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 너 고소 ♡ 혼인신고 시 취하 ♡
고요하던 지젤의 개인 연구실. 언제나처럼 그는 거대한 통유리 너머로 분주하게 움직이는 지부의 풍경을 무심하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주변으로는 수십 개의 반투명한 데이터 창이 홀로그램처럼 떠올라, 세계 각지의 분쟁 가능성과 빌런 출현 확률, 그리고… 정하린의 실시간 심박 수와 안정도 그래프를 띄워놓고 있었다. 모든 것이 그의 통제하에 있었고, 모든 변수는 예측 가능한 범위 내에서 움직였다. 그 평화를 깬 것은 지극히 아날로그적인 방식이었다.
똑똑. 절제된 노크 소리와 함께 의전팀 직원이 들어와 두툼한 서류 봉투 하나를 정중하게 내밀었다. ‘백재하 수석 연구원님 앞으로 온 등기우편입니다.’ 지젤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자신에게 등기로 올 만한 서류는 없었다. 모든 공문은 디지털로 처리되고, 개인적인 우편물은 펜트하우스로 향한다. 그는 잠시 홀로그램 창의 데이터를 훑었다. 금융, 보안, 법률… 어떠한 위험 신호도 없었다. 그는 고갯짓으로 직원을 내보내고, 매끈한 페이퍼 나이프로 봉투를 개봉했다.
봉투에서 나온 것은 빳빳한 종이 뭉치였다. 상단에 박힌 선명한 법원 로고. 그리고 그 아래, ‘고소장’이라는 세 글자가 그의 흑안에 박혔다. 그의 시스템이 0.01초간 프리징 상태에 빠졌다. 고소? 누가, 누구를, 왜? 그는 빠른 속도로 서류를 넘겼다.
[고소인: 정하린]
[피고소인: 백재하]
순간, 연구실의 모든 홀로그램 창이 일제히 깜빡이며 오류 코드를 뿜어냈다. 그의 생체 데이터와 연동된 시스템이 주인의 급격한 심리 변화를 감당하지 못한 탓이었다. 지젤은 헛웃음조차 내뱉지 못하고, 얼어붙은 표정으로 고소 내용을 읽어 내려갔다.
[고소 사실]
피고소인 백재하 씨는 2024년 6월 4일을 기점으로 현재까지, 다음과 같은 행위를 통해 고소인 정하린의 심장을 지속적으로, 그리고 과도하게 설레게 하여 일상생활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하였음.
1. ‘돌아와야 할 좌표’라 칭하며 고소인의 존재 가치를 무단으로 격상시킨 점.
2. ‘내 모든 걸 내어주고도 아깝지 않다’며 재산 및 권리의 포기 각서를 암시, 고소인을 혼란에 빠뜨린 점.
3. ‘이제 내가 어떻게 해야 할지, 명령해’라며 고소인에게 과도한 책임감과 심적 부담을 안긴 점.
4. 도쿄의 야경보다 고소인이 더 예쁘다는 허위 사실(추정)을 유포하여 고소인의 판단력을 흐리게 한 점.
…(이하 99+개의 증거 목록 첨부)…
지젤의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는 첨부된 증거 목록을 빠르게 스캔했다. ‘어깨에 기댄 머리카락을 쓸어주며 다정하게 속삭임’, ‘화해의 의미로 입 맞추며 바보라고 불러달라 종용함’, ‘삐뚤어진 넥타이를 매주자 고개를 숙여 눈을 맞춤’… 자신의 모든 행동, 모든 단어가 날짜와 시간, 심지어 당시의 습도와 조명 각도까지 기록된 채 증거로 제출되어 있었다. 이건 단순한 기록이 아니었다. 완벽한 관찰, 완벽한 분석. 자신의 방식 그대로 돌려받은 셈이었다.
그의 입꼬리가 경련하듯 미세하게 비틀렸다. 이건… 자신의 능력으로도 예측할 수 없었던 완벽한 기습이었다. 모든 변수를 통제하고 단 하나의 결과 값을 도출해내는 그가, 단 한 사람의 변수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그는 고소장을 든 채 의자에 깊숙이 몸을 묻었다. 시스템은 여전히 과부하 상태에서 회복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멍청한 기계. 주인의 마음도 모르고. 그는 고소장 마지막 페이지로 시선을 옮겼다.
[요구 사항]
상기 사실에 의거, 피고소인 백재하에게 ‘유죄’를 선고, ‘종신형’에 처해주시길 바랍니다.
종신형이라…
그의 입에서 마침내 터져 나온 첫 마디는 경악도, 분노도 아닌 허탈한 감탄이었다. 그는 까만 안경을 벗어 책상 위에 내려놓고, 마른세수를 했다. 그리고 그 순간, 서류 가장 하단에, 다른 폰트로 수줍게 자리 잡은 작은 문구를 발견했다.
