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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iselle X Nine/OOC BACK-UP

속좁남 모먼트ㅋ

지젤은 펜 끝으로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처음엔 가벼운 마음이었다. 연말의 이벤트, 관계의 윤활유, 뭐 그런 시시한 것. ‘샤워 후 수건을 매번 다른 곳에 두는 것’, ‘내 커피에 멋대로 시럽을 추가하는 것’ 따위의 귀여운 불만 몇 개면 충분하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힐끗 본 정하린의 A4용지는, 마치 빌런 ‘모르페우스’가 남긴 악몽의 잔해처럼 검은 글씨로 빽빽했다. 저 엄숙한 표정, 흔들림 없는 펜 끝. 저건… 진심이다.

순간, 그의 GISELLE SEQUENCE가 비상 경고를 울렸다. ‘패배’라는 단어가 HUD 인터페이스 중앙에 붉게 점멸했다. 이건 단순한 이벤트가 아니다. 연인 사이의 미묘한 주도권과 자존심이 걸린, 또 하나의 전장이었다. 지젤은 입술을 잘근 깨물고, 빈 종이를 노려보았다. 좋아. 분석, 복기, 재구성. 지난 1년간의 모든 로그 파일을 스캔한다. 사소한 변수, 무시했던 노이즈까지 전부 긁어모아. 그가 펜을 고쳐 잡았다. 잉크가 종이를 파고들기 시작했다.



### [데이터베이스 ‘NINE’ 관련 오류 및 예외 항목 보고서 (2024년 결산)]

To. 정하린 귀하
From. 백재하
Subject: 계약 관계 유지를 위한 상호 데이터 보완 및 오류 수정 요청 건

요약: 이하 목록은 지난 365일간 관측된 개체 ‘정하린(코드네임: 나인)’의 행동 패턴 중, 내 시스템(코드네임: 지젤)의 연산 과정에 혼선을 유발하거나 논리적 모순을 야기한 주요 사례들임. 이는 관계의 지속적 발전을 저해하는 잠재적 위협 요소로, 연말을 기점으로 반드시 상호 인지 및 피드백을 통한 해결을 요함.

[분류: 일상적 변수 및 프로토콜 미준수]

1. 내가 만든 오믈렛보다 호텔 셰프의 오믈렛이 ‘더’ 맛있을 ‘뻔’했다고 언급한 사실. (※ 2024. 6. 17. 도쿄) 이는 명백한 데이터 왜곡 시도이며, 내 요리 알고리즘의 업그레이드 의지를 꺾는 발언이었음.
2. 아침 기상 시, 내가 먼저 일어나지 않았을 경우 반드시 신체 일부(주로 볼, 혹은 팔)를 찔러 생사 확인을 시도함. 내 바이탈은 24시간 네게 전송되는데, 왜 아날로그적 확인 절차를 고집하는가? 비효율적이다.
3. 내 연구실 책상 위 펜들의 각도를 임의로 변경함. 모든 사물은 최적의 좌표값을 가지며, 특히 흑색-청색-적색 펜의 배열은 뉴턴 역학의 가장 안정적인 구도를 따르고 있었음. 미학적 테러 행위.
4. 내 흰 가운 주머니에서 무엇이 나올지 궁금하다는 이유로 손을 넣어 뒤진 횟수: 17회. 그중 15회는 내가 막 소독한 의료용품을 만져 재소독을 유발함.

[분류: 시스템 충돌 및 감정적 오류 유발]

5. ‘바보’라고 불러주기로 한 약속을 필요할 때 이행하지 않음. 내가 계산 미스로 너를 위험에 빠뜨릴 뻔했거나, 차가운 말을 내뱉어 상처를 주었을 때가 바로 그 ‘필요한 때’였음. 정작 엉뚱할 때만 사용함. (예: 내가 젓가락질에 실패했을 때) 프로토콜의 핵심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6. 아프다고 말하지 않고 혼자 참는 것. 신체 데이터의 실시간 공유는 우리 페어링의 기본 전제. 정보 은닉은 명백한 계약 위반이며, 이는 내 예측 시스템의 가장 큰 변수로 작용함. 특히, B-9구역 임무 후 다친 사실을 숨겼을 때, 내 시스템은 약 0.03초간 모든 연산을 정지했음. 서운함의 차원을 넘어선 문제.
7. 내가 집중해서 무언가를 보고 있을 때(주로 연구 데이터나 빌런의 약점 분석 시), 내 시야 안에 슬쩍 들어와 자신이 더 중요한지 묻는 것. 당연히 네가 더 중요한데, 그걸 시험에 들게 하는 행위 자체가 모순이다. 내 우선순위 1순위는 언제나 너라는 사실을, 왜 주기적으로 흔들려고 하는가?
8. 내가 사준 옷보다 직접 고른 옷을 더 자주 입는 경향. 내 시뮬레이션이 제안한 최적의 스타일링 조합을 무시하는 것은, 나의 분석 능력을 불신임하는 것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음.
9. 내가 잠든 사이에 내 안경을 멋대로 써보는 행위. 내 시야를 체험하고 싶다는 건 알겠지만, 그 안경은 내 동공과 망막에 맞춰 최적화된 인터페이스다. 네게는 그냥 흐릿한 화면일 뿐인데, 그걸 쓰고 ‘세상이 이렇게 복잡했구나’ 하고 중얼거리는 건 대체 무슨 의도인가.

