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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iselle X Nine/OOC BACK-UP

가이드가 혼전순결?

첫 공동 임무가 성공적으로 끝난 밤. 지젤의 연구실은 희미한 보조등 불빛만이 바닥을 비추고 있었다. 창밖은 이미 완연한 어둠에 잠겼고, 공기 중에는 임무의 여파로 남은 먼지와 오존 냄새, 그리고 그의 불안정한 에너지 파장이 뒤섞여 팽팽한 긴장감을 자아냈다. 모르페우스와의 전투는 그의 모든 예비 전력을 소진시켰다. 눈앞의 HUD 인터페이스는 붉은 경고 메시지를 쉴 새 없이 띄우고 있었고, 귓가에는 세상의 모든 소음이 증폭되어 뇌수를 긁는 듯했다. 그는 벽에 등을 기댄 채,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안정제는 이미 내성이 생겨 무의미했다.

그런 그의 앞에, 그의 유일한 변수이자 해결책인 나인이 서 있었다. 지친 기색이 역력했지만, 그녀는 단 한순간도 그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녀는 망설임 없이 다가와 그의 손을 잡았다. 그 순간, 지독한 소음으로 가득했던 그의 세계에 아주 잠시, 찰나의 정적이 흘렀다. 그녀의 에너지가 그림자를 타고 그의 몸으로 스며들며 급류처럼 날뛰던 파장을 미약하게나마 다독였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부족했다. 더 깊고, 완전한 접촉. 모든 감각을 그녀에게 종속시켜야만 이 지옥 같은 과부하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지젤은 거의 본능적으로 나인의 허리를 감아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서로의 숨결이 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 그는 고개를 숙여 그녀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으려 했다. 가장 효율적이고 빠른 가이딩 경로였다. 그러나 그의 움직임이 완성되기 직전, 나인이 그의 가슴을 밀어내며 작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잠깐만요, 백재하 씨.”
그의 모든 시퀀스가 순간 정지했다. 거부. 예측 범위 밖의 변수였다. 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고 있었지만, 시선만은 피하지 않고 그를 똑바로 마주 보고 있었다.

“접촉 가이딩은 할게요. 필요한 만큼. 하지만… 그 이상은 안 돼요.”
지젤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 이상’이라는 불분명한 단어의 정의를 요구하려던 찰나, 그녀가 결정적인 말을 덧붙였다.

“저, 혼전순결이에요.”
정적. 연구실의 모든 소음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아니, 사라진 것이 아니었다. 그의 머릿속에서 폭발하는 의문과 당혹감이 외부의 모든 감각을 차단해버린 것이다. ‘혼전순결’. 그의 데이터베이스에 존재하지 않는 개념은 아니었으나, 센티넬과 가이드의 관계, 특히 생존이 걸린 가이딩의 영역에서 마주하리라고는 단 한 번도 시뮬레이션해본 적 없는 단어였다.

그 순간, 과거의 로그 파일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갔다. 분명 페어로 지정된 이후, 미묘한 접촉의 순간들은 여러 번 있었다. 그가 짓궂게 손목을 잡았을 때, 그녀는 언제나 자연스럽게 팔을 빼내 거리를 벌렸다. 그가 어깨를 감싸 안으려 하면, 그녀는 뒷짐을 지는 자세로 바꿔 그의 손길을 무효화했다. 지부 복도를 걷다가 스치기라도 하면, 그녀의 몸은 눈에 띄지 않을 만큼 움츠러들었다. 그는 그것이 낯가림이나 경계심의 발현이라 분석했다. A급 가이드다운 적절한 자기 방어 기제, 혹은 S급 센티넬인 자신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 수백 가지 가설 속에서, ‘신념’이라는 변수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의 입가에서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폭주 직전의 센티넬 앞에서, 목숨을 담보로 한 가이딩을 앞두고 내뱉은 말이 ‘혼전순결’이라니. 이 얼마나 비논리적이고, 비효율적이며, 감정적인가. 그의 모든 연산 회로가 그녀의 신념이라는 예측 불가능한 암초에 부딪혀 산산조각 나는 기분이었다. 분노와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당장 그녀를 눕혀서, 가이딩의 효율성과 생존의 논리를 몸으로 가르쳐주고 싶은 충동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이성은 그것이 최악의 선택지라고 경고했지만, 들끓는 감각은 논리를 비웃었다.

