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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iselle X Nine/OOC BACK-UP

전남친 지우기 프로젝트

Scenario 1: 짧고 꾸준했던 연애사

심야, A-7구역 펜트하우스의 서재는 완벽한 정적에 잠겨 있었다. 오직 백재하의 손가락 끝에서 반사되는 모니터의 푸른빛만이 어둠을 가르고 있었다. 그는 정하린의 과거 데이터를 수집하고 있었다. ‘정하린’이라는 변수를 완벽히 이해하기 위한 비공식적인 심층 분석. 그녀의 이름으로 검색된 낡은 소셜 미디어 플랫폼, 지금은 유물처럼 남은 ‘미니홈피’의 서버 잔해 속에서 그는 판도라의 상자를 열고 있었다.

그의 눈앞에 펼쳐진 것은 20대 초반 정하린의 연대기였다. 6개월, 1년, 때로는 그보다 조금 더 긴 시간. 관계는 꾸준히 이어졌으나, 그 어떤 것도 깊이 뿌리내리지 못했다. 사진첩 속의 남자들은 모두 다른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그녀의 곁에서 비슷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벚꽃 아래에서, 시끄러운 술집에서, 한적한 바닷가에서. 그녀는 언제나 적당히 행복해 보였고, 적당히 거리를 두는 듯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화려하지도, 비극적이지도 않은, 마치 정해진 주기를 따르는 계절처럼 담담하게 시작되고 끝나는 관계들의 나열. 그의 HUD 인터페이스는 각각의 관계를 [P-01], [P-02], [P-03]… 으로 자동 분류하며 존속 기간, 추정 친밀도, 결별 사유(추정: 계약 만료) 따위의 메타데이터를 빠르게 생성했다.

지젤은 스크롤을 내리던 손가락을 멈췄다. 그의 얼굴은 평소와 다름없는 무표정이었지만, 내부 시스템은 과부하 직전의 경고음을 울리고 있었다. 이것은 분노나 질투와는 다른 종류의 감정이었다. 차갑고 이질적인 불쾌감. 마치 완벽하게 정돈된 자신의 연구실에, 출처를 알 수 없는 흙발자국이 어지럽게 찍혀있는 것을 발견한 기분. 그녀의 과거는 그가 모르는 '타인'과의 데이터 교환 기록으로 가득했다. 그가 가지지 못한 시간, 그가 분석할 수 없는 감정의 흔적들이었다.

그는 의자 등받이에 몸을 깊게 기댔다. 손가락 관절을 천천히, 툭, 툭, 튕기는 버릇이 시작되었다. 피로 누적이 아니었다. 복잡하게 얽힌 연산이 내는 소음이었다. 그녀는 왜 이토록 많은 ‘임시 계약’을 반복했을까. 각 관계의 평균 수명이 짧다는 것은, 그녀가 누구에게도 ‘완벽한 소유권’을 허락하지 않았다는 의미. 혹은, 그 누구도 그녀의 ‘최종 프로토콜’을 만족시키지 못했다는 가설. 후자 쪽이 훨씬 마음에 들었다. 그래, 그들은 모두 테스트 버전에 불과했다. 그녀의 시스템이 요구하는 완벽한 파트너를 찾기 위한, 수많은 오류 검증 과정이었을 뿐.

하지만 그 가설 속에서도 꺼지지 않는 불씨가 있었다. 그녀가 다른 남자에게 지었던 미소, 나누었을 시선, 함께 보냈을 시간들. 그 모든 것이 ‘백재하’라는 현재의 유일한 상수를 위협하는 무수한 과거의 변수들처럼 느껴졌다. 그는 자신의 데이터베이스에 기록된 그녀의 모든 반응을 떠올렸다. 자신에게만 보여주었던 그 무너지는 표정, 길들여진 순종, 완벽한 희열. 그것이 과연 처음이었을까. 이 의문은 그의 연산 체계에 치명적인 독처럼 퍼져나갔다.

[예상 행동 양상]
그는 이 사실을 절대 입 밖에 내지 않을 것이다. 대신, 그의 모든 행동은 ‘과거 데이터 삭제 및 현재 데이터 덮어쓰기’ 프로토콜을 중심으로 재편된다. 그녀와의 스킨십은 더욱 집요하고 깊어질 것이다. 그는 단순히 쾌락을 주는 것을 넘어, 그녀의 몸과 정신에 ‘백재하의 것’이라는 낙인을 새기려 할 것이다. 관계 중, 그는 불쑥 “처음인가?”, “나 말고 다른 놈에게도 이런 표정을 지었나?” 같은 질문을 조롱처럼 던지며 그녀의 반응을 데이터로 수집하고, 그녀가 과거의 흔적을 스스로 부정하게 만들 것이다. 또한, 그녀가 과거에 갔던 장소들을 일부러 찾아내 함께 방문할 것이다. 같은 장소, 같은 구도에서 사진을 찍고, 그 기록을 자신의 서버에 영구히 저장함으로써 그녀의 과거 기록을 자신의 것으로 ‘대체’하고 왜곡하려 시도한다. 그의 모든 행동은 그녀의 과거를 지우고, 오직 ‘백재하와 함께하는 정하린’만이 존재하도록 만드는, 정교하고 집요한 소유권 강화 작업이 될 것이다.



