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혼전 순결이야···.
창밖으로 노을이 짙게 깔리고 있었다. 100일 기념으로 예약한 레스토랑의 근사한 저녁 식사,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은은하게 이어지던 대화, 그리고 지금, 거실을 부드럽게 채우는 낮은 조도의 조명과 잔잔한 재즈 선율까지. 백재하가 설계한 모든 시퀀스는 완벽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그의 계산대로라면, 소파에 나란히 앉은 두 사람의 입술이 자연스럽게 포개지고, 분위기는 한 단계 더 깊어져야 했다. 모든 변수는 통제되었고, 성공 확률은 98.7%에 수렴했다.
그는 와인 잔을 내려놓고 정하린의 손을 부드럽게 감쌌다. 그녀의 눈을 지그시 바라보며, 가장 이상적인 각도와 타이밍을 계산해 몸을 기울였다. 그의 입술이 닿기 직전, 바로 그 찰나였다.
··· 재하 씨.
그녀가 조용히 그의 이름을 불렀다. 백재하의 움직임이 멈칫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조금 더 무거웠고, 시선은 흔들림 없이 진지했다. 예상치 못한 변수였다.
저, 할 말이 있어요.
그는 몸을 바로 하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의 머릿속에서 수십 개의 시뮬레이션이 빠르게 돌아갔다. ‘무슨 말이지? 분위기가 마음에 안 들었나? 아니면 내가 너무 서둘렀나?’ 하지만 그녀의 다음 말은 그 모든 예측을 산산조각 냈다.
저는… 결혼하기 전까지는, 관계를 가질 생각이 없어요.
순간, 백재하의 사고 회로가 정지했다. ‘혼전순결’. 21세기에, 그것도 자신의 연인에게서 듣게 될 거라고는 단 한 번도 가정해 본 적 없는 단어였다. 그의 뇌가 그 단어의 의미를 처리하는 동안, 과거의 데이터들이 퍼즐 조각처럼 맞춰지기 시작했다. 늦은 밤, 집 앞에 데려다주었을 때 가벼운 포옹에서 슬쩍 몸을 빼던 그녀의 미세한 움직임. 영화관 어둠 속에서 손을 잡는 것 이상의 스킨십을 시도하면 어색한 웃음으로 화제를 돌리던 순간들. 그의 무릎을 베고 눕는 것은 좋아하면서도, 그가 허리를 감싸 안으면 아주 잠깐 몸이 굳었던 반응들. 모든 것이 ‘회피’가 아닌 ‘경계’였음을, 백재하는 비로소 깨달았다. 그것들은 무의미한 노이즈가 아니라, 일관된 패턴을 가진 유의미한 데이터였다.
그의 입가에서 늘 떠나지 않던 능글맞은 미소가 희미하게 굳었다. 그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그저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놀라움, 당혹감, 그리고 자신의 완벽한 계산이 틀어젔다는 사실에 대한 기묘한 패배감이 뒤섞였다.
…아.
그의 입에서 나온 것은 고작 감탄사 하나였다. 그는 시선을 내려 깍지 낀 두 사람의 손을 바라보았다. 그는 화가 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흥미로웠다. 자신의 모든 분석을 뛰어넘는 예측 불가능한 변수. 그는 다시 고개를 들어 정하린을 보았다. 그녀는 긴장한 듯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고 있었다.
그래서 그랬구나.
그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그는 깍지 낀 손에 힘을 주어 그녀의 손을 더 꽉 잡았다.
왜 진작 말 안 했어. 그럼 내가 쓸데없는 계산은 안 했을 텐데.
말은 퉁명스러웠지만, 그 안에는 책망이 아닌 안도감이 섞여 있었다. 자신이 싫어서가 아니었다는 사실, 그 하나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는 피식 웃으며 반대편 손으로 그녀의 뺨을 부드럽게 감쌌다.
그럼 이것도 안 되나?
그리고는 그녀의 입술에, 아주 가볍고 짧게 입을 맞추고 떨어졌다. 관계가 아닌, 순수한 애정이 담긴 입맞춤이었다.
이 정도는 허용 범위야? 새로운 변수가 생겼으니, 기준 데이터부터 다시 수집해야겠네, 정하린 씨.
그의 눈이 장난스럽게 빛났다. 그는 그녀를 ‘정복’하거나 ‘설득’할 생각이 없었다. 대신, 그는 이 새로운 규칙 안에서 어떻게 그녀를 사랑할 수 있는지, 그 새로운 게임의 룰을 파악하기 시작했다. 그것이 백재하가 사랑하는 방식이었다.
[후일담]
그날 이후, 백재하의 모든 연애 시뮬레이션은 ‘정하린 전용 혼전순결 프로토콜’을 기반으로 재설계되었다. 그는 더 이상 무드를 잡으며 은근하게 그녀를 침실로 이끌려 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손을 잡고, 포옹하고, 가벼운 입맞춤을 나누는 모든 순간에 이전보다 훨씬 더 집중했다. 그녀가 허락한 유일한 스킨십의 가치를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전략을 수정한 것이다.
어느 주말 오후, 두 사람은 소파에 누워 영화를 보고 있었다. 정하린은 자연스럽게 그의 팔을 베고 누웠고, 백재하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어주었다. 영화의 남녀 주인공이 격렬하게 키스하는 장면이 나오자, 정하린은 문득 미안한 마음이 들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 재하 씨. 나 때문에… 힘들지 않아요?
백재하는 스크린에서 그녀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그는 잠시 생각에 잠긴 듯 천장을 보다가, 이내 피식 웃으며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힘들지. 당연히. 나는 건강한 성인 남성이거든. 매일 밤마다 네 생각 하면서 샤워해.
그의 솔직하고 직설적인 대답에 정하린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그녀가 당황해서 무어라 말하려 하자, 그가 그녀의 입술 위에 검지를 가만히 가져다 댔다.
그런데, 정하린. 그거 알아? 어려운 문제를 풀 때 더 희열을 느끼는 타입이 있다는 거.
그는 그녀의 귓가에 나직이 속삭였다.
네가 세운 그 벽, 나보고 넘지 말라고 경고하는 거잖아. 좋아. 안 넘을게. 대신…
그의 입꼬리가 비스듬히 올라갔다.
난 그 벽을 부수거나 넘는 대신, 네가 스스로 문을 열고 나올 때까지 기다릴 거야. 그리고 네가 문을 열었을 때, 가장 먼저 보이는 사람이 나였으면 좋겠어. 그 정도의 인내심과 자신감은 있거든, 내가. 그러니까 쓸데없는 생각하지 마. 시간낭비야.
그는 그렇게 말하며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정하린은 그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벽을 세운 것은 자신이었지만, 어느새 그 벽 너머에서 자신을 기다리는 그의 존재가 세상 그 무엇보다 큰 안정감을 주고 있음을, 그녀는 깨닫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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