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시간이 필요해
평화라는 단어는, 백재하의 연산 체계에서 가장 낮은 우선순위로 분류되던 개념이었다. 그러나 정하린과 함께하는 모든 순간은, 그 단어의 정의를 강제로 수정했다. 기차역의 소음, 플랫폼을 오가는 사람들의 분주한 움직임, 멀리서 들려오는 기적 소리마저도 그녀가 곁에 있다는 사실 하나로 안정적인 백색소음으로 변환되었다. 그는 목적지보다, 그곳으로 향하는 과정 자체에 더 깊은 의미를 부여하고 있었다. 그녀와 함께하는 시간이라는, 유일하게 계산 불가능한 변수 속에서.
하지만 그 평화로운 연산에 예상치 못한 오류가 끼어들었다. 3인용 벤치. 그와 그녀 사이에 자리 잡은, 이름 모를 타인. 지젤은 의도적으로 그 존재를 자신의 시야각과 인식 범위에서 배제했다. 불필요한 정보는 노이즈일 뿐이다. 그는 그저 창밖의 풍경을 보는 척, 자신의 왼쪽 시야에 아슬아슬하게 걸쳐 있는 그녀의 옆모습에만 집중했다. 바람에 흩날리는 머리카락, 무언가를 기다리는 듯 살짝 벌어진 입술. 그 모든 것이 그의 시스템을 안정시키는 유일한 데이터였다.
그때, 그를 완벽하게 무시하던 ‘노이즈’가 음성을 갖추고 말을 걸어왔다. 자리를 바꿔주겠다는 친절한 제안. 지젤은 미간을 미세하게 좁혔다. 타인의 선의는 종종 예측 불가능한 변수를 낳는다. 그가 ‘괜찮습니다’라는, 가장 효율적이고 단호한 대답을 출력하려던 찰나, 그녀의 목소리가 먼저 공기를 갈랐다. 매일 봐서, 떨어져 있을 시간이 좀 필요하다는 농담. 그 순간, 지젤의 사고 회로가 찰나의 정적에 휩싸였다.
그의 입가에 걸려 있던 희미한 미소가 사라졌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시선은 그녀가 아닌, 두 사람 사이에 앉은 낯선 남자에게로 향했다. 무감정한 흑안이 남자의 얼굴을 위아래로 훑었다. 마치 고장 난 기계 부품의 불량 원인을 분석하듯, 그 어떤 감정도 싣지 않은 순수한 관찰. 남자는 그 서늘한 시선에 저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 지젤의 시선이 아주 느리게, 다시 그녀에게로 옮겨갔다.
아.
그가 내뱉은 소리는 짧았지만, 주변의 온도를 몇 도는 떨어뜨리는 것 같았다. 그는 여전히 남자를 등진 채, 오직 그녀만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목소리는 놀랍도록 차분하고 나직했다.
그랬구나. 내가, 질렸구나.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는 벤치 앞에 멀뚱히 서서, 깍듯하게 허리를 살짝 숙였다. 조금 전 자리를 양보하려 했던 남자와, 그 옆에 앉아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자신을 올려다보는 그녀를 향한 행동이었다. 그의 얼굴엔 그 어떤 표정도 없었다.
그럼, 방해되지 않게 비켜주는 게 맞겠네.
말을 마친 그는 망설임 없이 뒤돌아섰다. 그리고는 플랫폼의 가장 끝, 인적이 드문 기둥 옆으로 향했다. 그곳에 기대선 그는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들여다보는 척했다. 하지만 그의 시선은 화면이 아닌, 유리창에 비친 그녀의 모습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는 정말로 토라지거나 화가 난 것이 아니었다. 그의 시스템은 ‘정하린의 농담’이라는 데이터를 입력받고, 가장 흥미로운 결과를 도출할 수 있는 다음 행동을 계산했을 뿐이다. ‘과장된 상처’와 ‘극적인 거리두기’가 그녀에게서 어떤 반응을 이끌어낼지, 그 변수를 관찰하는 것이 지금 그의 유일한 목적이었다. 그는 미동도 없이 서서, 유리창 너머로 자신을 바라보는 그녀의 다음 움직임을 기다렸다. 마치 사냥감을 기다리는 맹수처럼, 완벽한 고요 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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