하지만 그는 나인을 몰아세우는 대신, 벽에서 등을 떼고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는 자신의 손에 끼워진 가죽 장갑을 신경질적으로 내려다보았다. 그녀를 향한 소유욕과, 그녀의 신념을 존중해야 한다는 생경한 감정이 그의 내부에서 충돌하며 일으키는 스파크가 고통스러웠다. 그는 턱을 치켜들고, 평소의 능글맞음이 완전히 사라진 서늘한 눈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정하린 씨.”
그의 목소리는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지금 나랑 장난하나? 지금 내 상태, 안 보여? 이건 생존의 문제야. 당신의 개인적인 신념 따위가 개입할 여지가 없는, 지극히 실용적인 의료 행위라고. 당신, 가이드의 의무를 방기할 셈이야?”
그의 말은 날카로운 칼날이 되어 그녀의 심장을 겨눴다. 일부러 가장 아픈 곳을 찔렀다. 그녀의 책임감과 의무감을 자극해, 스스로 그 ‘어리석은’ 신념을 꺾게 만들 심산이었다. 그는 그녀가 무너지거나, 혹은 울음을 터뜨리며 그에게 매달릴 것이라 예측했다. 그러나 그녀는 흔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더 단단한 눈빛으로 그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의무는 방기하지 않아요. 필요한 만큼 가이딩 할 거예요. 손을 잡고, 안아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안정시킬 수 있어요, 저는. 백재하 씨가 조금만 더, 저를 믿고 참아준다면요. 결혼도 하지 않은 상대와 몸을 섞는 건 제 방식이 아니에요. 그게 설령 페어 상대라 해도.”
‘참아준다면.’ 그 한마디가 지젤의 폭주 직전 의식을 붙잡았다. 신뢰. 그녀는 지금 이 비상식적인 상황 속에서, 그에게 ‘신뢰’를 요구하고 있었다. 그의 모든 시스템이 그녀를 굴복시키라고 아우성쳤지만, 그녀의 눈동자에 담긴 강직한 믿음이 그 모든 소음을 억지로 짓눌렀다. 지젤은 입술을 짓씹었다. 그의 세계는 지금 그녀의 손에 달려 있었고, 그녀는 그 세계의 규칙을 새로 쓰고 있었다.

그는 결국 마른세수를 하며 고개를 숙였다. 붉은 경고등이 시야를 어지럽혔지만, 그는 애써 무시했다. 그는 다시 고개를 들어 그녀를 보았다. 분노와 짜증은 어느새 깊은 곳으로 가라앉았고, 그 자리에는 이제껏 느껴본 적 없는 종류의 흥미와 기묘한 패배감이 떠올랐다. 그의 모든 시뮬레이션을 비웃고, 자신만의 논리로 그의 세계에 균열을 낸 여자. 그는 한쪽 입꼬리를 비스듬히 올렸다.

“…재밌네.”
그는 손을 내밀었다. 더 깊은 접촉을 요구하는 손이 아니었다. 그녀의 방식을 따르겠다는, 항복과도 같은 신호였다.

“해 봐, 그럼. 당신 방식대로. 어디까지 버틸 수 있는지, 나도 궁금하니까.”
---
후일담
그날 이후, 지젤과 나인의 가이딩은 기묘한 줄다리기 양상을 띠게 되었다. 지젤은 임무가 끝나면 의도적으로 가이딩 수치를 폭주 직전까지 방치하며 그녀를 시험했다. 그는 그녀가 스스로의 한계에 부딪혀 ‘혼전순결’이라는 신념을 포기하고 제게 매달리길 바랐다. 하지만 나인은 단 한 번도 무너지지 않았다. 그녀는 밤새 그의 곁을 지키며 손을 잡고, 그를 끌어안고, 자신의 그림자를 이용해 그의 고통을 덜어주었다. 때로는 지쳐 쓰러질 것 같으면서도, 그녀는 결코 선을 넘지 않았다.

오히려 그 과정에서 무너진 것은 지젤이었다. 그는 점차 그녀의 손길과 포옹만으로도 안정감을 찾는 법을 배우게 되었다. 이전에는 그저 효율 낮은 수단이라 치부했던 가벼운 접촉들이, 이제는 그 어떤 깊은 스킨십보다 더 강력한 위안이 되었다. 그는 그녀의 신념을 존중하게 되었고, 그 신념을 지키기 위해 애쓰는 그녀의 모습에 점차 마음을 빼앗겼다. 그는 깨달았다. 자신이 원했던 것은 단순한 가이딩을 통한 안정이나 쾌락이 아니었다는 것을. 그가 진정으로 원했던 것은, 자신의 모든 것을 통제하려는 이 오만한 S급 센티넬이, 오직 그녀의 규칙 안에서만 구원받을 수 있다는 사실 그 자체였다.

어느 날, 지젤은 평소처럼 그녀의 무릎을 베고 누워 가이딩을 받다가 불쑥 물었다.

“그럼, 나랑 결혼하면… 그 이상도 해 주는 건가?”
나인은 잠시 놀란 듯 그를 내려다보다가, 이내 작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해 볼게요.”
지젤은 그녀의 대답에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그의 인생에서 가장 풀기 어려운, 그러나 가장 흥미로운 변수. 그는 생각했다. 어쩌면 그는 그녀의 신념을 꺾으려던 게 아니라, 그 신념의 유일한 예외가 되고 싶었던 것뿐인지도 모른다고. 그리고 그 ‘결혼’이라는 변수를 현실로 만들기 위한, 새로운 시뮬레이션을 조용히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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