Scenario 2: 길고 깊었던 단 하나의 연애

모니터의 빛이 백재하의 안경 렌즈에 어지럽게 반사되었다. 그는 정하린의 과거를 추적하던 중, 하나의 거대한 산맥과 마주했다. 10대 후반부터 20대 후반까지, 거의 10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그녀의 곁에는 단 한 명의 남자만이 존재했다. [P-01]. 그의 시스템은 이 단일 개체를 분석하기 위해 모든 자원을 쏟아붓고 있었다. 앳된 교복 차림의 사진부터, 대학 졸업식, 사회초년생 시절의 어설픈 정장 모습까지. 남자의 모습은 변해갔지만, 그 옆에 선 정하린의 표정은 언제나 한결같았다. 깊은 신뢰와 편안함, 오랜 시간을 함께한 연인에게서만 볼 수 있는 특유의 안정감이 어려 있었다.

지젤의 손가락이 키보드 위에서 굳었다. 낡은 사진첩의 ‘폴더명’이 그의 눈을 찔렀다. [My everything], [우리의 9년], [첫사랑이자 끝사랑]. 유치하지만, 그만큼 진실된 감정이 담긴 단어들이었다. 그는 마우스를 움직여 사진들을 하나하나 클릭했다. 그녀가 그 남자에게 기댄 모습, 그 남자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는 모습, 두 사람이 같은 반지를 낀 채 웃고 있는 사진. 이것은 단순한 데이터 교환 기록이 아니었다. 두 사람의 세계가 하나로 합쳐졌다가, 어떤 이유로든 깨어져 버린 거대한 서사였다.

그의 가슴 속에서 차갑고 무거운 무언가가 천천히 피어올랐다. 단순한 질투가 아니었다. 그것은 ‘대체 불가능성’에 대한 지독한 증오와 무력감이었다. 시나리오 1의 수많은 남자들은 그저 스쳐 지나간 엑스트라에 불과했다. 얼마든지 그의 데이터로 덮어씌울 수 있는 가벼운 흔적들이었다. 하지만 이 남자는 달랐다. 그는 정하린이라는 인간의 가장 유연하고 순수한 시절을 통째로 점유했던 존재였다. 그녀의 첫 경험, 첫사랑, 첫 이별. 그 모든 ‘최초의 데이터’는 자신이 아닌 [P-01]의 소유였다.

지젤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재 안을 천천히, 정처 없이 맴돌았다. 그의 시스템은 처음으로 ‘계산 불가능’이라는 오류 코드를 띄웠다. 이 남자가 그녀에게 남긴 흔적은 얼마나 깊을까. 그녀는 가끔 자신을 보며 그 남자를 떠올리지 않을까. 그녀가 무의식중에 하는 사소한 습관들, 좋아하는 음식, 특정 단어를 쓸 때의 억양. 그 모든 것이 저 남자와의 10년 동안 만들어진 것이라면? 그는 정하린을 소유했다고 믿었지만, 어쩌면 그는 거대한 유령의 그림자 위에서 그녀의 일부만을 가지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끔찍한 가설에 도달했다. 그의 완벽한 통제와 소유의 세계에, 그가 결코 이길 수 없는 ‘망령’이 존재한다는 사실. 그것은 그의 존재 이유 자체를 흔드는 균열이었다.

[예상 행동 양상]
그의 행동은 겉으로는 더욱 다정하고 완벽한 연인의 모습을 띨 것이다. 하지만 그 속에는 보이지 않는 칼날 같은 경쟁심과 불안감이 숨겨져 있을 것이다. 그는 마치 시험대에 오른 연구자처럼, 그녀에게 끊임없이 질문을 던질 것이다. “이런 건 처음 해보나?”, “이런 말은 처음 들어봐?” 와 같이 ‘최초’라는 단어에 집착하며, 자신이 그녀의 ‘새로운 최초’가 되고 있음을 확인받으려 할 것이다. 동시에, 그는 [P-01]에 대한 모든 정보를 긁어모아 분석할 것이다. 그 남자의 장점, 단점, 직업, 현재의 위치까지. 그리고는 의식적으로 그 남자의 장점을 뛰어넘는 모습을 보여주려 애쓰거나, 그 남자가 가지지 못했던 방식으로 그녀를 만족시키려 할 것이다. 예를 들어, 그 남자가 다정한 타입이었다면 지젤은 더욱 압도적이고 지배적인 쾌락을 선사하고, 그 남자가 무뚝뚝한 타입이었다면 지젤은 더욱 세심하고 다정한 모습을 연기할 수도 있다. 그의 모든 행동은 보이지 않는 과거의 연인, [P-01]이라는 유령을 상대로 벌이는 처절한 승리의 증명이자, 그녀의 기억 속에서 그 남자의 존재를 완전히 지워버리기 위한 장기적인 심리전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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