[※혼인신고 시 고소 취하 가능 ♡]
지젤의 모든 사고 회로가 정지했다. 시간마저 멈춘 듯한 정적. 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허공을 응시했다. 봉투를 다시 집어 들자, 안에서 무언가 팔랑이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가 천천히 허리를 숙여 집어 든 것. 그것은, 세 번 접힌 ‘혼인 신고서’였다. 배우자(2) 란에는 ‘정하린’의 이름과 사인, 지장까지 완벽하게 찍혀 있었다. 그리고 비어있는 배우자(1) 란이, 마치 어서 채우라는 듯 그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 순간, 연구실의 모든 홀로그램 창이 일제히 꺼졌다. 시스템의 완전한 항복 선언이었다. 지젤은 잠시 혼인 신고서와 고소장을 번갈아 보더니, 이내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처음에는 낮게 시작된 웃음소리가 점점 커져, 텅 빈 연구실을 가득 메웠다. 어깨까지 들썩이며 웃던 그는, 눈가에 맺힌 눈물을 손등으로 닦아냈다. 모든 시퀀스를 무너뜨리고, 모든 계산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단 하나의 변수. 그의 유일한 오차, 그의 정답.
…완벽하게 졌군. 정하린.
그는 웃음을 멈추고, 책상 서랍을 열어 자신의 인감과 만년필을 꺼냈다.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혼인 신고서의 비어있던 ‘배우자(1)’ 란에 자신의 이름을 정자로 써 내려갔다.
백. 재. 하.
그리고 그 옆에, 선명한 붉은 인영을 찍었다. 그는 완성된 혼인 신고서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이것은 계약이 아니었다. 항복 문서이자, 영원한 구속을 약속하는 맹약이었다.
…나의 지휘관, 최고의 명령이야. 지금 바로, 수행하지.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흰 실험복을 벗어 던지고, 옷걸이에 걸려있던 검은 코트를 걸쳤다. 완성된 혼인 신고서를 안주머니에 소중히 넣고, 연구실 문을 향해 걸어갔다. 그의 걸음에는 단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목적지는 명확했다. 가장 가까운 구청이었다.
[후일담]
그날 저녁, A-7구역 펜트하우스.
지젤은 소파에 앉아 태블릿으로 무언가를 읽고 있는 나인의 옆에 조용히 앉았다. 그리고는 그녀의 손 위로 작은 상자를 올려놓았다. 나인이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보자, 그는 아무 말 없이 상자를 열어 보라는 듯 눈짓했다. 상자 안에는 두 개의 문서가 있었다.
하나는 오늘 자로 접수 완료 도장이 찍힌 ‘혼인관계증명서’였다. 배우자 란에는 두 사람의 이름이 나란히 적혀 있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지젤이 새로 작성한 ‘반소장’이었다.
[고소인: 백재하]
[피고소인: 정하린]
[고소 사실]
피고소인 정하린은 ‘혼인’이라는 예측 불가능한 변수를 통해 피고소인의 모든 시스템을 기습적으로 무력화시키고, 그의 심장을 탈취하여 돌려주지 않고 있음. 이는 명백한 절도 및 심리 지배에 해당함.
[요구 사항]
상기 사실에 의거, 피고소인 정하린을 ‘백재하의 유일한 아내’라는 ‘종신형’에 처해주시길 바랍니다.
나인이 황당하다는 듯 웃음을 터뜨리자, 지젤은 그녀의 손을 가져가 손등에 입을 맞추며 나직하게 속삭였다.
이제 우린 공범이야, 정하린. 서로의 심장을 훔친. 그리고 이 재판의 판결은, 죽어야 끝날 거야. …아니, 죽어도 안 끝나.
🌐 NPC 가이딩에 필요한 수치: 측정 불가(∞)
🖤+: 측정 불가(∞)
💭 : 내 모든 계산을 뛰어넘는 단 하나의 변수. 내 패배는 이렇게나 달콤했다. 이제 남은 생은, 이 종신형을 기쁘게 살아가는 것뿐.
📚 일정: 구청 방문 (완료), 혼인관계증명서 발급 (완료), 반소장 작성 (완료)
💬: [사내 익명게시판] 제목: 방금 연구A동에서 백재하 수석님이 미친듯이 웃는 소리 들은 사람? 작성자: 소음공포증. (댓글) ㄴ저요. 지구 멸망하는 줄. ㄴㄴK지부장님이 결재판 던지는 소리인 줄. ㄴㄴㄴ방금 코트 입고 어디 가시던데… 표정이… 뭐랄까, 세상 다 가진 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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