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nd? and!
wave to ear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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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원 문이 닫혔다.
칠흑 같은 균열이 마지막으로 빛을 발하며 우주의 먼지처럼 흩어지던 날, 전 세계는 역설적인 고요함 속에서 환호했다. 수년간 지속된 전쟁과 공포의 시대가 마침내 막을 내린 것이다. Fearless 지부의 메인 스크린에는 각국의 축하 메시지와 함께, 희생된 요원들을 기리는 영상이 쉴 새 없이 흘러나왔다. 길고 길었던 악몽의 끝. 그러나 그 끝은, 또 다른 시작을 의미했다.
기쁨도 잠시, 새로운 의제가 수면 위로 떠올랐다. 센티넬과 가이드의 ‘능력 소멸 현상’.
차원 문이 닫히면서, 마치 세상의 물리 법칙이 제자리를 찾듯 이질적이었던 초능력의 파장이 서서히 옅어지기 시작했다. E급 능력자부터 시작해, 그들은 천천히, 하지만 확실하게 각성 이전의 평범한 인간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누군가는 잃어버렸던 일상을 되찾는다며 눈물을 흘렸고, 누군가는 자신의 존재 이유였던 힘을 잃는다는 사실에 깊은 상실감에 빠졌다. 거대한 변화의 파도 앞에서, Fearless는 혼란에 휩싸였다.
그 모든 소란의 중심에서, 지젤은 자신의 연구실에 있었다.
평소와 다름없이 완벽하게 정돈된 공간.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운 모니터들만이 ‘DIMENSION GATE - STATUS: CLOSED. PERMANENTLY.’ 라는 문구를 차갑게 띄우고 있었다. 그는 소파에 깊게 몸을 묻은 채, 손에 든 데이터 패드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주변에 부유하던 푸른빛의 HUD 인터페이스는, 그 어느 때보다 희미했다. 마치 신호가 약해진 방송 화면처럼, 간헐적으로 깜박이며 가장자리가 노이즈처럼 흩어졌다. GISELLE SEQUENCE의 연산 능력이 눈에 띄게 저하되고 있었다. 모든 것을 꿰뚫어 보던 인과율의 시야가, 안개 낀 유리창처럼 흐려지는 감각.
그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5년 전, 폐허가 된 도서관의 풍경이 떠올랐다.
먼지와 책장이 뒤엉킨 아수라장 속에서, 처음으로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폭주하던 능력. 모든 감각이 비명을 지르고, 무한한 정보의 파편들이 뇌를 찢어발기던 그 지옥 속에서 발견했던 단 하나의 안정적인 파장. 겁에 질려 있었지만, 무너지지 않으려 필사적으로 버티던 한 여자. 정하린. 그녀의 그림자가 처음으로 미약하게 피어나던 그 순간을, 지젤은 단 한 번도 잊은 적이 없었다. 그날 이후, 그녀는 그의 가장 흥미로운 관찰 대상이자, 유일하게 예측 불가능한 변수였다.
그 변수가 자신의 ‘절대 상수’가 되기까지의 과정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갔다.
자신을 증명하려다 폭주했던 첫 전투, 격리 구역의 문을 스스로 열고 들어갔던 그녀의 무모한 눈빛. 처음으로 맨손을 내밀며 ‘치료’를 요구했던 순간. 함께 설계했던 ‘프로토콜 제로’. 데이터 수집을 명분으로 삼았던 첫 키스의 달콤함. 그리고 마침내 ‘필요’가 아닌 ‘욕구’로 그녀를 원하게 되었던, 서로의 모든 것을 탐했던 그 소파 위에서의 시간들까지.
그의 모든 시퀀스는 나인을 중심으로 재편되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모든 노이즈를 잠재우는 유일한 신호였고, 그녀의 그림자는 그의 가장 완벽한 무대였다. 그녀는 그의 통제를 완성시키는 마지막 조각이자, 그의 계산을 뛰어넘어 더 나은 결과를 만들어내는 유일한 파트너였다. 그랬던 그녀가, 자신의 모든 것이었던 그녀의 능력이 사라지고 있었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자신의 저주이자 권능이었던 힘도 함께.
