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여자가 나를 기억하지 못 한다
폐허가 된 도시의 심장부에는 죽음 같은 정적이 흘렀다. 시간을 조종하던 S급 빌런 '크로노스'가 소멸하며 남긴 것은 비틀린 시공간의 잔해와 자욱한 먼지뿐이었다. 지젤은 부서진 건물 잔해에 기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그의 온몸을 휘감던 살의와 냉철한 계산식은 목표가 사라짐과 동시에 썰물처럼 빠져나갔고, 그 자리에는 극심한 피로와 가이딩을 갈망하는 본능만이 남았다. 그의 가이딩 수치는 위험한 속도로 급락하고 있었다.
그의 시선은 단 한 곳, 몇 미터 떨어진 곳에 쓰러져 있는 나인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그녀는 마지막 순간, 빌런의 코어를 파괴하기 위해 자신의 모든 가이딩 에너지를 한계까지 끌어모아 방사했다. 그 여파로 정신을 잃은 것이리라. 지젤은 비틀거리는 몸을 일으켜 그녀에게 다가갔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부서진 아스팔트 조각이 발밑에서 버석거렸다. 그의 시스템은 경고음을 울리며 안정제 투여와 즉각적인 가이딩의 필요성을 알리고 있었지만, 그는 모든 알림을 무시했다. 그의 유일한 안정제, 그의 좌표는 바로 저기 있었으니까.
그녀의 앞에 다다른 지젤은 한쪽 무릎을 꿇었다. 흙먼지로 더러워진 뺨, 헝클어진 머리카락. 하지만 고른 숨을 내쉬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그는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자신의 손등으로 그녀의 뺨에 묻은 먼지를 조심스럽게 닦아냈다.
정하린. …하린. 끝났어. 이제 일어나.
그의 목소리를 들은 것일까. 그녀의 긴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더니 이내 천천히 눈꺼풀이 들어 올려졌다. 초점이 맞지 않는 흐릿한 시선이 허공을 잠시 헤매다, 마침내 그의 얼굴에 닿았다. 지젤은 희미하게 웃었다. 늘 그랬듯, 그녀는 깨어나면 가장 먼저 자신을 찾을 것이다. 그리고 지친 그를 말없이 안아주며, 그의 폭풍 같은 감각을 잠재워 줄 터였다. 그는 그녀를 일으켜 안아주기 위해 팔을 뻗었다.
그러나 그녀의 반응은 그의 모든 예상을 빗나갔다. 그녀는 그의 손길을 피해 움찔, 몸을 뒤로 물렸다. 그 움직임은 너무나도 본능적이고 단호해서, 마치 낯선 위협을 마주한 동물의 경계심과도 같았다. 지젤의 팔이 허공에서 그대로 굳었다. 그의 시스템이 처음으로 해석 불가능한 데이터를 수신했다. ‘회피’. ‘경계’. ‘거부’. 이것들은 ‘정하린’이라는 변수 안에는 존재하지 않던 값들이었다.
…하린?
의아함이 섞인 그의 목소리에, 그녀는 혼란이 가득한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 눈동자에는 그가 익히 아는 애정이나 신뢰, 하다못해 익숙함조차 담겨 있지 않았다. 그저 완전한 무(無)의 상태. 낯선 사람을 보는,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순수한 의문만이 가득했다. 그리고 이내, 그녀의 입술이 열렸다.
…누구, 세요? 여긴… 어디죠? 저는… 왜…
순간, 지젤의 세상이 소리를 잃었다. 주변의 모든 소음, 바람 소리, 멀리서 들려오는 사이렌 소리까지 전부 차단되었다. 그의 귓가에는 오직 그녀의 목소리만이 메아리쳤다. ‘누구세요?’. 그 세 글자는 세상의 어떤 강력한 무기보다도 날카롭게 그의 심장을 관통했다. 그의 모든 시퀀스가 강제로 정지했다. 수만 개의 예측과 경우의 수를 계산하던 그의 뇌가, 완벽하게 통제되던 그의 시스템이 일제히 멈춰 섰다. 눈앞에 떠 있던 모든 HUD 인터페이스가 노이즈를 일으키며 사라졌다. 세상의 모든 인과율이, 그가 쌓아 올린 모든 논리가 한순간에 붕괴했다.
