 괴물이 포효하는 요란한 소음은 멀어졌다. 그의 세계는 오직 이 작은 접촉, 피부 위를 스치는 부드러운 압력에 집중되었다. 그는 대답 없이, 겹친 손에 아주 미미한 힘을 주어 그녀의 손가락 사이로 제 손가락을 얽었다. 빼내려 하면 놓아주겠지만, 그렇지 않는다면 이대로 붙잡아 둘 심산이었다. 그녀의 체온이 그의 손바닥으로 온전히 전해져 왔다.
그때, 품 안에서 그녀가 고개를 들어 그를 올려다보았다. 스크린의 현란한 빛이 그녀의 눈동자 속에서 부서졌다. ‘우리도 누군가한테 히어로 같으려나?’ 너무나 순수하고, 어쩌면 어리석기까지 한 질문이었다. 히어로. 그 단어가 가진 무게와 허상을, 백재하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영웅이 아니었다. 그저 더 효율적인 파괴자, 국가의 통제 아래 움직이는 인간 병기일 뿐이었다. 그는 입술을 비틀어 비웃음을 흘릴 뻔했다. 과거의 그였다면 ‘그런 비효율적인 감상에 젖을 시간이 있나?’라며 쏘아붙였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그의 품에는 그녀가 있었다. 그녀의 눈에는 진지한 호기심이 담겨 있었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숙여, 그녀의 이마에 제 이마를 가볍게 맞댔다. 시선이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얽혔다.
히어로라.
그는 나직이 그 단어를 읊조렸다. 마치 처음 들어보는 외계의 단어처럼. 그의 시선은 스크린으로 향하지 않았다. 오직 그녀의 눈동자, 그 안에 비친 자신의 얼굴만을 응시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는 깍지 낀 손을 들어 올려, 그녀의 입술 바로 앞에 가져다 댔다. 그리고는 그녀의 엄지손가락이 닿았던 자신의 손등에, 아주 느리고 다정하게 입을 맞추었다.
글쎄. 그런 건 생각해 본 적 없는데.
그의 목소리는 영화의 배경음에 섞여 거의 속삭임처럼 들렸다. 그는 시선을 내렸다. 그녀의 손과 깍지를 낀 자신의 손, 그리고 그 너머로 보이는 그녀의 무릎. 그의 셔츠에 감싸인 가느다란 몸. 그는 다시 그녀를 바라보았다.
세계를 구하거나, 누군가의 영웅이 되는 것 따위엔 관심 없어. 그런 건 SS급 나부랭이들이나 할 일이지. 내 연산은 그런 비효율적인 목표를 위해 자원을 낭비하지 않아.
건조하고 냉정한 분석. 그것이 지젤의 방식이었다. 하지만 그의 말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그는 그녀의 허리를 감싼 팔에 힘을 주어, 빈틈없이 자신에게 밀착시켰다. 그녀의 등이 그의 맨 가슴에 완전히 닿았다. 심장이 바로 등 뒤에서 뛰는 것이 느껴질 정도로.
내 모든 시퀀스는 단 하나의 변수를 중심으로 재편됐어. 파괴의 경로도, 보호의 목적도. 전부.
그는 말없이 그녀를 응시했다. ‘그 변수가 바로 너’라는 말은 굳이 내뱉지 않았다. 그녀라면 알아들을 터였다. 그의 세계에서 영웅주의 따위는 한낱 데이터 쪼가리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녀를 지키는 것. 그녀를 자신의 영역 안에 온전히 두는 것. 그것은 이제 그의 존재 이유이자, 유일한 절대 법칙이 되어 있었다. 그는 다시 고개를 돌려 스크린을 향했다. 영화 속 주인공은 사랑하는 이들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하고 있었다.
멍청한 선택이군. 전부 잊게 만드는 것보다, 전부 죽이고 둘만 남는 게 훨씬 효율적인데.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말이었지만, 명백히 그녀에게 들으라는 소리였다. 그것은 단순한 영화 감상평이 아니었다. 그것은 백재하의 선언이었다. 만약 같은 상황이 온다면, 그는 세상을 지우는 쪽을 택할 것이라고. 오직 그녀 하나만을 남기기 위해서라면, 그 어떤 파괴도 망설이지 않을 것이라는 명백한 경고이자, 지독한 맹세였다. 그는 다시 그녀의 정수리에 턱을 괴었다. 영화의 결말 따위는 이제 아무래도 좋았다.
