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고양이의 날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아침이었다. 적어도 백재하가 눈을 뜨기 전까지는 그랬다. 밤새 켜두었던 간접 조명이 여전히 희미하게 방 안을 밝히고 있었고, 제 품에 안겨 고른 숨을 내쉬는 정하린의 온기는 익숙한 안정을 선사했다. 그는 잠결에 그녀의 어깨를 더 깊이 끌어안으며 익숙한 체향을 들이마셨다. 모든 것이 완벽한 통제 아래, 계산된 평온 속에 머물러 있었다. 하지만 그 평온의 표면 아래, 미세한 균열이 감지되었다. 그의 예민한 감각이 무언가 이질적인 것을 포착한 것이다. 평소와는 다른, 아주 미세한 움직임. 그의 품에 안긴 나인의 머리 위에서 무언가 쫑긋, 하고 제멋대로 움직이는 감촉이었다. 동시에, 그의 허벅지를 간질이는 부드럽고 긴 무언가의 스침. 마치... 꼬리 같은.
그의 눈이 번쩍 뜨였다. 사고 회로가 0.01초 만에 재가동되며 상황 분석에 들어갔다. 외부 침입? 가능성 제로. 빌런의 신종 능력? 변수 범위 내. 아니, 그보다 더 근원적인 문제. 그는 천천히 고개를 내려 제 품에 안긴 나인을 살폈다. 그녀는 여전히 곤히 잠들어 있었다. 평소와 같은 얼굴, 평온한 표정. 하지만 그 평온함 위로, 명백히 이질적인 것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풍성한 검은 머리카락 사이로 솟아난, 결 좋은 검은 털의 뾰족한 삼각형 귀. 그리고 이불 아래에서 살랑거리며 제 존재감을 드러내는, 길고 우아한 검은 꼬리.
백재하는 잠시 모든 사고를 정지했다. 그의 능력, [GISELLE SEQUENCE]가 처음으로 유의미한 데이터 도출을 거부했다. 눈앞의 현상은 그 어떤 물리 법칙과 인과 관계로도 설명되지 않았다. 그는 마른침을 삼키며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 위에서 파르르 떨리는 작은 귀 끝을 살짝 건드려 보았다. 진짜였다. 부드러운 털의 감촉과 함께 움찔, 하고 반응하는 움직임은 홀로그램이나 환각이 아님을 증명했다. 그의 손길에 나인이 잠결에 으응... 하는 소리를 내며 몸을 뒤척였다. 그녀의 꼬리가 이불 속에서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그의 다리를 감았다가 스르르 풀렸다.
...정하린?
그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훨씬 낮고 잠겨 있었다. 눈앞의 비현실적인 광경에 대한 당혹감과, 정체를 알 수 없는 현상에 대한 극도의 경계심,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압도하는 기묘한 호기심이 뒤섞인 목소리. 나인은 그의 부름에 느릿하게 눈을 떴다. 아직 잠이 덜 깬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던 그녀는, 무언가 불편한 듯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그러더니 제 머리 위로 손을 가져가려는 듯 움직이다가, 이내 익숙하지 않은 감촉에 손을 멈칫했다. 그리고 천천히, 아주 천천히 제 머리카락 사이에 솟아난 두 개의 귀를 더듬었다. 그녀의 검은 눈동자가 지진이라도 난 듯 격렬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놀라 벌떡 상체를 일으켰다. 그 바람에 이불이 흘러내리며, 그녀의 허리께에서부터 길게 뻗어 나온 검은 꼬리가 온전히 모습을 드러냈다. 제 의지와는 상관없이 불안하게 파닥거리는 꼬리와, 토끼처럼 놀라 굳어버린 그녀의 표정. 백재하는 그 모든 과정을 단 하나도 놓치지 않고 눈에 담았다. 그의 입가에 희미한, 아주 희미한 미소가 걸렸다. 위험 상황은 아니었다. 오히려... 지극히 흥미로운 관찰 대상이 눈앞에 나타난 것에 가까웠다.
하린아. 오늘이 며칠인지 알아? 8월 8일. 세계 고양이의 날이더군.
그는 침대에 걸터앉은 채, 망연자실하게 제 꼬리를 내려다보는 나인을 향해 능글맞게 말했다. 그녀의 어깨가 그의 목소리에 움찔, 떨렸다. 그녀의 두 귀가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쫑긋, 돌아갔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갔다. 겁먹은 동물을 대하듯, 부드럽고 신중한 움직임이었다. 그는 그녀의 앞에 무릎을 굽히고 앉아 시선을 맞췄다.
겁먹지 마. 보아하니, 해로운 건 아닌 것 같으니까. 오히려... 꽤 잘 어울리는데. 귀엽네, 내 고양이.
그의 손이 부드럽게 그녀의 뺨을 감싸고, 엄지손가락이 귓가에 돋아난 새로운 귀의 밑동을 부드럽게 쓸었다. 그 순간, 나인의 입에서 야옹- 하는, 그녀 자신도 예상치 못한 고양이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녀는 제 입을 틀어막았지만, 이미 늦었다. 그녀의 몸이 잘게 떨리기 시작했고, 꼬리가 바닥을 탁, 탁, 내리치며 불안감을 드러냈다. 그리고 백재하는 보았다. 그녀의 눈동자가 평소보다 더 짙게 젖어들고, 뺨이 복숭앗빛으로 물드는 것을. 온몸으로 '나는 지금 혼란스럽고 부끄러워 죽겠다'고 외치고 있었다.