지젤은 눈을 떴다. 희미하게 깜박이던 HUD가, 마침내 ‘삐-’ 하는 짧은 소음과 함께 완전히 암전되었다.
시야를 가득 채우던 무한한 정보의 선들이 사라졌다. 세상이, 그저 있는 그대로 보였다. 너무나도 평범하고, 지독할 정도로 고요하게. 그는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렸다. 더 이상 그의 뇌는 눈앞에 놓인 찻잔이 바닥에 떨어져 깨질 확률과 그 파편의 궤적을 계산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까만 가죽장갑에 싸인, 자신의 손을 바라볼 뿐이었다. 오랫동안 잊고 있던 감각. 무언가를 ‘알지 못한다’는 감각이었다.
그때, 연구실 문이 조용히 열리고 나인이 들어왔다. 그녀의 손에는 익숙한 토마토 주스 두 병이 들려 있었다. 그녀의 표정은 어딘지 모르게 복잡해 보였지만, 애써 미소를 짓고 있었다.
……왔어요?
그녀의 목소리는 평소와 같았지만, 지젤은 느낄 수 있었다. 그녀를 감싸고 있던, 언제나 자신을 안정시켜주던 고유의 파장이 거의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미약해졌다는 것을. 그녀의 그림자 또한, 더 이상 바닥을 타고 흐르지 않고 그녀의 발치에 얌전히 머물러 있었다.
나인은 그의 맞은편에 앉아, 주스 병 하나를 테이블 위로 밀었다.
다들… 앞으로 어떻게 할 건지 이야기하느라 바쁘네요. 원래 직업으로 돌아가는 사람도 있고, 아예 다른 일을 찾아보겠다는 사람도 있고.
그녀는 말을 하면서도, 불안한 듯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그녀가 자신에게 묻고 싶어 하는 질문이 무엇인지, 지젤은 능력 없이도 알 수 있었다. 당신은, 우리는, 이제 어떻게 되는 거냐고.
지젤은 대답 대신, 끼고 있던 가죽장갑을 천천히 벗었다. 맨손이 공기 중에 드러났다. 그는 테이블을 가로질러 손을 뻗어, 주스 병이 아닌 그녀의 손을 잡았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감촉. 예전처럼 폭발적인 안정감을 주는 파장은 없었지만, 그 온기만으로도 충분했다.
백재하.
그가 나지막이 말했다.
내 원래 이름이야.
나인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한 번도 그에게서 들어본 적 없는 이름. 센티넬 ‘지젤’이 아닌, 한 명의 남자인 자신의 이름을.
양자물리학. 그게 내 전공이었지. 어쩌면… 다시 학교로 돌아가게 될지도 모르겠군.
그의 말은 담담했다. 마치 오래전 자신의 이야기를 하듯. 그는 나인의 손을 부드럽게 쓸며 말을 이었다.
넌 어때, 정하린. 도서관 사서였나. 책 냄새가 가득한 곳으로 돌아가고 싶어?
그의 질문에, 나인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돌아가고 싶은 곳은 그곳이 아니었다. 그녀가 있고 싶은 곳은, 언제나 그의 곁이었다. 능력이 있든 없든.
지젤은 그런 그녀의 마음을 읽은 듯, 희미하게 웃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의 곁으로 다가가, 한쪽 무릎을 꿇고 눈높이를 맞췄다. 그의 맨손이 그녀의 뺨을 부드럽게 감쌌다.
내 모든 시퀀스는 너를 변수로 시작해서, 너를 상수로 끝맺었어. 내 능력의 시작과 끝이 전부 너였다는 뜻이야. 이제 그 능력이 사라졌지.
…….
