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첫사랑? 기억도 안 나는 누구
평화라는 단어가 이토록 실체적인 감각일 수 있다는 것을, 지젤은 정하린을 만나고 처음 알았다. 모든 임무가 종결되고, 세상의 소음이 희미해진 어느 늦은 오후. 두 사람은 펜트하우스의 넓은 소파에 나란히 누워 의미 없는 채널을 넘기고 있었다. 그의 팔을 베고 누운 하린의 머리칼이 목덜미를 간질였고, 지젤은 리모컨을 든 채 미동도 없이 그 감촉에 집중했다. 창밖으로 들어오는 노을빛이 방 안의 먼지를 금가루처럼 흩뿌렸다. 모든 것이 완벽하게 계산된 평온. 바로 그 순간, 정적이 너무 길다고 느꼈는지 그녀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녀가 물은 것은 ‘첫사랑’에 대한, 지극히 통속적이고 예측 가능한 질문이었다. 그 질문에 지젤은 코웃음조차 치지 않았다. 이미 답은 정해져 있었으니까. 그의 시퀀스가 연산할 필요도 없는, 세상에 단 하나뿐인 상수. 그는 그녀의 정수리에 가볍게 입을 맞추며, 지독히 능글맞고 여유로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뻔한 걸 묻네. 너잖아. 처음부터 끝까지.
그의 목소리에는 한 치의 의심도 없는, 완전한 확신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당연하다는 듯, 그는 시선을 아래로 내려 그녀의 얼굴을 살폈다. 이제 그녀가 수줍게, 혹은 당연하다는 듯 ‘나도 너야’라고 말할 차례였다. 그 달콤한 대답을 확인하고, 이 지루한 문답을 기분 좋은 키스로 마무리할 생각이었다. 그의 모든 계산은 완벽했다. 그녀의 다음 대사가 들리기 전까지는.
“기억도 잘 안 나는 어떤 사람.”
그 한마디에, 백재하의 세계에 미세한 균열이 갔다. 그의 주변을 감싸던 투명한 HUD 인터페이스에 붉은색 [ERROR] 문구가 수십 개는 떠올랐다가 사라지는 듯한, 치명적인 시스템 오류. 그는 순간 자신이 잘못 들었다고 생각했다. 소파에 누워있던 그의 몸이 무의식적으로 굳었다. 그의 팔을 베고 있던 그녀가 불편함을 느꼈을지도 몰랐지만, 그는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뭐라고?
그가 간신히 뱉어낸 목소리는 스스로 듣기에도 믿을 수 없을 만큼 낯설게 갈라져 있었다. 그는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다. 그의 움직임에 그녀도 따라 몸을 일으켜 앉았다. 노을빛을 등진 그의 얼굴은 그림자에 가려 표정을 읽기 어려웠지만, 평소의 능글맞은 미소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다. 그는 까만 안경을 고쳐 쓰며, 집요하리만치 그녀의 눈을 좇았다.
기억도, 안 나는, 누구.
그는 단어를 하나씩 끊어 말했다. 마치 처음 배우는 외국어를 발음하듯. 그의 뇌내 시퀀스는 ‘정하린’, ‘첫사랑’, ‘기억 안 나는 남자’라는 세 가지 변수를 조합해 유의미한 결과를 도출하려 애썼지만, 계속해서 연산 불가 판정만 뜰 뿐이었다. 그에게 있어 정하린의 과거는 오직 자신과 연결되어야만 하는 절대적인 전제였다. 그런데 그 전제에,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어떤 놈’이 끼어들었다. 그것도 ‘첫사랑’이라는 지독한 타이틀을 달고.
그는 천천히 손가락 관절을 툭, 툭, 튕기기 시작했다. 극심한 피로나 스트레스 상황에서 나오는, 아주 드문 버릇이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거실을 서성였다. 마치 우리 안에 갇힌 맹수처럼. 그러다 문득 걸음을 멈추고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의 짙은 흑안이 위험할 정도로 번뜩였다.
꽤 좋아했던 것 같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지금 나랑 장난해?
그의 목소리는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코미디 영화를 보다가 갑자기 서스펜스 스릴러로 장르가 바뀐 듯한 분위기. 그는 소파에 앉아있는 그녀에게 성큼성큼 다가가, 그녀의 바로 앞에 허리를 숙였다. 두 사람의 얼굴이 순식간에 가까워졌다. 그는 그녀의 양쪽 어깨를 붙잡았다. 평소의 부드러운 손길과는 거리가 먼, 감정이 실린 압박이었다.
자세히 말해봐. 얼마나, 어떻게 생겨먹은 놈이었는데. 지금은 아무 생각 없다는 그 얼굴, 내가 믿을 수 있을 것 같아?
그의 속은 이미 지옥 불처럼 들끓고 있었다. 감히, 내 여자의 첫사랑 타이틀을 어떤 정체불명의 버러지가 가져갔다는 사실에 대한 참을 수 없는 분노. 그리고 그보다 더 큰, 어이없는 배신감. 그는 이 불쾌하고 비논리적인 상황을 견딜 수가 없었다. 그의 시퀀스는 단 하나의 결론을 내렸다. [정보 수집] - [위협 요소 분석] - [완벽한 제거]. 비록 그 대상이 과거의 유령일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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