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안하고 사랑해
차갑고 건조한 바람이 그의 뺨을 스쳤다. 아니, 이제는 ‘그녀’의 뺨이라고 해야 할까. 그는 병원 복도 창가에 기대선 채, 어둠이 내려앉은 도시의 풍경을 무감각하게 응시했다. 유리창에 비친 것은 익숙한 자신의 모습이 아니었다. 정하린의 얼굴. 가늘고 창백한 목선, 어깨까지 닿는 부드러운 머리카락, 그리고 그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했던, 그러나 지금은 빛을 잃고 공허하게 뜨여 있는 눈동자. 그는 자신의 손, 아니 정하린의 손을 들어 천천히 유리창을 쓸었다. 차가운 감촉만이 유일한 현실이었다.
‘영혼 체인지’라는, 삼류 소설에나 나올 법한 현상이 그와 그녀의 삶을 덮친 것은 한 달 전이었다. 어느 날 아침, 서로의 몸에서 눈을 뜬 두 사람은 경악했고, 혼란에 빠졌으며, 결국엔 필사적으로 적응해야만 했다. 센티넬과 가이드, S급과 A급. 정반대의 신체 감각과 능력 속에서 서로의 삶을 대신 살아내는 하루하루는 위태로운 곡예와 같았다. 지젤의 몸에 들어간 정하린은 폭주하는 감각의 홍수 속에서 그의 가이딩을 갈망했고, 정하린의 몸이 된 지젤은 연산 능력이 거세된 평범한 육체의 무력함에 몸서리쳤다. 그들은 서로의 부재를 통해 서로의 존재를 더욱 절실하게 깨달았다.
기적처럼 첫 번째 비가 내리던 날, 두 사람은 번개의 섬광과 함께 본래의 몸으로 돌아왔다. 서로의 품에 안겨 안도와 환희의 눈물을 흘렸던 그 순간은, 그러나 너무나 짧은 평화였다.
악몽은 맑게 갠 하늘 아래에서 시작되었다. 빌런의 기습적인 테러. 비번이었던 두 사람은 속수무책으로 휘말렸고, 정하린은 지젤을 감싸려다 무너지는 건물 파편에 휘말렸다. 그의 눈앞에서. 그녀의 몸이 힘없이 부서져 내리던 그 찰나의 순간, 그의 모든 시뮬레이션은 정지했다. 시간도, 공간도, 모든 인과율이 멈춰버린 암흑 속에서 유일하게 작동한 것은 그녀를 향해 뻗었던 그의 손, 그리고 터져 나오지 못한 절규뿐이었다.
혼수상태. 의사는 희망을 이야기했지만, 지젤의 시스템은 다른 결론을 내리고 있었다. [생체 신호 약화], [신경계 손상 누적], [소생 확률 0.01% 미만]. 그의 눈앞에 떠오르는 무자비한 데이터들은 절망을 과학적 언어로 번역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유리창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향해 나직이 물었다. 모든 것을 계산하고 예측하던 너는, 왜 이것만은 막지 못했나. 가장 중요한 변수를, 단 하나의 상수를 지켜내지 못한 연산이 무슨 의미가 있나. 그의 시스템은 처음으로 답을 내놓지 못했다. 그저 무의미한 에러 코드만을 반복해서 깜빡일 뿐이었다.
그때였다. 창밖으로 후드득,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저 멀리 먹구름 사이에서, 희미한 번개의 예고가 섬광처럼 번뜩였다. 지젤은, 아니 정하린의 몸에 갇힌 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의 텅 비어 있던 눈동자에 처음으로 어떤 빛이, 결정의 빛이 떠올랐다.
마지막 시퀀스. 그가 실행할 수 있는 유일하고도 완전한 해답. 그는 조용히 몸을 돌려 병실로 향했다. 산소호흡기와 각종 생명 유지 장치에 둘러싸여, 인형처럼 미동도 없이 누워있는 자신의 육체. 그리고 그 안에 잠들어 있는 정하린의 영혼. 그는 침대 곁에 놓인 의자에 앉아, 잠든 ‘자신’의 손을 조심스럽게 잡았다. 앙상하게 마른, 차가운 손. 이 손으로 그는 세상을 파괴하고 재구축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단 한 사람의 온기조차 붙잡지 못하고 있었다.