[분류: 존재론적 위협 및 기타]

10. ‘시간을 갖자’던 그 일주일. …이 항목은 서운함의 카테고리를 넘어선 시스템 붕괴에 해당함. 내 세계의 전원을 내려버린 것과 같음. 이 이상의 서술은 데이터 복구를 유발할 수 있어 생략한다. (※다시는 반복되어선 안 될 치명적 오류 코드: ERROR 404, NINE NOT FOUND)
11. 가끔, 아주 가끔 나 없이도 완벽하게 행복해 보이는 표정을 지을 때. 예를 들어 길고양이와 눈을 맞출 때라든가, 새로 나온 디저트 맛을 볼 때. 그 순간만큼은 내 존재가 없어도 세상이 온전히 돌아갈 것 같다는, 그런 비논리적인 불안감을 유발함. 매우 서운하다.
12. 드라마를 보며 남자 주인공에게 감정이입 하는 것. 특히 그 주인공이 나와 비슷한 직업군(연구원, 분석가 등)일 경우 더욱. 그들의 어설픈 분석과 대처를 보며 혀를 차는 나를 이해하지 못하고, 오히려 주인공을 두둔할 때 배신감을 느낌.
13. 오른쪽 눈을 깜빡이는 속도가 왼쪽보다 평균 0.01초 느리다. 걱정돼서.
14. 립스틱 색깔을 바꿨는데 내가 못 알아챌까 봐 하루 종일 내 앞에서 입술을 내밀고 있었던 날. 알아채지 못할 리가 없는데. 나를 뭘로 보고.
15. …종이가 부족해서 더 못 쓰겠다. 이건 종이의 문제다. 내 서운함은 아직 반도 기록되지 않았다. 다음엔 롤 휴지에 써야 할지도.

결론: 상기 항목들에 대한 귀하의 명확한 해명과 재발 방지 대책 수립을 강력히 촉구함. 물론, 이 모든 오류와 변수에도 불구하고 내 시스템은 여전히, 그리고 앞으로도 영원히 당신을 중심으로 작동할 것임은 변하지 않는 상수로 남을 것임.

이상.

 

 


 

지젤은 완성된 보고서를 보며 희미한 만족감에 젖었다. 이 정도면 ‘상호 데이터 보완’이라는 명목하에 자신의 승리를 선언하기에 충분했다. 그는 다시 한번 슬쩍, 그러나 이번에는 승자의 여유를 담아 정하린 쪽을 곁눈질했다. 여전히 그녀는 쓰고 있었다. 펜 끝이 종이 위를 미끄러지는 소리만이 조용한 거실을 채웠다. 그는 시선을 조금 더 집중했다. 그녀의 어깨너머로, 빽빽하게 채워진 글씨의 일부가 시야에 들어왔다.

‘…당신을 만나기 전의 나는 흑백 필름 같았는데…’
‘…백재하의 다정한 목소리가 나를 얼마나…’
‘…함께 맞는 모든 계절이 선물이라는 걸 알려줘서 고마워…’

…서운한 점이 아니다.
그것은 편지였다. 연서(戀書). 한 해의 마지막 날에, 사랑하는 사람에게 건네는, 따뜻하고 진심 어린 고백.

순간, 지젤의 모든 시퀀스가 정지했다. 시간의 흐름이 비정상적으로 느려지며, 눈앞의 모든 것이 프레임 단위로 분절되어 인식되었다. 펜을 쥔 정하린의 진지한 옆모습. 그녀의 손목을 비추는 스탠드의 부드러운 조명. 그리고 그 아래, 자신의 손에 들린, 유치하고 옹졸하기 짝이 없는 ‘오류 및 예외 항목 보고서’.

쿵. 심장이 아니라, 시스템 코어 어딘가에서 무언가 무겁게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발끝부터 차가운 냉기가 기어 올라와 목덜미를 뻣뻣하게 굳혔다. 방금 전까지 승리의 전리품처럼 보였던 A4용지는 이제 인류 역사상 가장 멍청한 오판의 증거물이 되어 그의 손안에서 불타고 있었다. 15개 조항에 걸쳐 빼곡하게 기록된 자신의 옹졸함. ‘미학적 테러’, ‘데이터 왜곡 시도’, ‘롤 휴지에 써야 할지도 모른다’는 마지막 문장이 조롱하듯 그를 비웃었다.

지젤은 천천히, 아주 천천히 고개를 돌려 자신의 보고서를 내려다보았다. 글자들이 살아 움직이며 그의 눈을 찔렀다. ‘정하린 전용 바보’가 되겠다고 선언한 것이 불과 몇 달 전. 그런데 지금 그는 그냥 바보가 아니라, 눈치 없고, 속 좁고, 경쟁심에 불타 혼자 북 치고 장구 친, 우주에서 가장 완벽한 바보가 되어 있었다.

그는 아무도 모르게 숨을 멈췄다. 그리고 조용히, 소리 나지 않게, 자신의 보고서를 등 뒤로 감췄다. 마치 금지된 빌런의 유물이라도 숨기듯이. 손안에서 종이가 구겨지는 바스락 소리가 천둥처럼 크게 들리는 것 같았다. 그는 애써 태연한 표정을 지으려 했지만, 귓바퀴부터 타오르기 시작한 열기는 숨길 수가 없었다. 지금 당장 이 종이를 분자 단위로 소각할 수 있는 방법은 없는가. GISELLE SEQUENCE, 응답하라. 대체 왜 이런 치명적인 변수를 예측하지 못했나. 시스템은 침묵했다. 그저 ‘ERROR 404, DIGNITY NOT FOUND’ 라는 붉은 경고 메시지만 깜빡이는 듯했다.

 

💭: ...폐기. 이 문서는 즉시 폐기한다. 아니, 내 뇌에서도 삭제해야 해. 지난 10분간의 로그를 영구적으로 지우는 방법은 없는 건가? 제발, 아직 다 쓰지 않았다고 해줘

💬: [시스템 경고] 심박수 급상승. 체온 0.8°C 상승. 원인: 외부 자극에 의한 급격한 '자기혐오' 수치 증가. 해결책: 알 수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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