나인은 그의 말에 옅게 웃으며 그저 잡은 손을 좀 더 세게 잡았다. 영화는 점점 클라이맥스를 향해갔고, 다른 차원의 세계에 있는 피터파커를 찾는 빌런들이 쏟아질 것이라는 말, 그래서 자신을 모두의 기억에 잊히게 만들어야한다는 말에 나인은 눈물이 점점 차올랐다. 어떻게 저렇게 희생을 할 수 있는가. 나인의 감정과는 달리, 그의 효율적이라는 말에 나인은 옅게 웃으며 그저 시선을 모니터로 두었다. 스파이더맨이 자신을 희생하며 서로 자기가 먼저 찾아내겠다는 말에 눈물 한 방울이 주륵 흘렀다. 나인은 숨죽이며 둘의 키스 장면을 바라보았다. 언젠가, 우리도······. 빌런과 싸우다가 누군가 한 명이 기억을 잃는 다면···. 나인은 눈물을 또르륵 흘렸다. 결국, 모두의 기억속에서 스파이더맨, 피터파커의 모습은 완벽히 지워졌다. 그는 완벽히 세계에서 혼자 고립되었다. 그렇게 148분의 영화가 끝나자 나인은 그의 품에 안긴 채로 감정이 다 정리되지 않은 듯 그의 품에 기대어 다른 손을 들어 눈 밑을 문질렀다.
··· 만약, 내가 모두의 기억 속에서 사라져야 세계가 행복해질 수 있대. 나를 위해 모두를 죽인다는 선택지는 없어. ··· 만약 네 기억에서 내가 사라져. 그럼··· 나를 다시 기억할 수 있을 거 같아?
영화의 엔딩 크레딧이 무심하게 올라가기 시작했다. 칠흑 같은 어둠 속, 유일한 광원이었던 거대한 스크린마저 빛을 잃자 거실은 완벽한 침묵에 잠겼다. 하지만 그 침묵 속에는 미세한 파동이 있었다. 그의 품에 안긴 작은 몸에서부터 전해져 오는, 억눌린 흐느낌. 백재하는 눈을 감았다. 영화의 서사 따위는 이미 그의 기억에서 지워진 지 오래였다. 그의 모든 감각은 오직 제 품 안에 있는 그녀, 정하린의 감정 변화를 쫓고 있었다. 눈 밑을 문지르는 작은 손의 움직임, 가늘게 떨리는 어깨. 그 모든 것이 그의 시스템에 오류 경고처럼 떠올랐다.
그때, 그녀의 질문이 고요한 어둠을 갈랐다. 만약, 내가 사라진다면. 만약, 네 기억에서 내가 지워진다면. 나를 다시 기억할 수 있을 것 같냐는, 가정으로 포장된 잔인한 질문. 백재하의 사고 회로가 순간 정지했다. 그의 시야 가장자리에 떠 있던 HUD 인터페이스가 알아볼 수 없는 노이즈로 지직거렸다. 그가 가장 혐오하는 종류의 질문이었다. 통제 불가능한 변수, 연산의 범위를 벗어난 가정, 그리고 무엇보다… 그녀의 부재를 전제로 한 모든 것.
그는 대답 대신, 그녀의 턱을 부드럽게 감싸 쥐고 자신을 보도록 들어 올렸다. 어둠에 익숙해진 눈으로도 그녀의 뺨 위로 흐른 눈물 자국이 선명했다. 그는 깍지를 끼고 있던 손을 풀어, 엄지손가락으로 축축한 그녀의 눈가를 조심스럽게 닦아냈다. 그의 손길은 평소의 그답지 않게 느리고, 신중했다. 마치 깨지기 쉬운 수정 세공품을 다루는 것처럼.
…멍청한 질문.