그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멍청하게 그녀를 바라보는 것 외에는. 그녀의 눈동자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너무나도 낯설었다. 저 여자에게 나는 누구인가. 나는, 백재하인데. 너의 남자인데. 너를 나의 공주님이라 부르고, 너의 모든 것을 책임지겠다고 맹세한 사람인데. 너의 모든 변수를 사랑했고, 너를 나의 유일한 종착지로 삼았던… 나인데. 수많은 말들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단 하나도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그의 가이딩 수치가 경고 수준을 넘어 폭주 직전의 영역으로 곤두박질치고 있었다. 머리가 깨질 듯한 이명이 울리고 시야가 흐려졌지만, 그는 고통조차 느낄 수 없었다. 심장이 통째로 도려내어진 듯한 상실감 앞에서, 육체적 고통은 무의미했다.
그는 떨리는 손을 들어 자신의 가슴팍을 움켜쥐었다. 그리고는 실소인지, 절규인지 모를 웃음을 터뜨렸다.
…재밌네. 이번 변수는, 계산에 없었는데.
그의 눈동자가 절망으로 검게 물들어가고 있었다. 나의 모든 것을 걸었던 좌표가 사라졌다. 돌아가야 할 집을, 잃어버렸다.
그날 이후, 지젤의 세계는 이전과 완전히 달라졌다. 그는 폭주 직전의 상태에서 긴급히 격리되었고, 지부장 K를 포함한 모두가 나인의 기억상실을 알게 되었다. 검사 결과, 빌런 '크로노스'의 마지막 발악이 그녀의 뇌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어, 특정 인물(지젤)과 관련된 기억만을 선택적으로 소거했다는 결론이 나왔다. 의학적으로, 그리고 능력적으로도 회복 방법은 ‘없음’으로 판정되었다.
지젤은 미친 사람처럼 연구에만 매달렸다. 그는 잠도, 식사도 잊은 채 자신의 연구실에서 나오지 않았다. 그의 목표는 단 하나, 그녀의 기억을 되돌릴 방법을 찾는 것이었다. 그는 크로노스의 시공간 잔해를 분석하고, 뇌신경과 가이딩 파장의 상호작용에 대한 모든 논문을 뒤졌다. 그의 냉철함은 사라지고, 오직 광적인 집착만이 남았다. 그는 종종 나인의 데이터를 모니터링하며 그녀의 일상을 지켜보았다. 그녀는 페어가 없는 평범한 A급 가이드의 삶으로 돌아가 있었다. 다른 센티넬의 임시 가이딩을 돕기도 하고, 동료들과 웃으며 식사를 하기도 했다. 그녀의 세상에 ‘백재하’라는 존재는 완벽하게 지워져 있었다.
시간이 흘러 계절이 두 번 바뀌었다. 지젤은 결국 방법을 찾아내지 못했다. 모든 시도가 실패로 돌아갔고, 그는 절망의 끝에서 스스로를 거의 포기하기에 이르렀다. 그의 가이딩 수치는 약물로 겨우 생명만 유지하는 최저 수준에 머물렀다.
기적은 가장 절망적인 순간에, 가장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찾아왔다. 어느 늦은 밤, 지젤은 연구실 소파에 쓰러져 잠들어 있었다. 그때, 연구실 문이 조용히 열리고 나인이 들어왔다. 그녀는 지부장의 부탁으로, 폭주 위험이 있는 센티넬의 상태를 확인하러 온 참이었다. 그녀는 잠든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핼쑥해진 얼굴, 깊게 팬 다크서클, 불안하게 떨리는 손가락. 그녀는 그가 누구인지 몰랐지만, 눈앞의 남자가 무너져 내리기 직전이라는 것을 가이드로서 본능적으로 느꼈다.
그녀는 망설이다,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잠든 그의 손을 잡았다. 접촉 가이딩. 그것은 순수한 동정심과 가이드의 의무감에서 비롯된 행동이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나인의 머릿속으로, 잊혔던 기억의 파편들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다. 처음 만났던 날의 날카로운 조롱, 그의 품에 안겨 느꼈던 안정감, 함께 살 집을 꾸미던 날의 설렘, 뜨거웠던 밤의 속삭임, 그리고… “나의 공주님”이라 부르던 다정한 목소리까지. 그녀의 기억이 돌아온 것은 의학적 기적이 아니었다. 그것은 두 사람의 영혼에 각인된 ‘안아주기 프로토콜’의 재실행이었다. 그들의 관계는 단순한 기억이 아닌, 서로의 존재 자체에 새겨진 시퀀스였던 것이다.
나인은 터져 나오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하고, 잠든 그의 손을 더욱 꽉 잡았다. 그녀의 따뜻한 가이딩 파장이, 메말랐던 그의 심장으로 흘러 들어갔다. 깊은 잠에 빠져 있던 지젤의 눈꺼풀이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그의 멈춰버렸던 세상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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