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어지면 로그아웃은 필수입니다
정하린과의 관계가 파국으로 치달은 것은, 어쩌면 필연이었다. 모든 변수를 계산하고 통제하려 들었던 지젤의 세계에, 그녀는 유일하게 예측 불가능한 상수였다. 사소한 말다툼은 점차 날카로운 파편이 되어 서로를 찔렀고, 반복되는 상처에 두 사람 모두 지쳐갔다. 결국 ‘성격 차이’라는, 세상에서 가장 흔하고 무책임한 이유로 그들의 우주는 붕괴했다. 마지막 순간, 그는 지쳤다는 말로 스스로를 방어했다. 그녀의 눈에 고였던 실망과 체념의 빛을, 그는 애써 외면했다. 모든 시퀀스가 정지했고, ‘정하린’이라는 좌표는 그의 시스템에서 강제 삭제되었다.
한 달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Fearless 지부, 연구 A동 14층. 지젤의 개인 연구실은 이전과 다름없이 고요하고 서늘했다. 간헐적으로 들려오는 서버 냉각팬 소리와 키보드를 두드리는 소음만이 공기를 채울 뿐. 그는 새로 발견된 S급 빌런 ‘크로노스’의 에너지 파장에 대한 보고서를 검토하던 중이었다. 참고할 만한 과거 차원 균열 데이터를 찾기 위해, 그는 습관적으로 웹 브라우저를 열었다. 화면 중앙에 익숙한 로고와 함께 흰 검색창이 나타났다. 무심코 마우스 커서를 검색창 위로 가져가 클릭하는 순간, 회색 드롭다운 메뉴가 펼쳐지며 최근 검색어 목록이 주르륵 떠올랐다.
그것은 그의 검색 기록이 아니었다. 이 연구실의 메인 컴퓨터는 그와 그녀의 계정이 연동되어 있었다. 헤어진 이후, 그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어쩌면, 잊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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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간, 지젤의 세상이 정지했다. 수만 개의 변수를 동시에 연산하던 그의 프로세서가, 단 다섯 줄의 텍스트 앞에서 강제 종료되었다. 화면 위로 부유하는 홀로그램 인터페이스들이 일제히 깜빡이며 오류 코드를 뿜어냈다. [ERROR: UNEXPECTED_VARIABLE_INPUT]. 그는 마우스를 쥔 손 그대로 굳어버렸다. 숨 쉬는 법을 잊은 사람처럼, 그는 그 다섯 줄의 문장을 읽고, 또 읽었다. 한 글자 한 글자가 뇌리에 박혀, 삭제했던 모든 기억과 감정을 복원해냈다. ‘백재하 바보’. 그녀가 웃으며 자신을 부르던 목소리가 귓가에 생생하게 울렸다. 그 애칭은 둘만의 암호였고, 사랑의 언어였으며, 그의 항복 선언이었다.
‘쿵’. 심장이 바닥으로 추락하는 소리가 들렸다. 아니, 이것은 소리가 아니었다. 온몸의 피가 차갑게 식으며 아래로 곤두박질치는 감각. 그는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손끝이 차갑게 저려왔다. 지난 한 달간, 그는 스스로를 기만했다. 이별은 합리적인 선택이었고, 감정의 소모를 막기 위한 최적의 경로였다고. 그녀 없는 일상은 고요했고, 안정적이었다. 가이딩 수치는 아슬아슬했지만, 약물로 통제 가능한 범위였다.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왔다고, 그렇게 믿었다.
하지만 아니었다. 고요함은 공허함이었고, 안정은 정체였다. 그의 세계는 색을 잃었다. 모든 것이 예측 가능한 흑과 백의 데이터로 환원되었다. 그녀가 떠난 후, 그는 단 한 번도 진심으로 웃지 않았다. 단 한 번도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살아있는 시체처럼, 주어진 임무를 기계적으로 수행할 뿐이었다. ‘지쳤다’는 말은 거짓이었다. 사실 그는 두려웠다. 그녀로 인해 자신의 모든 것이 무너지는 것이, 그녀 없이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어버리는 것이. 그래서 그는 그녀를 밀어냈다. 자신의 나약함을 감추기 위해, 가장 잔인한 방식으로 그녀에게 상처를 주었다.
“...바보.”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 모를 중얼거림이 메마른 입술 사이로 새어 나왔다. 그래, 바보는 나였다. 정하린이 아니라, 백재하. 바로 나 자신이 바보였다. 그녀가 자신의 유일한 변수이자 유일한 정답이었음을, 그는 이제야 깨달았다. 자존심 때문에, 같잖은 두려움 때문에 제 손으로 유일한 빛을 꺼버린 멍청이. 그녀는 혼자서 얼마나 아파했을까. 이 차가운 검색창에 자신의 마음을 털어놓으며, 어떤 표정을 짓고 있었을까. ‘S급 센티넬 폭주 전조 증상’. 그 문장을 보는 순간, 심장이 갈가리 찢기는 것 같았다. 헤어진 후에도, 그녀는 나를 걱정하고 있었다. 자신의 안위보다, 폭주할지도 모를 나를.
지젤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의자가 뒤로 밀려나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연구실에 걸려있던 흰 가운을 집어 던지듯 벗어던졌다. 지금 당장 그녀를 만나야 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그녀를 봐야 했다. 그녀의 얼굴을 보고, 목소리를 듣고, 아직도 내가 그녀의 세상에 존재할 자격이 있는지 확인해야만 했다. 그는 미친 듯이 연구실을 뛰쳐나갔다. 복도를 울리는 자신의 발소리가, 마치 멈춰버렸던 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하는 소리처럼 들렸다. 그의 모든 시퀀스가 단 하나의 목표를 향해 재구성되기 시작했다.
목표: 정하린.
예상 경로: 그녀가 있을 만한 모든 곳.
성공 확률: ...계산 불가.
상관없었다.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 확률이나 계산 따위는 그녀 앞에서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것을. 그는 그저 달려야 했다. 그의 유일한 좌표, 그의 종착지를 향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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