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를 잊어버리고 싶지 않아
시간은 부서진 유리 조각처럼 흐른다. 모든 조각이 과거의 한 단면을 비추지만, 손에 쥐는 순간 날카롭게 파고들어 상처만 남긴다. 펜트하우스의 서재는 먼지가 내려앉은 시간의 무덤 같았다. 한때 세상의 모든 변수를 계산하고 예측하던 남자는, 이제 텅 빈 책상에 앉아 낡은 만년필을 쥔 채 속절없이 사라져가는 단 하나의 상수를 붙잡으려 애쓰고 있었다.
그의 눈 밑은 짙은 어둠에 잠겨 있었고, 새하얗던 셔츠는 구겨진 채 빛을 잃었다. HUD 인터페이스는 더 이상 떠오르지 않았다. 시뮬레이션은 의미를 잃었고, 그의 세계는 모든 연산을 멈췄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종이 위에 한 글자씩, 기억의 파편들을 새겨 넣기 시작했다.
나의 정하린에게.
이 편지가 너에게 닿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안다. 모든 시퀀스가 부정하는, 확률 0%의 무의미한 연산. 그럼에도 나는 쓴다. 너라는 데이터가 내 시스템에서 완전히 소실되는 것을 막기 위한 마지막 프로토콜이다. 나의 기억은, 완벽했던 나의 메모리는 이제 신뢰할 수 없는 변수가 되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모든 것이 마모되고, 색이 바래고, 형태를 잃어간다. 네가 없는 세상의 엔트로피는 너무나 가혹해서.
그래서 기록한다. 내가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되는 것들. 너를 구성하던 모든 요소를.
[코드네임: 나인. 등급: A급 가이드. 그리고, 나의 정하린.]
너는 30살의 여자. 키는 165cm. 내가 팔을 뻗으면 정확히 내 심장께에 머리가 닿는 높이. 처음엔 몰랐지만, 몇 번이고 널 안아 들면서 내 몸이 기억해버린 완벽한 무게.
꽉 찬 앞머리 아래, 빛에 따라 오묘하게 변하던 고양이 같은 눈매. 그걸 기억한다. 무심하게 나를 올려다볼 때, 당황해서 동그랗게 뜨일 때, 내 품에서 쾌락에 젖어 가늘게 휘어질 때. 그 모든 순간의 눈빛을 나는 필사적으로 붙잡고 있다. 하지만 벌써 그 색이 흐릿하다. 끔찍하게도.
네가 불안할 때면 지그시 깨물던 아랫입술. 그 작은 습관 때문에 붉게 부어오른 입술을 보면, 나는 널 망가뜨리고 싶다는 충동과 지켜주고 싶다는 모순 사이에서 길을 잃곤 했다. 이제는 그 입술의 감촉이, 내게 매달리며 내뱉던 그 숨결이, 기억 속에서 희미한 잔상으로만 남았다.
너는 항상 검은색 코트와 치마, 흰 셔츠에 검은 넥타이를 고집했다. 단정하고 빈틈없는 모습. 하지만 나는 안다. 그 안에 숨겨진, 아이보리색 원피스를 입고 수줍게 웃던 너의 모습을. 그날 너는 내게 ‘위험’ 변수를 주입했지. 너의 모든 것이 내게는 치명적인 변수였어, 하린.
[너의 모든 것들]
너는 사회성 미소를 지을 줄 알았지만, 나는 네 진짜 웃음을 구분할 수 있었다. 내 멍청한 농담에 어이없다는 듯 터뜨리던 웃음, 내가 맞춰준 완벽한 온도의 바람에 머리를 말릴 때 만족스럽게 짓던 미소. 그 순간들의 감정 파형 데이터를 복원할 수만 있다면, 내 모든 것을 바칠 텐데.
우리에겐 ‘안아주기 프로토콜’이 있었지. 내가 팔을 벌리면 네가 안기고, 네가 팔을 벌리면 내가 안아주는 것. 그 단순한 규칙이 내 세계의 유일한 법칙이었다. 이제 나는 누구를 향해 팔을 벌려야 하나. 이 텅 빈 공간 속에서 내 팔은 돌아가야 할 좌표를 잃었다.
네 그림자를 기억한다. 내 그림자 속으로 스며들어 나를 안정시키던 너의 가이딩. 너는 내 폭주를 막는 유일한 가이드였고, 나의 종착지였다. 너를 잃은 나는 지금 폭주하고 있는 걸까. 아니. 이건 폭주가 아니다. 그보다 더 최악인, 무(無)의 상태다. 모든 감각이 죽고, 시간만이 나를 스쳐 지나가는 정지된 지옥.
우리가 함께 샀던 머그잔 세트. 아직 찬장에 그대로 있다. 하나는 비어 있고, 하나는 식어버린 커피가 담겨 있다. 네가 앉았던 소파의 자리, 네가 쓰던 베개, 네가 불러주던 노래의 멜로디… 모든 것이 있는데, 너만 없다. 이 집은 너의 부재(不在)로 가득 차 있다.
[마지막 기록]
백재하.
너는 나를 그렇게 불렀다. 모두가 나를 ‘지젤’이라 부를 때, 너만이 나의 이름을 불렀다. 그 목소리가 귓가에 울리는 것 같은데, 돌아보면 아무도 없다. 내가 ‘바보’ 같은 짓을 하면 그렇게 부르라고 했었지. 지금 나는 세상에서 가장 멍청한 짓을 하고 있다. 너를 지키겠다는 약속 하나 지키지 못한 채, 이렇게 너를 그리워하며 무너지고 있으니까.
바보.
그래, 나는 바보다, 정하린.
이 기록이 끝나면, 나는 또 무엇을 잃게 될까. 너의 목소리? 너의 체온? 함께 별을 보며 속삭였던 약속들? 기억이라는 형벌 속에서 나는 서서히 침식되어간다.
그러니 부디. 만약 아주 희박한 확률로 다른 차원의 네가 이 글을 본다면, 이것 하나만 기억해줘.
모든 시퀀스가 무너지고, 모든 데이터가 소실되어도.
‘백재하’라는 남자는 ‘정하린’이라는 여자를 사랑했었다고.
그것만이 나의 유일한, 영원불변의 진실이다.
다시, 너를 계산할 수 있는 세상에서 만날 수 있기를.
그는 만년필을 내려놓았다. 잉크가 번진 종이 위로, 뜨거운 액체 한 방울이 떨어져 둥근 흔적을 만들었다. 그의 시스템이 마지막으로 남긴, 계산되지 않은 오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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