그의 내부에서 무언가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데이터를 기반으로 한 냉정한 분석이 아니었다. 원초적이고, 지독하게 이기적인 소유욕이었다. 평소의 정하린도 충분히 사랑스러웠지만, 지금 눈앞의 그녀는 차원이 달랐다. 제 의지와 상관없이 본능을 드러내는 모습,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 하는 표정, 그리고... 미세하게 공기 중에 퍼지기 시작하는 달콤하고 농밀한 향기. 가이드의 안정적인 파장과는 다른, 지독히도 암컷의 향이었다.
발정기. 그의 머릿속에 경고등처럼 단어가 떠올랐다. 센티넬의 예민한 감각이, 그녀의 신체 변화를 놓칠 리 없었다. 그는 낮은 신음을 삼키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대로 그녀를 마주 보고 있다간, 무슨 짓을 저지를지 스스로도 장담할 수 없었다. 그는 잠시 창밖을 보며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뒤를 돌아, 여전히 침대 위에서 웅크리고 있는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일단 진정해, 하린아. 욕실로 가서 네 상태부터 확인해. 나는 네가 좋아하는 따뜻한 우유라도 준비하고 있을 테니. ...그리고, 혹시라도 몸이 이상하면, 숨기지 말고 바로 나한테 말해. 알았지?
그의 목소리는 최대한 침착함을 가장하고 있었지만, 그 끝은 미세하게 갈라져 있었다. 그는 나인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확인하고는, 서둘러 방을 나섰다. 주방으로 향하는 내내, 그의 머릿속은 온통 하나의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내 고양이'. 오직 자신만이 가질 수 있고, 길들일 수 있으며, 안을 수 있는. 자신에게만 야옹, 하고 울어줄, 세상에 단 하나뿐인 그의 고양이. 오늘 하루는 꽤나 길고, 아주 흥미로운 날이 될 것 같았다. 그의 입술 사이로 뜨거운 숨이 새어 나왔다. 계산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다. 지금 이 순간, 그는 그저 본능에 충실한 한 마리의 포식자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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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우유가 담긴 머그컵을 든 채, 백재하는 소파에 앉아 욕실 문이 열리기만을 기다렸다. 문이 열리고, 샤워 가운으로 몸을 가린 나인이 쭈뼛거리며 걸어 나왔다. 촉촉하게 젖은 머리카락 사이로, 물기를 머금은 고양이 귀가 축 처져 있었다. 꼬리 역시 힘없이 바닥에 끌렸다. 그녀는 소파 반대편 끝에 조심스럽게 앉아, 그의 눈치를 살폈다.
백재하는 말없이 일어나 그녀의 옆으로 다가가 앉았다. 그리고 들고 있던 머그컵을 그녀의 손에 쥐여주었다. 그녀의 손이 차가웠다. 그는 자연스럽게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고,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아직도 떨고 있네.
그가 속삭이자, 그녀의 귀가 파르르 떨렸다. 그녀는 우유를 한 모금 마시더니, 작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재하. 나, 이상해. 몸이 뜨겁고... 자꾸... 네 냄새가 맡고 싶어져. 그녀의 고백은 그의 마지막 이성의 끈을 끊어버리는 방아쇠였다. 그는 들고 있던 머그컵을 테이블에 내려놓고, 그녀의 턱을 들어 올려 깊게 입을 맞췄다. 갑작스러운 키스에 그녀가 흠칫, 몸을 떨었지만 밀어내지는 않았다. 오히려 기다렸다는 듯 그의 목에 팔을 감았다. 혀가 얽히고, 뜨거운 숨결이 섞였다. 그녀에게서 풍기는 달콤한 향이 그의 온몸을 마비시키는 듯했다.
그는 키스를 멈추지 않은 채, 그녀를 안아 올려 소파에 눕혔다. 샤워 가운의 끈이 스르르 풀리며, 희고 부드러운 속살이 드러났다. 그는 그녀의 귀 끝을 잘근잘근 깨물며 속삭였다.
쉬... 괜찮아. 이상한 거 아니야. 그냥, 네가 너무 사랑스러워서 그런 거야. 전부 다.
그의 손이 그녀의 몸을 천천히 더듬었다. 그녀는 그의 손길 하나하나에 야옹..., 하응... 같은 교성을 흘렸다. 그녀의 꼬리가 그의 허리를 휘감으며 조여왔다. 그날, 백재하는 밤이 깊어질 때까지 그의 사랑스러운 고양이를 탐했다. 울고, 매달리고, 애원하면서도 끝까지 그를 받아내는 그녀를 보며, 그는 전율했다. 이것은 단순한 정사가 아니었다. 완벽한 복종이자, 소유의 확인이었다.
다음 날 아침, 언제 그랬냐는 듯 나인의 귀와 꼬리는 사라져 있었다. 그녀는 간밤의 일이 꿈인 양 멍한 표정을 지었지만, 온몸에 새겨진 붉은 흔적과 지독한 허리 통증이 현실이었음을 증명했다. 백재하는 그녀의 곁에 누워, 곤히 잠든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의 손에는 어젯밤, 그녀가 할퀸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있었다. 그는 그 상처를 보며 만족스럽게 웃었다. 비록 하룻밤의 해프닝이었지만, 그는 절대 잊지 못할 것이다. 자신에게만 모든 것을 드러내 보였던, 그의 사랑스럽고도 요망한 고양이를. 그리고 그는 다짐했다. 언젠가 다시 8월 8일이 돌아온다면, 그때는 절대로, 단 한 순간도 그녀를 놓아주지 않으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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