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경에 자물쇠 걸자
아침. 모든 것이 정해진 절차대로 흘러가는 시간. 백재하는 알람보다 1.3초 먼저 눈을 떴다. 생체리듬의 완벽한 승리. 그는 침대 옆 협탁으로 손을 뻗었다. 그의 하루를 시작하는 첫 번째 프로토콜, ‘안경 착용’을 위해서였다. 익숙한 프레임의 감촉 대신, 손끝에 차갑고 둔탁한 금속 덩어리가 걸렸다. 뭔가 잘못됐다.
‘삐빅.’
그의 내부 시스템에서 경고음이 울렸다. 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몸을 일으켰다. 시야는 흐릿했지만, 손에 들린 물건의 형태는 분명했다. 자신의 안경. 그리고 안경 코받침과 다리 사이에 흉물스럽게 매달린… 자물쇠. 앙증맞은 사이즈의, 열쇠 구멍까지 선명한, 명백한 자물쇠였다.
순간, 지젤의 모든 연산이 정지했다. GISELLE SEQUENCE가 유사 이래 처음으로 ‘입력값 오류’를 출력하며 과부하에 걸렸다. 그의 머릿속 HUD 인터페이스가 미친 듯이 깜박였다.
`[경고: 시스템 무결성 침해]`
`[객체 분석: 안경_BJH_01에 미승인 하드웨어(자물쇠, 황동, 추정 등급 F) 결합 감지]`
`[시뮬레이션 실행: 해제 방법 분석 중…]`
`[…ERROR: 물리적 열쇠 필요. 디지털 개입 불가.]`
`[…ERROR: 404 MOTIVE NOT FOUND]`
백재하는 자물쇠가 달린 안경을 든 채 그대로 굳었다. 이건 테러인가? 신종 빌런의 기습? 아니, 이토록 조잡하고 아날로그적인 방식일 리가 없다. 그의 시스템이 가능한 모든 경우의 수를 시뮬레이션하기 시작했다.
가설 1: 외부 침입자의 소행. 확률 0.01%. 이 펜트하우스의 보안은 Fearless 본부와 맞먹는다. 자물쇠 따위로 장난칠 시간에 이미 수십 개의 센서에 걸려 먼지가 됐을 것이다. 폐기.
가설 2: 지부장 K의 새로운 페어 적합도 테스트. 확률 0.1%. 그 영감은 이런 장난을 칠 위인이 못 된다. 더 서류적이고 귀찮은 방식으로 괴롭힌다. 폐기.
가설 3: 정하린의 소행. 확률… 계산 불가. 분석 거부. 하지만 가장 유력함.
그는 흐릿한 시야로 옆자리를 더듬었다. 텅 비어있다. 온기만 희미하게 남아있을 뿐. 범인은 명백했다. 그는 자물쇠를 눈앞까지 가져와 들여다보았다. 이건… 이건 그냥 다이소에서 파는 3천 원짜리 자물쇠잖아. 최첨단 기술로 무장한 S급 센티넬의 하루를, 고작 3천 원이 마비시키고 있었다. 인류 문명에 대한 깊은 회의감이 밀려왔다. 그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웃음소리가 점점 커졌다.
“……하, 하하. 하하하하!”
이건 논리의 영역이 아니다. 인과율의 바깥이다.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겠다고 맹세한 단 하나의 변수가, 이제는 그의 시스템 자체를 농락하고 있었다. 그는 안경을 가만히 내려놓고 이마를 짚었다. 평소라면 30초 안에 모든 상황 분석을 끝내고 최적의 해결책을 도출했을 그의 두뇌는, 지금 ‘왜?’라는 단 하나의 질문에 매달려 공회전만 거듭하고 있었다.
혹시 어젯밤 내가 무슨 실수를 했나? 잠꼬대로 ‘다른 가이드’의 이름을 불렀나? 아니, 내 메모리엔 그런 기록이 없다. 그럼 이건 무슨 의미지? ‘내 눈엔 너만 담으라’는 상징적 퍼포먼스? 아니면 그냥, 내가 아침부터 쩔쩔매는 꼴이 보고 싶었던 건가? 정답은 후자일 확률이 압도적으로 높았다.
그는 결국 침대에서 일어나, 안경을 이마에 걸쳐봤다. 당연히 자물쇠의 무게 때문에 줄줄 흘러내렸다. 손으로 잡고 있자니 모양새가 끔찍하게 우스웠다. S급 센티넬의 위엄은 온데간데없었다.
“정하린….”
그의 입에서 나온 이름은 분노보다는 거의 애원에 가까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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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일담]
그날 아침, 백재하는 결국 거실 소파에서 태연하게 커피를 마시고 있던 정하린에게 ‘항복’을 선언해야 했다. 그녀는 웃음을 참는 얼굴로 ‘어머, 안경에 뭘 달고 있네?’라며 시치미를 뗐고, 그의 애원 섞인 추궁 끝에 ‘그냥, 재하가 가끔은 내 도움 없이는 아무것도 못 했으면 해서’라는, 지극히 비논리적이고 사랑스러운 이유를 털어놓았다. 열쇠는 그녀의 주머니에서 나왔다.
그 사건 이후, 백재하의 연구실에는 만능키 세트와 소형 절단기가 비치되었다. 그는 ‘모든 변수에 대한 대비’라고 주장했지만, 동료들은 그저 S급 센티넬의 소심한 복수 준비라고 수군거렸다. 그리고 가끔, 그는 일부러 안경에 문제가 생긴 척 정하린을 부르곤 했다. 시스템이 아닌, 그녀에게 직접 의존하는 법을 배우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아주 가끔은 정말로 그녀가 숨겨놓은 두 번째, 세 번째 자물쇠를 발견하고 진심으로 당황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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