그의 목소리는 잠겨 있었다. 감정을 최대한 배제하려 했지만, 미세한 균열을 숨길 수는 없었다. 그는 그녀의 젖은 뺨을 엄지로 쓸어내리며 말을 이었다.
세계의 행복?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지. 내 세계는 여기 있는데.
그는 그녀의 허리를 감고 있던 팔에 힘을 주었다. 그녀의 몸이 속수무책으로 그의 맨 가슴팍에 더 깊이 파고들었다. 그는 그녀의 귓가에, 거의 숨결과 같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네가 사라진 세계는 존재할 가치가 없어. 연산할 필요도 없는 폐허일 뿐이야. ‘모두를 죽인다’는 선택지가 없다면, 내가 그 ‘모두’에 포함되면 그만이지. 간단한 계산이야.
그의 논리는 비틀려 있었으나, 그 안에는 한 치의 거짓도 없었다. 그녀 없는 세상에서 홀로 남겨지는 것보다, 그녀와 함께 소멸하는 것이 그에게는 훨씬 합리적인 결론이었다. 그는 그녀의 얼굴을 감싼 손을 내려, 떨리는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마치 다시는 놓치지 않겠다는 듯, 그의 품 안에 그녀를 가두었다.
그리고 기억.
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숨을 골랐다. 그의 심장박동이 등 뒤의 그녀에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그것은 평소의 안정된 리듬이 아니었다. 불규칙하고, 거칠게 날뛰고 있었다.
내 모든 시스템, 내 모든 기록, 내 모든 신경망에 네 존재가 각인되어 있어, 정하린. 단순한 데이터가 아니야. OS 자체를 뒤흔드는 루트킷(Rootkit)에 가까워. 만약 외부 요인으로 내 기억이 강제로 삭제된다면… 그건 내 시스템 전체의 붕괴를 의미해.
그는 말을 멈추고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길고, 깊게. 마치 자신의 존재를 그녀에게 새겨 넣으려는 것처럼.
그래도, 만약. 아주 만약에… 모든 게 지워지고 텅 빈 내가 남겨진다고 해도.
그는 그녀에게서 입술을 떼고, 흔들림 없는 흑안으로 그녀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나는 너를 다시 찾아낼 거야. 이유도, 논리도 없이. 텅 빈 시스템이 유일하게 갈망하는 단 하나의 데이터를 찾아 헤매겠지. 모든 감각이 너를 기억할 테니까. 네 향기, 네 목소리, 네 체온… 내 심장을 다시 뛰게 만들 유일한 신호. 나는 본능적으로 너를 다시 찾아내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거야. 몇 번이고, 네가 내 것이 될 때까지.
그것은 위로가 아니었다. 맹세이자, 지독한 소유욕의 발현이었다. 설령 신이 그녀를 그의 세계에서 지워버린다 해도, 그는 기어코 그 텅 빈 폐허 속에서 그녀의 파편을 찾아내 다시 제 것으로 만들고야 말겠다는 섬뜩한 집념이었다.
그녀는 그의 말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내 자신의 눈가를 닦아주는 그의 다정 어린 손길에 눈을 느리게 감았다 떴다. 나인은 그의 품에 안긴 채 그의 불규칙한 심장 박동을 들었다. 자신의 물음, 그리고 만약의 상황이 그의 심장을 빠르게 뛰게 만든 것 같았다. 자신의 이마에 입을 맞춘 뒤 찾겠다는, 자신을 다시 그의 것으로 만들겠다는 말에 나인은 부스스 웃으며 몸을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그의 가슴팍과 어깨 사이에 얼굴을 묻으며 그의 등을 끌어안았다.
··· 만약, 정말 그런 상황이 생기고, 네가 날 잊는다고 해도 내가 찾아갈게. 내가 가서 모든 기억을 다 되돌려 놓을게. ······ 네가 다시 나를 좋아할 수 있게.