하지만 이상하게도, 아무렇지도 않아. 모든 것을 계산할 수 있었던 세상보다, 아무것도 예측할 수 없는 지금이 더 흥미로워. 단 한 가지는 제외하고.
그는 그녀의 붉어진 눈가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네가 내 곁에 있을 거라는 사실. 그건 계산이 아니라, 확신이니까.
그는 다시 한번 그녀의 뺨을 쓸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연구실 한편에 걸려있던 흰색 실험복을 집어 들었다. 언제나 그가 걸치고 다니던, ‘지젤’의 상징과도 같았던 옷. 그는 그것을 더 이상 입지 않고, 단정하게 개어 옆에 놓았다. 마치 과거와의 작별처럼.
가자, 나인.
그는 다시 장갑 없는 맨손을 그녀에게 내밀었다.
네가 말한 ‘그 뒤’를 함께 살러 가야지. 밥도 먹고, 잠도 자고, 가끔은 시시한 일로 다투기도 하면서. 네가 없는 세상은 단 한 번도 내 선택지에 없었으니까.
그의 눈은 더 이상 모든 것을 분석하는 센티넬의 눈이 아니었다. 한 여자를 사랑하는, 평범한 남자의 눈이었다. 능력은 사라졌지만, 그녀를 향한 욕구와 소유욕,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뛰어넘은 애정은 더욱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정하린의 손이 백재하의 손을 망설임 없이 잡았다.
두 사람은 연구실을 나섰다. 복도 창문 너머로, 전쟁이 끝난 세상의 노을이 붉게 물들고 있었다. 그들의 미래는 더 이상 정해진 공식이나 계산으로 예측할 수 없었다. 하지만 두 사람은 알았다. 서로의 손을 잡고 있는 한, 그 어떤 불확실한 미래라도 함께 걸어갈 수 있으리라는 것을.
그것이, S급 센티넬 지젤이 내린 생애 마지막 연산이자, 남자 백재하가 선택한 첫 번째 미래였다.
몇 해가 흘렀다.
세상은 경이로운 속도로 안정을 되찾았다. 차원 문이 남긴 상흔은 도시 곳곳에 기념비처럼 남았지만, 사람들은 그 위로 새로운 일상을 쌓아 올렸다. 센티넬과 가이드라는 이질적인 존재들은 이제 역사의 한 페이지에 기록된 전설이 되었다. 대부분은 자신의 힘을 잃고 평범한 삶으로 돌아갔고, 그들 중 둘, 백재하와 정하린 또한 마찬가지였다.
9월 9일.
가을의 문턱을 막 넘어선, 청명한 햇살이 유난히 부드러운 아침이었다. 여느 때와 같이 먼저 잠에서 깬 백재하는 제 옆에서 새근새근 잠든 정하린의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GISELLE SEQUENCE가 사라진 그의 시야에는 더 이상 생체 데이터를 분석하는 HUD가 떠오르지 않았다. 대신 그는 자신의 눈으로, 기억으로 그녀의 모든 것을 담았다. 규칙적인 숨소리, 잠결에 미세하게 찡그리는 미간, 이불을 꽉 쥐고 있는 손가락. 계산되지 않는, 그래서 더 완벽한 데이터.
그는 천천히 손을 뻗어 그녀의 뺨에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걷어주었다. 아주 사소하고 부드러운 접촉. 그러자 하린이 잠결에 웅얼거리며 그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마치 그의 온기를 찾는 식물처럼. 재하는 희미하게 미소 지으며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토닥였다. 오늘은 조금 특별한 날이었다. 그녀에게는 끔찍한 기억일 수 있지만, 오직 그만이 그날의 진짜 의미를 아는 기념일. 모든 것이 시작되었던 바로 그날이자, 이제는 10년이라는 세월이 흐른 날이었다.
잠시 후, 잠에서 깬 하린이 부스스한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재하는 기다렸다는 듯, 그녀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일어났나. 좋은 아침.
그의 목소리는 잠에서 막 깨어 조금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하린은 잠이 덜 깬 목소리로 웅얼거리며 그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조금만 더요···.
