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중한 기억보단 소중한 71억은 어떨까요?
고요하던 펜트하우스의 공기는 지젤의 연구실에서부터 미세하게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그는 방금 막 끝낸 ‘나인 전용 긴급 탈출 프로토콜 Ver 3.1’의 최종 시뮬레이션을 검토하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빌런의 손톱 끝 하나 그녀에게 닿기 전에 반경 500미터 내의 모든 변수를 소멸시키는 완벽한 알고리즘. 이것이야말로 기억보다 확실한 사랑의 증명이 아닌가. 바로 그 순간, 그의 개인 단말기에 나인으로부터 수신 알림이 떴다.
화면에 뜬 것은 사내 게시판을 캡처한 이미지와 한 줄의 메시지였다.
[이미지: '소중한 사람에게 소중한 기억보단 소중한 71억을 주는 것이 어떨까요?']
[메시지: 소중한 기억보단 소중한 71억 어때?]
지젤의 눈썹이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그는 까만 안경을 고쳐 쓰며 이미지를 확대했다. ‘기억’과 ‘71억’. 형태소 분석, 시각적 유사성, 언어유희적 상관관계. 그는 이 메시지의 의도를 파악하기 위해 0.01초 만에 7,100개의 해석 경로를 시뮬레이션했다. 하지만 결과는 단 하나로 수렴되지 않고 혼란스럽게 흩어졌다. 정하린이, 71억을 원한다고? 기억 대신? 우리가 함께한 105일의 기억, 별장에서의 첫눈, 폐허 속에서의 재회, 그 모든 것을 숫자 따위와 바꾸고 싶어 한다는 말인가? 그의 심장이 차갑게 내려앉았다.
지젤의 손가락이 허공에서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의 주변으로 수십 개의 HUD 인터페이스가 폭포수처럼 쏟아져 나왔다. 실시간 주가 변동 그래프, 각국 중앙은행 금리, 비트코인 시세, 심지어는 어딘가 숨겨진 비자금 계좌까지. 그의 뇌는 ‘71억 원’이라는 목표 금액을 가장 효율적으로 확보할 수 있는 루트를 미친 듯이 연산하기 시작했다.
...71억.
그의 입에서 낮은 신음 같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잠시 후, 그는 거실 소파에 앉아 태블릿을 보고 있는 나인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그의 얼굴은 평소와 같이 무표정했지만, 눈 밑은 평소보다 두 배는 더 어두워져 있었다. 그는 나인의 앞에 멈춰 서서, 그녀의 어깨를 붙잡았다. 놀란 나인이 고개를 들자, 그는 지극히 진지하고 심각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정하린.
목소리는 낮고 단호했다.
기다려. 3일. 아니, 자금 세탁 과정까지 고려하면 4일이면 충분해. 스위스 은행의 익명 계좌로 처리해주지. 세금 문제는 걱정하지 마. 조세 회피처에 설립해둔 페이퍼 컴퍼니가 3개쯤 있으니까. 다만, 전부 현금으로 인출하는 건 부피 문제도 있고 추적의 위험이...
그는 말을 멈추고 나인의 눈을 뚫어지라 쳐다보았다. 그의 눈동자 안에서는 복잡한 수식과 그래프가 미친 듯이 돌아가고 있었다.
아니, 네가 원한다면 금괴로 바꿔주지. 그편이 가치가 보존되니까. 아니면 분산 투자를 원하나? 나스닥 우량주 40%, 신흥국 채권 30%, 나머지는... 그래, 안전 자산인 미술품으로. 내일 경매에 나오는 모네의 작품이 하나 있는데, 그걸...
그의 말을 듣고 있던 나인의 얼굴이 점차 기묘하게 변해갔다. 처음에는 어리둥절했고, 다음에는 당황했으며, 마침내는 웃음을 참기 힘든 표정이 되었다. 그녀가 보낸 것은 그저 시시한 농담이었는데, 이 남자는 지금 전 지구적 금융 시스템을 해킹해서라도 71억을 만들어 올 기세였다.
지젤, 잠깐. 스톱. 무슨 소리야, 그게.
나인이 겨우 그의 말을 끊자, 지젤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는 붙잡았던 어깨를 놓고 한 걸음 물러서더니, 자신의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정보 과부하로 인한 미세한 두통이 느껴졌다.
네가 원했잖아. 기억 대신 71억. 시뮬레이션 결과, 현재 내 가용 자산과 차명 계좌, 그리고 약간의 시장 교란을 일으키면 97.8%의 확률로 78시간 내에 목표 금액 확보가 가능해. 물론 그 과정에서 [Fearless]의 감시망을 피해야 하니, 몇몇 금융 기관의 서버를 잠시 다운시켜야 하지만... 그 정도 리스크는 감수할 수 있어. 널 위해서라면.
그는 마치 당연한 임무를 브리핑하듯 담담하게 말했다. 나인은 더 이상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그녀는 소파에 쓰러지듯 몸을 뉘며 박장대소하기 시작했다. 한참을 웃던 그녀는 눈물까지 찔끔 흘리며 겨우 입을 열었다.
아니야! 그거 그냥... 그냥 웃겨서 보낸 거야! 기억이랑 71억이랑 글자가 비슷해서! 그냥 농담이었다고!
‘농담’. 그 단어가 지젤의 연산 시스템에 입력되는 순간, 폭주하던 모든 프로세스가 급정지했다. HUD 창들이 일제히 깜박거리다 픽, 소리를 내며 사라졌다. 그는 멍하니 나인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새하얀 얼굴이 순식간에 붉게 달아올랐다. 그는 자신이 방금 무슨 짓을 했는지, 얼마나 거대한 착각의 구렁텅이에 빠져 있었는지를 깨달았다.
다음 날, 사내 게시판에는 새로운 글이 하나 올라왔다. 제목은 ‘71억보다 소중한 기억을 만드는 법 (Ver 1.0) - GISELLE’ 이었다. 그 글에는 105일 동안의 날씨, 습도, 나인의 미세한 표정 변화와 심박수 데이터까지 첨부된, 지극히 과학적이고 분석적인 ‘추억 제조 매뉴얼’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물론, 그 글은 올라온 지 5분 만에 ‘과도한 개인 정보 노출’을 사유로 지부장 K에 의해 강제 삭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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