“정하린.”
그의 입에서 나온 것은 그녀의 목소리였지만, 그 안에 담긴 것은 온전한 백재하의 영혼이었다. 그는 펜과 메모지를 꺼내, 흔들리는 손으로 편지를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이것은 유서이자, 인수인계서였고, 그의 마지막 사랑 고백이었다.
[내가 사랑하는 나의 지휘관, 정하린에게]
이 편지를 네가 읽게 될 때, 너는 아마도 ‘나의’ 몸 안에서 눈을 뜨게 되겠지. 아마 무척 혼란스럽고, 모든 것이 낯설 거야. 미안하다. 너에게 이런 짐을 지우고 떠나게 되어서.
나는 모든 것을 계산하는 센티넬이었다. 세상의 모든 인과와 확률, 가장 효율적인 파괴와 최선의 경로를 찾아내는 것이 나의 존재 이유였지. 너를 만나기 전까지는. 너는 나의 모든 계산을 무너뜨리고, 모든 변수 위에 군림하는 유일한 상수였다. 나의 세계는 너를 기준으로 재편성되었고, 나의 모든 시퀀스는 너의 안정을 최우선으로 설정했다.
우리의 영혼이 처음 뒤바뀌었을 때, 나는 무력했다. 너의 몸 안에서 나는 그저 평범한 인간이었고, 나의 능력이 없는 세상은 회색빛의 지루한 공간에 불과했다. 하지만 동시에, 나는 너의 시선으로 세상을 보았고, 너의 감각으로 온기를 느꼈으며, 너의 심장으로 사랑을 배웠다. 너는 나의 오만했던 세상을 부수고, 그 폐허 위에 새로운 세계를 건설해주었다. 너와 함께하는 모든 순간이, 나의 시스템이 찾아 헤매던 유일한 ‘정답’이었음을 이제야 깨닫는다.
정하린. 나는 너 없는 세상을 단 하루도 살아갈 자신이 없다. 나의 모든 연산이 가리키는 미래에 네가 없다면, 그 시간은 나에게 무의미한 데이터의 나열일 뿐이다. 그래서 나는 마지막 선택을 하려 한다. 나의 모든 것을 너에게 주는 선택을.
너는 나의 몸으로 깨어날 것이다. 그 몸은 강력하고, 모든 위협으로부터 너를 지켜줄 수 있을 거다. 폭주와 감각 과부하가 너를 괴롭히겠지만, 걱정하지 마라. 너는 최고의 가이드이니, 분명 누구보다 스스로를 잘 다스릴 수 있을 거다. 내가 없는 세상에서, 네가 스스로를 지킬 수 있도록. 이것이 내가 너에게 줄 수 있는 마지막 선물이자, 나의 이기적인 속죄다.
이제부터 너는 백재하, 코드네임 지젤로 살아가야 한다. 힘들겠지만, 부디 살아남아다오. 내가 사랑했던 너의 모습으로, 때로는 웃고, 때로는 화내고, 가끔은 바보 같은 나를 떠올리며 울어도 좋다. 너의 모든 감정의 파동이, 소멸해가는 나의 마지막 데이터가 될 테니까.
연구실 지하 컨트롤룸, 나의 시스템에 너의 생체 정보를 영구적인 마스터 키로 등록해두었다. 모든 접근 권한과 프로토콜은 너의 것이다. 나의 모든 지식과 데이터, 그리고 나의 모든 재산은 이제 너의 소유다. 그것으로 네가 원하는 삶을 살아라. 더 이상 누구의 가이드도, 센티넬의 페어도 아닌, 온전한 ‘정하린’의 삶을.
사랑했다, 정하린. 나의 처음이자 마지막 지휘관. 너는 나의 유일한 세계였고, 나의 모든 것이었다. 그러니 부디 행복해라. 그것이 나의 마지막 명령이다.
\- 너의 센티넬, 백재하가.
그는 편지를 곱게 접어 ‘자신’의 손에 쥐여주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둘만의 유언장’이라 이름 붙인 또 다른 문서를 꺼내 그 옆에 놓았다.
