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급 기자회견!] 🚨
나른한 주말 오후였다. 옅은 햇살이 커튼을 비집고 들어와 방 안을 금빛으로 물들이는 시간. 소파에 기대 잠이 든 백재하의 미간이 미세하게 찌푸려졌다. 평온하던 그의 수면 데이터에, 그 어떤 알고리즘으로도 분석 불가능한 이상 신호가 감지된 탓이었다.
눈을 떴을 때, 백재하는 익숙한 자신의 방이 아닌, 눈부신 조명 세례가 쏟아지는 단상 위에 서 있었다. 정갈한 검은색 정장 차림. 앞에는 수십 개의 마이크가 놓여 있었고, 낯선 정적과 함께 터지는 플래시 세례에 그는 본능적으로 상황 분석을 시작했다. 하지만 그의 모든 연산 능력은 다음 순간, 눈앞의 광경 앞에서 과부하에 걸려 하얗게 정지해버렸다.
기자석을 가득 메운 것은 날카로운 질문을 던지는 기자들이 아니었다. 그곳에는, 제각기 다른 표정을 한 수십 명의 ‘정하린’들이 그를 향해 불만 가득한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교복을 입고 팔짱을 낀 채 입술을 삐죽 내민 정하린, 과학 동아리 부실에서 본 듯 안경을 만지작거리는 정하린, 토라진 얼굴로 턱을 괸 정하린까지. 단상 위 거대한 스크린에는 [긴급 기자회견: 백재하는 왜 정하린의 마음을 이토록 흔드는가?] 라는 어처구니없는 주제가 띄워져 있었다.
그때, 가장 앞에 있던 ‘화난 정하린’이 손을 번쩍 들고 마이크를 잡았다.
“피고인 백재하! 묻겠습니다! 왜 시도 때도 없이 다정하게 굴어서 사람 헷갈리게 만드는 겁니까? 모든 계산이 끝난 얼굴로 다가와서, 결국 모든 계산을 망가뜨리는 이유가 뭐죠? 이건 명백한 심장 폭행입니다!”
백재하는 저를 ‘피고인’이라 칭하는 그 당돌함에 잠시 할 말을 잃었다. 그는 마른 입술을 축이고 마이크를 잡았다. 여기서 논리적인 답변은 통하지 않는다. 직감적인 판단이었다.
“...그건, 계산의 결과가 아니라 원인입니다. 정하린이라는 변수 앞에서 제 모든 알고리즘은 오류를 일으키고, 그 오류의 유일한 해결책이 ‘다정하게 구는 것’이라는 결론을 도출하기 때문입니다. 즉, 심장 폭행의 최초 유발자는...”
그의 시선이 정확히 질문을 던진 ‘화난 정하린’에게 향했다.
“...바로 당신입니다.”
객석이 순간 웅성거렸다. 그 틈을 타, 이번에는 고양이 머리띠를 쓴 ‘삐진 정하린’이 볼을 부풀리며 일어섰다.
“그럼 이건 어떻게 해명하실 거죠? 왜 다른 사람한테는 철벽을 치면서, 유독 정하린의 말에만 절대복종하는 겁니까! 아이스크림도 바로 사다 바치고, 져주기 싫어하는 사람이 그렇게 쉽게 항복 선언을 하고! 이건 불공평합니다!”
백재하는 희미하게 웃었다. 이건 공격이 아니라, 사실상 그의 유일성을 확인받고 싶어 하는 질문에 가까웠다.
“반론하겠습니다. 그건 불공평이 아니라 ‘특별 취급’입니다. 다른 모든 것은 제어 가능한 상수지만, 정하린의 명령은 제 세계의 유일한 절대 법칙이기 때문입니다. 시스템 전체를 뒤흔드는 법칙에 복종하는 것은, 개발자의 당연한 의무입니다.”
웅성거림이 점차 감탄과 수긍의 분위기로 바뀌어갈 때쯤, 가장 구석에서 다른 하린들의 등 뒤에 숨어 있던 ‘수줍은 정하린’이 조심스럽게 손을 들었다. 목소리는 모기만 했지만, 마이크를 통해 회견장 전체에 명확하게 울려 퍼졌다.
“저... 그럼...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저만 보고, 저만 예뻐해 줄 건가요...?”
그 순간, 회견장의 모든 ‘정하린’들이 일제히 숨을 죽이고 백재하의 입을 쳐다보았다. 화난 하린도, 삐진 하린도, 모두 똑같은 기대의 눈빛을 하고 있었다. 백재하는 더 이상의 계산이 무의미함을 깨달았다. 그는 마이크를 잡은 손에 힘을 주며, 단상 위의 모든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배우처럼, 그러나 세상에서 가장 진실한 목소리로 선언했다.
“대답하겠습니다. 그 질문에 대한 저의 답은, 과거나 현재, 그리고 예측 가능한 모든 미래에서 단 하나입니다.”
“네. 당연히.”
“...네. 당연히...”
웅얼거리는 자신의 목소리에, 백재하는 퍼뜩 눈을 떴다.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고 있었다. 그는 소파에서 벌떡 상체를 일으켰다. 낯선 기자회견장이 아닌, 햇살이 스며드는 평화로운 거실. 모든 것이 정상이었다. 하지만 귓가에는 여전히 수십 명의 정하린들이 던지던 날카로운(?) 질문들과, 마지막 질문에 대한 자신의 단호한 대답이 생생하게 맴돌았다.
“하...”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는 마른세수를 하며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꿈이었다. 하지만 너무나도 생생하고, 논리적이며, 동시에 완벽하게 비논리적인 꿈. 자신을 ‘피고인’이라 부르던 정하린, 조목조목 따지던 정하린, 그리고 마지막에 수줍게 질문을 던지던 정하린까지. 그는 소파에 등을 기댄 채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왜 정하린의 마음을 이토록 흔드는가...’
그건 내가 할 소리인데. 그는 피식 웃고 말았다. 꿈속에서 나름대로 완벽한 논리로 답변했지만, 현실의 그는 여전히 그녀의 사소한 행동 하나에 모든 계산이 정지되는 고물 컴퓨터일 뿐이었다. 그는 휴대폰을 들어 메시지 창을 열었다. 그리고는 한참을 망설이다, 결국 딱 한 줄의 문장을 써 내려갔다.
[방금 꿈에서 네가 수십 명으로 나와서 나한테 재판 걸었어.]
전송 버튼을 누르려던 그는, 문득 꿈속 마지막 장면을 떠올렸다. ‘계속 나만 예뻐해 줄 거냐’고 묻던 그 수줍은 얼굴. 그는 피식 웃으며 메시지를 전부 지웠다. 대신, 훨씬 더 그다운 방식으로, 꿈에서 내렸던 결론을 실행에 옮기기로 했다.
‘띵동-’
그는 정하린에게 [지금 잠깐 집 앞으로 나올 수 있어?] 라는 짧은 메시지를 보냈다. 이유는 묻지 말라는 듯, 다짜고짜인 호출이었다. 꿈속의 재판은 끝났다. 이제는 현실에서, 유죄 판결에 대한 형량을 직접 집행할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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