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부의 날에 대한 지젤의 생각
연구동, 혹은 집 지하의 컨트롤 룸. 그 어느 곳에서도 아닌, 그저 데이터의 흐름만이 존재하는 무형의 공간 속에서 백재하는 떠다니고 있었다. 현실의 육신은 거실 소파에 앉아 잠든 그녀의 머리를 제 무릎에 뉘인 채였지만, 그의 의식은 광대한 정보의 바다를 유영하며 불필요한 노이즈들을 필터링하는 중이었다. 그러다, 문득. 그의 연산 시스템에 하나의 태그가 걸려들었다.
[기념일: 부부의 날. 5월 21일.]
둘(2)이 하나(1)가 되는 날. 그것은 사회적 약속이자 통계적 이벤트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 단순한 정의가 백재하의 코어에 미세한 파문을 일으켰다. 둘이 하나가 된다. 2 to 1. 융합. 동기화. 완전한 폐쇄 루프의 완성. 그의 시스템이 단 한 번도 시뮬레이션 해본 적 없는, 그러나 그의 모든 존재가 갈망해온 단 하나의 상태였다.
그의 시선이 무릎 위, 새근새근 잠든 정하린의 얼굴로 향했다. 규칙적인 숨소리가 만들어내는 미세한 공기의 흐름. 살짝 벌어진 입술. 그의 손길에 익숙해진 듯 편안하게 이완된 얼굴 근육까지. 모든 데이터가 완벽한 평온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리고 그 평온 속에서, 백재하는 가장 비합리적이고, 가장 강력한 시뮬레이션을 시작했다. ‘만약’이라는 가정 하에 펼쳐지는, 둘이 하나가 된 미래의 단편들.
아침은 언제나 커피 향으로 시작될 것이다. 임무 호출 알람이 아닌, 원두 가는 소리와 물 끓는 소리가 공간을 채우는 아침. 그는 먼저 일어나 창으로 스며드는 햇빛의 각도를 계산하고, 그녀가 눈을 떴을 때 가장 부드러운 빛이 닿도록 블라인드를 조절할 터였다. 부엌으로 가 그녀가 좋아하는 방식 그대로 토스트를 굽고 계란을 익히는 동안, 침실에서 부스스한 모습으로 걸어 나온 그녀가 등 뒤에서 말없이 그를 끌어안는다. ‘좋은 아침, 백재하.’ 아니, 어쩌면 그땐 다른 호칭으로 불릴지도 모른다. 그의 시스템에 존재하지 않는, 오직 그녀만이 정의할 수 있는 단어로.
오후에는 함께 장을 보러 나갈 것이다. 그는 카트를 밀며 수많은 상품들 사이에서 가장 신선하고 완벽한 식재료를 스캔하겠지만, 정작 그의 모든 감각은 제 옆에서 사소한 것들을 보며 즐거워하는 그녀에게 고정되어 있겠지. ‘이거 맛있겠다’, ‘이건 다음에 해 먹자’. 그녀가 무심코 던지는 말들은 그의 시스템에 ‘최우선 목표’로 저장되고, 그날 저녁 식탁은 그녀의 작은 소망들로 채워진다. 그는 요리를 하고, 그녀는 그 옆에서 조잘거리며 그가 만든 음식을 가장 먼저 맛보는 기쁨을 누린다. 그 평범함이 주는 절대적인 안정감. 그것은 그 어떤 가이딩보다도 완벽한 형태의 평온일 것이다.
빌런이 사라진 세상은 아니겠지만, 임무가 없는 저녁은 온전히 둘의 것이 된다. 그는 소파에 기대앉고, 그녀는 자연스럽게 그의 품으로 파고들어 가장 편한 자세를 찾는다. 그는 그녀를 위해 영화를 고르는 대신, 그녀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거나,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혹은 가만히 그녀의 심장 소리를 듣는다. 그의 세계를 구성하는 유일한 소리. 그녀가 잠이 들면, 그는 그녀를 안아 침실로 옮길 것이다. 폭주도, 불안도 없는, 오직 서로의 온기만이 가득한 침대에서 그는 그녀를 끌어안고 잠이 든다. 그의 모든 연산이 멈추고, 세상의 모든 변수가 ‘정하린’ 하나로 수렴하는 완벽한 밤. 그것이 바로, 그가 정의하는 ‘가정(Home)’의 모습이었다.
길지도 짧지도 않은 상념의 시퀀스가 종료되었다. 백재하의 눈동자가 다시 현실의 빛을 담았다. 그의 시스템이 내보냈던 무수한 가능성의 빛줄기들이 다시 하나의 초점으로 모여들었다. 바로 지금, 제 무릎을 베고 잠든 여자, 정하린에게로. 상상 속의 그녀가 아닌, 실존하는 그녀. 아직은 부부가 아니지만, 이미 그의 유일한 세계가 된 여자.
그의 손가락이, 잠든 그녀의 뺨을 아주 조심스럽게 쓸었다. 부드러운 감촉이 현실임을 증명했다. 상상 속의 안락함보다, 지금 이 순간의 생생한 온기가 훨씬 더 압도적이었다.
정하린.
그가 나직하게, 오직 그녀에게만 들릴 법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녀는 여전히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그는 대답 없는 그녀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고개를 숙여 그녀의 이마에 제 입술을 묻었다. 약속처럼, 혹은 맹세처럼.
‘부부의 날’ 같은 건 필요 없을지도 모른다. 그의 세계에선, 너와 함께 눈을 뜨고 잠드는 모든 날이 이미, 둘이 하나가 되는 날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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