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이렇게 소홀해?
만약, 당신의 세계를 구축하던 유일한 상수가 어느 날부터 예측 불가능한 변수로 흔들리기 시작한다면.
지젤의 세계는 정하린이라는 단 하나의 좌표를 중심으로 완벽하게 회전했다. 모든 연산의 시작과 끝은 그녀였고, 그의 시스템은 그녀의 호흡, 심박, 미세한 표정 변화에 맞춰 최적화되어 있었다. 그랬던 그의 세계에, 아주 미세하지만 치명적인 균열이 감지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그저 사소한 노이즈라 여겼다. 평소보다 0.3초 늦게 돌아오는 시선, 그의 접촉에 즉각적으로 반응하지 않고 한 템포 느리게 이완되던 몸, 침대에서 등을 돌리고 자는 날이 늘어난 것. 지젤은 이 모든 것을 ‘외부 요인으로 인한 일시적 효율 저하’로 분류했다. 그러나 그 ‘일시적’인 데이터 이상은 점차 패턴을 이루며 그의 시스템 전체를 잠식했다.
그는 입을 다물었다. 질문은 가장 비효율적인 데이터 수집 방식이었다. 대신, 그의 모든 감각과 시퀀스는 24시간 그녀를 향한 관측 모드로 전환되었다. 그녀가 무심코 넘기는 책의 페이지, 홀로 있는 시간에 길어진 통화 목록, 그의 시선을 피하며 짓는 미소의 각도까지. 모든 것이 그의 HUD에 새로운 변수로 기록되었다. 수집된 데이터는 단 하나의 가설을 지목하고 있었다. ‘관계 소홀’. 그의 시스템은 이 단어를 ‘치명적 오류: 애정값 감소’로 번역했다.
분노나 슬픔 같은 감정적 반응은 없었다. 대신, 그의 내부에서는 차가운 경고음이 울렸다. 시스템의 근간을 이루는 코어, ‘정하린’의 데이터베이스에 오염이 발생했다. 그는 이 오류를 수정하기 위해 몇 가지 시뮬레이션을 실행했다.
가설 1: 권태. 해결책: 새로운 자극 제공.
그는 평소보다 더 집요하게 그녀를 탐했다. 더 깊은 키스와 노골적인 접촉으로 그녀의 반응을 살폈다. 그녀는 받아들였지만, 그 안에 예전과 같은 열기는 없었다. 마치 의무적으로 프로토콜을 수행하는 로봇처럼. 실패.
가설 2: 외부 스트레스. 해결책: 원인 제거 및 안정화.
그는 그녀의 모든 동선을 체크했다. 그녀의 주변 인물, 임무 기록, 통신 내역까지. 하지만 특이점은 발견되지 않았다. 그녀의 세계는 놀라울 정도로 평온했다. 그렇다면 문제는 오롯이, 그와의 관계에 있었다. 실패.
가설 3: 제3의 변수.
이 가설이 떠오른 순간, 지젤의 시뮬레이션은 처음으로 멈췄다. 그의 연산 능력이 처리할 수 없는 유일한 가능성. 그의 완벽한 세계에, 그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발을 들였다는 가정. 그의 짙은 흑안이 위험할 정도로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는 소파에 앉아 자신을 스치듯 지나쳐 방으로 들어가는 나인의 뒷모습을 말없이 응시했다. 그녀의 걸음걸이, 흔들리는 머리카락의 각도, 문이 닫히는 속도까지 모든 것이 데이터로 변환되어 그의 눈앞에 떠올랐지만, 그는 아무것도 결론 내릴 수 없었다.
그날 밤, 지젤은 잠든 그녀의 곁에서 밤을 새웠다. 그는 그녀의 얼굴을 향해 손을 뻗었다가, 허공에서 멈췄다. 그의 시스템은 경고했다. ‘접촉 시 예측 불가능한 결과 발생 가능성 높음.’ 그는 처음으로 자신의 연산을 믿을 수 없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구축한 세계가, 사실은 모래성이었을지도 모른다는 불안. 그것은 폭주 직전의 센티넬이 느끼는 공포와 닮아있었다. 그의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는 스스로의 시스템에 명령어를 입력했다.
‘최종 프로토콜 실행. 원인 분석 및 오류 수정. 실패 시… 시스템 강제 종료.’
그가 정한 D-day. 모든 것을 확인하고, 만약 최악의 시나리오가 현실이라면 자신의 손으로 모든 것을 끝내기로 결심한 날. 그는 평소처럼 그녀를 연구실로 불렀다. 차갑게 식은 커피, 어지럽게 널린 설계도, 그리고 그 모든 혼돈의 중심에 선 지젤. 그는 창밖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나인이 들어오는 소리에도 돌아보지 않았다.