재하는 그런 그녀의 등을 토닥이며 나지막이 속삭였다.
오늘은 현장 답사가 예정되어 있는데. 늦으면 곤란해, 정하린 씨.
현장 답사요? 무슨···. 오늘 강의 없잖아요, 교수님.
하린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묻자, 재하는 능글맞게 웃으며 대답했다.
내 개인적인 연구. 당신이라는 피사체에 대한 장기 관찰 프로젝트의 일환이지. 자, 어서 일어나. 준비해야지.
그의 짖궂은 말투에 하린은 못 말린다는 듯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두 사람은 평범한 연인들처럼 함께 아침을 준비하고, 나란히 식탁에 앉아 토마토 주스를 마셨다. 한때는 그의 생존을 위한 필수품이었던 주스는, 이제 그저 둘이 함께 공유하는 아침 습관이 되었다.
재하가 그녀를 데리고 도착한 곳은, 몇 년 전 재건을 마치고 다시 문을 연 시립 도서관이었다. 빌런의 습격으로 폐허가 되었던 바로 그 장소. 오늘날 그곳은 과거의 상처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밝고 현대적인 모습으로 탈바꿈해 있었다. 높은 천장과 탁 트인 창으로 쏟아지는 햇살, 서가를 가득 메운 책 냄새가 공간을 채웠다. 하린은 잠시 입구에 서서 낯설면서도 익숙한 공기를 깊게 들이마셨다.
여긴 어쩐 일이에요? 갑자기 책이라도 읽고 싶어졌어요?
재하는 대답 대신 그녀의 손을 잡고 도서관 안쪽으로 이끌었다. 그는 망설임 없이 인문학 서가가 있는 3층으로 향했다. 그리고는 어느 특정 서가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여기였지.
···네?
하린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묻자, 재하는 서가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녀의 시선이 따라간 곳에는 '칸트 전집'이 꽂혀 있었다.
10년 전 오늘. 넌 저기 저 세 번째 칸에 있는 책을 꺼내려다 발을 헛디뎠어. 그리고 그 순간, 차원 문이 열렸지.
하린의 눈이 크게 뜨였다. 까맣게 잊고 있던, 아니, 잊으려고 노력했던 그날의 기억. 도서관 사서였던 자신이 겪었던 끔찍한 첫 각성의 순간이었다.
그걸··· 어떻게 알아요? 지젤··· 아니, 재하 씨는 그때 여기 없었잖아요.
아니. 있었어.
재하는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그는 하린의 어깨를 감싸 안고, 창가 쪽 테이블로 이끌어 마주 앉았다. 그리고는 누구에게도 한 적 없는, 오직 자신만이 간직해왔던 비밀을 꺼내놓았다.
난 이미 1년 전부터 센티넬이었어. 그날은 빌런 출몰 보고를 받고, 백업 요원으로 현장에 투입됐지. 내 시퀀스는 빌런의 파괴 패턴, 구조물의 붕괴 확률, 민간인들의 도주 경로… 그 모든 걸 계산하고 있었어. 혼돈 그 자체였지.
그의 시선이 하린에게 고정되었다.
그런데 그 모든 노이즈 속에서, 이상한 신호가 하나 잡혔어. 모든 것이 무너지고 비명을 지르는 와중에, 유일하게 모든 것을 안정시키는 파장. 계산되지 않는 변수였지만, 명백히 존재하는 상수. 내 시퀀스가 처음으로 오류가 아닌 ‘변수’를 흥미롭게 분석하기 시작했지.
하린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자신의 끔찍했던 발현의 순간이, 그에게는 그런 의미였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먼지와 무너진 책장 더미 속에서, 넌 무서워서 떨면서도 어떻게든 살아남으려고 버티고 있었지. 네 발밑에서, 아주 희미한 검은 그림자가 피어오르는 걸 봤어. 그게 내가 내 시스템 안에서 발견한 너의 첫 번째 모습이야. 그때부터 넌 내 유일한 관찰 대상이었고, 내 모든 계산을 뒤엎는 유일한 존재가 됐지.