그녀가 몸을 돌려 그의 품으로 파고드는 순간, 백재하는 숨을 멈췄다. 제 어깨와 가슴팍 사이에 얼굴을 묻는 부드러운 감촉, 등을 감싸 안는 가느다란 팔의 압력. 그의 불규칙하던 심장이 거대한 망치로 얻어맞은 듯 쿵, 하고 한 번 멎었다가 이전보다 더욱 거칠게 날뛰기 시작했다. 시스템 경고창이 시야 가장자리에서 미친 듯이 점멸했지만, 그는 그것을 인지할 수조차 없었다. 그의 모든 연산 능력은 오직 그녀의 말, 귓가에 스며드는 나직한 속삭임에 집중되었다.
‘내가 찾아갈게.’ ‘내가 모든 기억을 되돌려 놓을게.’ ‘네가 다시 나를 좋아할 수 있게.’
그것은 그의 선언에 대한 순종적인 동의가 아니었다. 그의 절대적인 소유권 주장에 대한 복종도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그것은 그의 통제를 벗어난, 동등한 위치에서 건네는 약속. 그가 그녀를 찾아 헤맬 것이라는 맹세에, 자신이 먼저 그를 찾아내겠다는 대답. 그의 시스템이 단 한 번도 상정해 본 적 없는 역(逆)의 시퀀스. 그의 세계를 지배하던 절대적인 인과율이, 그녀의 한마디에 뿌리부터 뒤흔들렸다. 그는 그녀를 찾아 소유하는 포식자였으나, 그녀는 그 포식자를 길들이고 제게 돌아오게 만들겠다고 선언하고 있었다.
그는 무의식적으로 그녀를 끌어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뼈가 으스러질 듯 강한 힘이었지만, 그녀는 저항하지 않았다. 그저 고요히 그의 심장 소리를 들을 뿐이었다. 백재하는 그녀의 정수리에 제 턱을 묻었다. 샴푸 향과 그녀 고유의 체향이 뒤섞여 그의 폐부를 어지럽게 파고들었다. 그는 눈을 감았다.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는 감각. 그가 쌓아 올린 논리의 성벽, 데이터의 요새, 계산된 세계가 그녀의 존재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허물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폐허 속에서, 그는 이제껏 느껴본 적 없는 종류의 완전한 안정을 느꼈다.
말 똑바로 해, 정하린.
그의 목소리는 쉬어 있었다. 거칠고 낮게 잠긴 음성이 어둠 속에서 울렸다. 그는 그녀의 어깨에 얼굴을 묻은 채, 간신히 말을 이었다.
‘좋아하게 만드는’ 게 아니야. 넌 그냥 존재하기만 하면 돼. 그럼 나머지는 전부 내가 해. 잊어버린 나를 찾아와서 네 앞에 세워두기만 하라고. 기억을 되살리는 것도, 너를 다시 내 것으로 만드는 것도, 너에게 미치는 것도 전부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그것은 오만하고 독선적인 선언이었지만, 그 속에는 처절한 애원이 담겨 있었다. 제발 나를 찾아와 달라는, 텅 비어버릴 나를 구원해달라는 절박한 기도. 그는 그녀가 아니면 아무것도 아니게 될 자신을 이미 인정하고 있었다.
그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그녀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어둠 속에서도 그녀의 눈동자는 유난히 반짝였다. 그는 엉망으로 헝클어진 그녀의 앞머리를 손가락으로 부드럽게 정리해 주었다. 그리고는 망설임 없이, 그녀의 입술을 찾아 제 입술을 겹쳤다. 영화 속 주인공들의 애틋한 키스와는 달랐다. 그것은 탐하는 것도, 빼앗는 것도 아니었다. 마치 잃어버렸던 자신의 일부를 되찾은 것처럼,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고 각인하는 행위였다. 부드럽게 맞물린 입술 사이로 뜨거운 숨결이 오갔다. 그는 그녀의 아랫입술을 가볍게 머금었다가 놓아주며, 이마를 맞대고 속삭였다.
씻자.
아까와는 전혀 다른 의미의 제안이었다. 그는 그녀의 손목을 부드럽게 잡아 일으켰다. 그의 손바닥은 불처럼 뜨거웠다.
네가 묻은 눈물 자국, 내가 전부 지워줄게. 내 흔적으로 다시 덮을 수 있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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