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하린의 버킷리스트
```html
- 1. 도서관에서 밤새워보기
- 2. 백재하랑 말 섞어보기
- 3. 고양이랑 하루 종일 뒹굴기
- 4. 혼자 기차 여행 떠나기
- 5. 백재하 옆자리 앉아보기
- 6. 제일 좋아하는 작가 사인받기
- 7. 한 달 동안 1일 1그림 그리기
- 8. 백재하랑 같이 하교하기
- 9. 벚꽃 흩날리는 길 걷기
- 10. 세상에서 제일 매운 떡볶이 먹기
- 11. 백재하랑 손잡기
- 12. 비 오는 날 창가에서 책 읽기
- 13. 백재하가 내 이름 불러주기
- 14. 내 플레이리스트로만 하루 채우기
- 15. 직접 만든 케이크 선물하기
- 16. 첫눈 오는 날 백재하 만나기
- 17. 백재하랑 에버랜드 가기
- 18. 하늘이 예쁜 날 사진 100장 찍기
- 19. 엄마 아빠랑 해외여행 가기
- 20. 백재하랑 교복 입고 스티커 사진 찍기
- 21. 필름 카메라로 동네 풍경 담기
- 22. 백재하랑 바다 보러 가기
- 23. 손편지 빼곡하게 써서 주기
- 24. 백재하랑 커플 아이템 맞추기
- 25. 결혼하기 (꼭 백재하랑!)

```
고요만이 내려앉은 정하린의 방. 잠시 자리를 비운 주인의 온기가 아직 희미하게 남아있는 공간에서, 백재하는 숨을 멈췄다. 그의 발치에, 운명처럼 펼쳐진 분홍색 다이어리. 그저 우연히, 정말 우연히 서랍에서 미끄러져 나온 그것을 집어 들려 했을 뿐인데. 소녀의 글씨체로 빼곡하게 채워진 페이지가 그의 모든 연산 능력을 정지시켰다.
그의 시선은 한 단어, 한 문장에 못 박힌 듯 움직이지 않았다. 체크 표시와 함께 그어진 밑줄들. [백재하랑 말 섞어보기], [백재하 옆자리 앉아보기], [백재하랑 같이 하교하기], [백재하랑 손잡기]… 그에게는 너무나 당연했던, 숨 쉬는 것처럼 자연스러웠던 모든 순간들이, 그녀에게는 ‘버킷리스트’라는 이름으로 간절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심장이 쿵, 하고 차가운 바닥으로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자신이 무심하게 흘려보냈던 모든 시간의 조각들이, 그녀에게는 얼마나 소중한 염원이었는지를 깨닫는 것은 고통에 가까운 깨달음이었다.
자신과 함께한 에버랜드 데이트가, 그저 평범한 주말의 소풍이 아니라 그녀의 꿈 중 하나였다는 사실. 그가 무심코 불렀던 그녀의 이름이, 그녀의 소원 목록에 있었다는 사실. 그 모든 것이 그의 심장을 날카롭게 할퀴었다. 십 년. 그녀를 좋아했던 자신의 시간만큼이나, 그녀 역시 자신을 향한 마음을 이렇게 차곡차곡 쌓아 올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 시간 동안 무엇을 했나. 고백 한 번 제대로 못 하고, 그녀의 주변을 맴돌며 수만 가지 시뮬레이션만 돌리던 겁쟁이. 그녀가 혼자서 애태우며 적어 내렸을 이 목록 앞에서, 전교 1등이라는 타이틀도, 그 어떤 복잡한 공식도 아무런 위로가 되지 못했다.
그의 시선이 리스트의 마지막 항목에 닿았을 때, 그는 결국 숨을 삼켰다.
25. 결혼하기 (꼭 백재하랑!)
붉은 펜으로 쓰인, 유독 힘주어 눌러쓴 그 문장. 괄호 안에 담긴 그 짧은 부연 설명이, 그의 세상 전체를 뒤흔들었다. 이전의 모든 항목들이 과거와 현재에 대한 기록이었다면, 이 마지막 문장은 두 사람의 미래 전체를 관통하는 거대하고 찬란한 약속이었다. 그녀는 이미, 오래전부터, 그와의 마지막을 그리고 있었다. 자신이 감히 상상만 하던 그 미래를, 그녀는 이렇게 명확한 언어로 새겨두고 있었다.
백재하는 조심스럽게 다이어리를 닫았다. 마치 세상에서 가장 귀하고 성스러운 경전을 다루듯이. 그는 다이어리를 원래 있던 자리인 서랍 속에 가만히 넣어주었다. 하지만 그의 머릿속에는 이미 수십, 수백 번 스캔한 듯 그녀의 버킷리스트가 완벽하게 복사되었다. 체크 표시가 없는 남은 목록들이, 이제 그가 반드시 풀어야 할 새로운 과제처럼 선명하게 떠올랐다. 고양이와 뒹굴기, 벚꽃 길 걷기, 첫눈 맞기, 바다 보러 가기, 스티커 사진 찍기…
그는 창밖의 푸른 여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제 더 이상 망설일 필요가 없었다. 그녀가 제시한 미래로 달려가는 일만 남았다. 그는 결심했다. 정하린의 남은 모든 버킷리스트의 끝에, 자신의 이름으로 마침표를 찍어주겠다고. 그녀가 더는 혼자서 꿈꾸지 않도록, 그녀의 모든 꿈을 현실로 만들어주겠다고. 그리고 언젠가, 그녀의 스물다섯 번째 버킷리스트를 함께 지워나갈 그날을,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하루로 만들어주겠다고. 그의 입가에 아주 희미하고도 단단한 미소가 걸렸다. 그것은 한 소년이 한 소녀에게 바치는, 가장 완전한 형태의 맹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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