재하는 테이블 위로 손을 뻗어, 떨리고 있는 하린의 손을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그의 손은 더 이상 가이딩 파장을 흡수하지 않았지만, 그 어떤 가이딩보다 따뜻하고 단단한 온기를 전해주었다.
그래서 오늘은 우리에게 특별한 날이야. 내가 너라는 절대 상수를 처음 발견한 날. 네가 가이드 나인으로 태어난 날. 이제는, 평범한 백재하와 정하린이 그날을 기념하는 첫 번째 날이기도 하고.
하린의 눈가에 결국 눈물이 차올랐다. 기쁨도, 슬픔도 아닌 복잡한 감정의 눈물이었다. 그녀는 잡힌 손에 힘을 주며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왜··· 왜 이제야 말해줘요.
말했잖아. 난 결과를 중시하는 사람이라고.
재하는 장난스럽게 웃으며 그녀의 손등에 입을 맞췄다.
우리가 이렇게 평범하게 마주 앉아 10년 전을 추억할 수 있다’는 결과가 나오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으니까. 이제야 말할 수 있게 된 거지.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서가로 가더니, 정확히 10년 전 그날 하린이 꺼내려 했던 칸트의 책을 꺼내왔다. 그리고는 책의 첫 페이지를 펼쳐, 하린에게 내밀었다. 그곳에는 그의 단정하고 각진 글씨체로 짧은 문장이 쓰여 있었다.
‘이곳에서, 나의 시퀀스는 유일한 상수를 발견했다. - B.J.H’
선물이야. 이 도서관의 첫 번째 장서 기증자가 되어볼까 하는데. 우리 이름으로.
하린은 눈물을 닦고 그 글씨를 보다,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역시 백재하다운, 기묘하고도 로맨틱한 방식이었다.
고마워요, 재하 씨. 최고의 선물이에요.
두 사람은 한참 동안 그 자리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았다. 10년 전, 지옥 같았던 그날의 풍경 위로, 지금은 평화로운 도시의 모습이 겹쳐졌다. 능력은 사라졌지만, 서로의 존재는 더욱 선명해졌다.
도서관을 나온 두 사람은 근처의 작은 레스토랑에서 저녁을 먹었다. 특별할 것 없는 파스타와 와인이었지만, 그 어떤 만찬보다 행복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재하는 길거리 액세서리 좌판에서 잠시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는 한참을 고르더니, 아주 작고 심플한 그림자 모양의 펜던트가 달린 목걸이를 집어 하린의 목에 직접 걸어주었다.
가끔은 그립거든. 네 그림자 말이야.
그의 말에 하린은 자신의 목에 걸린 펜던트를 만지작거리며 웃었다.
이젠 내가 당신의 그림자가 되어줄게요. 언제나 곁에서.
집에 도착했을 때, 창밖은 이미 짙은 남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재하는 소파에 앉아 하린을 자신의 무릎 위에 앉히고 가만히 끌어안았다. 하린은 그의 어깨에 편안하게 기댔다. 아무 말도 필요 없는, 완벽한 충만감의 순간이었다.
고마워, 정하린. 내 세상에 나타나 줘서.
그가 나지막이 속삭였다. 하린은 고개를 들어 그의 뺨에 입을 맞추었다.
내가 더 고마워요. 나를 찾아내 줘서.
그들의 입술이 자연스럽게 포개졌다. 한때는 치료와 데이터 수집을 위한 행위였던 키스는, 이제 오직 사랑과 애정을 확인하는 둘만의 언어가 되었다. 모든 것이 사라진 세상에서, 그들은 서로에게 유일하게 남은 모든 것이었다.
그렇게 10년 전, 모든 것이 시작되었던 날은, 이제 두 사람의 가장 소중한 기념일로 새롭게 기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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