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러와요 동물의 숲
어느 날이었다. 나인은 게임기 하나를 사 들고 왔다. 작고 네모난 기계는 금세 거실의 가장 큰 TV 화면과 연결되었고, 그날 이후 집의 풍경은 조금 달라졌다. 쉬는 시간이든, 임무 후의 짧은 여유든, 나인은 소파에 앉아 컨트롤러를 쥔 채 화면 속 세상에 몰두했다. '동물의 숲'이라는 이름의 게임이었다.
지젤은 소파 한쪽 끝에 비스듬히 기대앉아, 게임에 온 정신을 빼앗긴 나인과 그 너머의 화면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픽셀로 이루어진 동물 주민들 사이를 아기자기하게 돌아다니는 나인의 캐릭터, 과일을 따고, 낚시를 하고, 가구를 만드는 그 모든 과정. 그의 연산 능력으로는 단 몇 초 만에 모든 최적의 루트를 계산해낼 수 있는 비효율적인 활동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작은 성공 하나에 아이처럼 기뻐하고, 예상치 못한 이벤트에 작게 놀라는 나인의 모든 표정 변화를 자신의 시스템에 조용히 저장했다. 그것은 그 어떤 복잡한 전술 시뮬레이션보다 흥미로운 데이터였다.
그날 밤, 지젤은 꿈을 꾸었다. 그의 꿈은 언제나처럼 흑백의 데이터 스트림이나 무수한 시뮬레이션의 향연이었지만, 오늘만큼은 달랐다. 눈을 떴을 때, 그의 앞에는 선명한 총천연색의 세상이 펼쳐져 있었다. 둥글게 말린 지평선, 발밑에서 느껴지는 뽀득한 잔디의 감촉, 그리고 나뭇잎이 바람에 스치는 기분 좋은 소리. 명백히 비논리적이고, 비현실적인, 바로 나인이 몰두하던 게임 속 세상이었다.
그리고 그는 더 이상 백재하가 아니었다. 시야 아래로 내려다본 자신의 손은 부드러운 검은 털로 뒤덮인, 날카로운 발톱이 숨겨진 고양이의 손이었다. 까만 셔츠와 안경, 단정한 바지는 그대로였지만, 그는 분명 짙은 흑색 털을 가진, 날카로운 눈매의 고양이 주민이 되어 있었다. 그의 머릿속에선 자신의 정보값이 저절로 떠올랐다.
[주민 정보]
이름: 재하
종족: 고양이 (흑색)
성격: 느끼함
말버릇: …훗.
‘느끼함’이라. 지젤, 아니, 재하는 어처구니없는 설정값에 잠시 미간을 찌푸렸지만, 이내 평정을 되찾았다. 이 또한 분석해야 할 하나의 변수일 뿐. 그는 고개를 들어 주변을 살폈다. 그리고 곧, 강가에서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는 익숙한 뒷모습을 발견했다.
역시나, 그녀 또한 주민이 되어 있었다. 검은색 긴 생머리 대신 동그랗고 까만 고양이 귀가 쫑긋 솟아있었고, 심플한 검정 원피스를 입은 채 낚시에 열중하는 모습은 영락없는 나인이었다.
[주민 정보]
이름: 하린
종족: 고양이 (흑색)
성격: 친절함
말버릇: …그치.
재하가 그녀에게 다가가자, 하린은 찌의 움직임에 집중하다가 인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동그랗게 뜬 눈이 재하를 발견하고는 반가움에 활짝 휘어졌다.
어머, 재하 왔구나! 마침 강에 물고기가 많아 보여서 저녁거리를 낚고 있었어, 그치.
그녀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한 톤 높고 부드러웠다. 재하는 이 비현실적인 상황 속에서도 저절로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을 느꼈다. 그는 하린의 곁에 나란히 서서 잔잔하게 흐르는 강물을 내려다보았다.
물고기 따위, 내가 마음만 먹으면 강의 모든 걸 다 잡아줄 수도 있는데. …훗.
의도와 다른 느끼한 말투와 말버릇이 튀어나왔다. 재하는 속으로 잠시 이마를 짚었지만, 하린은 그저 해맑게 웃을 뿐이었다.
후훗, 말이라도 고마워. 그래도 이건 내가 직접 잡고 싶은걸. 재하도 같이 할래? 낚싯대 빌려줄 수 있어, 그치.
하린은 옆에 놓여있던 여분의 낚싯대를 건넸다. 재하는 말없이 낚싯대를 받아들고 그녀의 옆에 앉아 낚싯줄을 던졌다. 모든 것을 예측하고 결과를 도출하던 그의 능력은 이곳에선 아무 쓸모가 없었다. 언제 물고기가 물지, 어떤 종류의 물고기가 잡힐지, 그 모든 것이 미지수였다. 그는 오직 찌의 움직임만을 응시할 뿐이었다. 지루하고 비효율적인 기다림의 시간. 하지만 이상하게도, 전혀 나쁘지 않았다.
한참의 시간이 흘렀을까, 하린의 낚싯대가 세차게 휘었다. 앗! 하는 소리와 함께 하린이 재빨리 낚싯대를 잡아채자, 커다란 농어 한 마리가 물보라를 일으키며 뭍으로 끌려 나왔다. 하린은 펄떡이는 물고기를 보며 아이처럼 기뻐했다.
와! 엄청 큰 농어야! 오늘 저녁은 이걸로 맛있는 생선 스테이크를 해야겠다! 재하는 아직이야, 그치?
재하는 자신의 미동도 없는 찌를 한번, 그리고 환하게 웃는 하린을 한번 쳐다보았다. 그는 피식 웃으며 낚싯대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어.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하린의 앞에 섰다. 그리고는 몸을 숙여, 농어를 잡느라 흙이 살짝 묻은 그녀의 둥근 고양이 손을 조심스럽게 잡아 올렸다. 그리곤 그 손등에 자신의 입술을 가볍게 가져다 댔다.
네가 이렇게 웃는 모습을 보는 게, 이 섬의 모든 물고기를 잡는 것보다 훨씬 가치 있는 일이니까. …훗.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튀어나오는 느끼한 대사였지만, 그 안에 담긴 진심만은 진짜였다. 하린은 잠시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이내 부끄러운 듯 고개를 살짝 숙이며 웃었다. 그녀의 뺨이 석양처럼 붉게 물들어가는 모습을, 재하는 자신의 새로운 시야에 영원히 각인했다. 총천연색의, 완벽하게 비논리적이고, 지극히 사랑스러운 데이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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