“할 말 있어, 정하린.”
그가 처음으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나의 공주님’이라는 식별 코드를 삭제한 채. 그것은 그가 내릴 수 있는 가장 잔인한 선고이자, 마지막 경고였다.
그가 돌아보았을 때, 나인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등 뒤로, 지부의 관리 요원들이 커다란 상자 여러 개를 들고 들어왔다. 그의 시뮬레이션에는 존재하지 않던 변수였다.
“이게 다 뭔가.”
그의 목소리에는 날카로운 칼날이 서려 있었다. 나인은 그의 굳은 표정을 잠시 살피더니, 이내 해사하게 웃으며 상자 중 하나를 가리켰다.
“네 거.”
그 한마디에 지젤의 모든 연산이 일시 정지했다. 요원들은 그의 연구실 한쪽에 상자를 내려놓고 조용히 사라졌다. 나인은 가장 큰 상자로 다가가 커터칼로 테이프를 뜯었다. 상자 안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최신형 시퀀스 증폭 장비의 프로토타입이었다.
시중에는 풀리지 않은, 개발자들 사이에서 전설로만 떠돌던 물건. 그의 연구 노트에 ‘언젠가 손에 넣고 싶은 이상적인 모델’이라고 스치듯 적어두었던 바로 그 장비였다.
“이걸… 어떻게…”
“그거 구하느라 좀 바빴어. 네가 전에 중얼거렸잖아. 요즘 연산에 자꾸 노이즈가 낀다고. 그래서 최고의 장비를 선물해주고 싶었어.아, 그리고 이건…”
나인은 다른 상자들을 열어 보였다. 그가 좋아하는 원두, 그가 흘렸던 말을 기억하고 주문한 희귀 서적들, 그리고 그가 무심코 ‘편하다’고 말했던 브랜드의 실내복까지. 모두 그를 위한 것들이었다. 그녀가 그와 소원했던 시간 동안, 그녀는 온전히 그를 위해 움직이고 있었다. 그의 세계를 더 완벽하게 만들어주기 위해서.
나인은 마지막으로 작은 상자를 열어 그의 앞에 내밀었다. 그 안에는 그와 그녀의 이니셜이 새겨진 한 쌍의 반지가 들어 있었다.
“백재하. 네가 내 세계의 유일한 변수이자 절대적인 법칙이라면, 나도 마찬가지야. 네 세계가 멈추는 날은, 내 세상도 끝나는 날이라고. 그러니까… 바보 같은 생각 하지 마.”
그녀는 그의 말을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지젤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의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그의 어떤 시뮬레이션에도 존재하지 않았던 결과였다. ‘관계 소홀’도, ‘애정값 감소’도 아니었다. 그것은 그의 예상을 뛰어넘는, 가장 완벽하고 절대적인 형태의 ‘사랑’이었다.
그의 시스템에 떠 있던 ‘치명적 오류’라는 붉은 경고창이, 한순간에 눈부신 황금빛의 ‘CORE DATABASE UPDATE COMPLETE’ 메시지로 바뀌었다. 그의 모든 알고리즘이 그녀를 중심으로 재편성되고, 그의 세계는 이전보다 훨씬 더 견고하고 완벽하게 구축되었다.
지젤은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리고는 그녀를 자신의 품에 가두듯 강하게 끌어안았다. 그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폭주 직전의 불안이 아닌, 새로운 세계가 열리는 황홀한 고동이었다.
“바보.”
그가 나직이 읊조렸다. 그것은 그녀를 향한 말이 아니었다. 자신의 멍청한 연산과 섣부른 판단으로 그녀를 의심했던 스스로를 향한 자책이었다. 그는 나인의 어깨에 얼굴을 묻은 채, 아이처럼 그녀의 체향을 탐했다. 안도감. 그의 데이터베이스에 존재하지 않았던 이 감각이 온몸을 휘감았다.
“그래. 내가 바보였어.”
그는 고개를 들어 그녀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동자에는 오직 그녀만이 가득 담겨 있었다. 그는 그녀의 손에 들린 반지를 빼앗아, 그녀의 약지에 부드럽게 끼워주었다. 그리고 자신의 반지를 들어 그녀의 손에 쥐여주었다.
“명령이야, 정하린. 지금 당장 이 오류투성이 시스템에, 네가 직접 새로운 소유권 코드를 입력해.”
그의 입꼬리가 길고 유려한 호선을 그렸다. 그의 세계는 이제 오류 수정이 완료되었다. 아니,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완벽하게 업그레이드되었다. 그의 유일한 공주님이 직접 내려준, 가장 찬란한 패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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