[프로토콜 제로: 최종장 - 상호 소유권 계약서]
제1조 (계약의 목적)
본 계약은 ‘백재하(이하 GISELLE)’와 ‘정하린(이하 NINE)’ 간의 영혼, 육체, 기억, 자산 및 존재 자체에 대한 완전하고 영구적인 상호 소유권을 확립하고, 일방의 소멸 시 잔존하는 타방에게 모든 권리가 귀속됨을 명시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제2조 (소유권의 정의)
1. ‘백재하’의 모든 것 - GISELLE SEQUENCE 시스템, S급 센티넬로서의 신체 및 능력, 모든 지적/물리적 자산, 세상에 기록된 모든 데이터 - 은 ‘정하린’에게 귀속된다.
2. ‘정하린’의 모든 것 - A급 가이드로서의 능력, 그림자의 영토, 그녀의 미소와 눈물, 모든 기억과 감정의 파편 - 은 ‘백재하’에게 귀속된다.
3. 우리는 서로의 시작이자 끝이며, 서로의 존재에 대한 유일한 증명이다.
제3조 (계약의 발효)
본 계약은 ‘백재하’의 심장 박동이 정지하거나, ‘정하린’의 영혼이 소생 불가능 상태에 이를 시, 혹은 천둥을 동반한 비와 함께 두 영혼의 교차가 이루어지는 순간, 즉시 발효된다.
제4조 (상속 및 의무)
1. 살아남은 자는 소멸한 자의 모든 것을 기억하고, 그의 몫까지 세상을 살아낼 의무를 가진다.
2. 살아남은 자는 매년 우리의 첫 만남 기념일(2019.09.09), 폐허가 된 도서관 터를 찾아 헌화한다.
3. 살아남은 자는 더 이상 영양겔 따위로 식사를 때우지 않으며, 반드시 하루 한 끼는 따뜻한 밥을 먹는다.
4. 만약 세상이 다시 한번 우리를 갈라놓으려 한다면, 살아남은 자는 주저 없이 세상을 파괴할 권리를 가진다.
제5조 (최종 조항)
우리는 함께 무너질 일도, 무너뜨릴 일도 없을 것이라 맹세했다. 그러나 만약 한 사람이 무너져야만 다른 한 사람이 바로 설 수 있다면, 우리는 기꺼이 스스로를 희생하여 상대를 일으켜 세운다. 이는 페어로서의 계약이 아닌, 서로의 유일한 세계를 지키기 위한 사랑의 약속이다.
서명: 백재하, 정하린
(지문과 심장박동 패턴으로 갈음함)
모든 준비를 마친 그는, ‘자신’의 이마에 아주 길고, 아주 천천히 입을 맞추었다. 곧 너의 것이 될 몸에 대한 마지막 작별 인사였다. 그는 생명 유지 장치들을 하나씩, 아주 조심스럽게 떼어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모든 속박에서 벗어난 자신의 육체를, 정하린의 영혼이 잠든 그 몸을, 가볍게 안아 들었다.
창밖은 이미 거센 폭풍우가 도시를 집어삼키고 있었다. 쾅!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굉음과 함께, 번개가 밤하늘을 길게 가르며 병실 안을 환하게 비추었다. 완벽한 타이밍. 그의 마지막 시퀀스가 시작될 무대였다.
그는 정하린의 몸으로, 정하린의 영혼이 담긴 자신의 몸을 안고 병원 옥상으로 향했다. 빗줄기는 온몸을 때렸고, 바람은 살을 에는 듯했다. 하지만 그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그의 모든 감각은 품에 안긴 ‘자신’의 미약한 숨결에 집중되어 있었다.
“미안하다, 하린아.”
그는 속삭였다. 빗소리에 묻혀 누구에게도 닿지 않을 독백이었다.
“너에게 죽음을 주려던 게 아니었어. 너에게 나의 삶을 주고 싶었다. 너의 고통과 상처는 내가 전부 가져갈 테니, 너는 나의 몸으로… 나의 모든 것으로… 부디 살아남아 줘. 나의 모든 계산이 틀렸지만, 이 마지막 선택만큼은… 부디 정답이기를.”
그는 옥상 난간 끝에 섰다. 도시의 불빛이 아득하게 아래로 펼쳐져 있었다. 그는 품에 안은 몸을 더욱 단단히 끌어안았다. 마치 하나의 존재인 것처럼. 그리고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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