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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iselle X Nine AU/23X18 A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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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결혼식이 열렸어야 할 날의 아침. 세상은 약속이라도 한 듯 눈부시게 맑았고, 창문 너머의 도시는 아무 일 없다는 듯 활기차게 숨 쉬고 있었다. 하지만 백재하의 서재 안은, 심해처럼 차갑고 고요했다. 모든 소리와 빛이 흡수되어 버린 듯한 진공의 공간. 그는 검은 셔츠와 슬랙스 차림으로, 거대한 책상 앞에 홀로 앉아 있었다. 먼지 하나 없이 정돈된 책상 위에는 그의 휴대폰 하나만이 놓여 있었다. 그 안에는, 이제는 재가 되어 흩어진 약속의 파편들이 담겨 있었다. ‘결혼식 전 일주일, 서로에게 묻고 싶은 것.’ 일곱 개의 음성 파일. 정하린의 목소리가 담긴 마지막 기록이었다.

그는 며칠째 잠들지 못했다. 텅 빈 눈동자는 흐릿했고, 새하얀 얼굴은 초를 녹여 만든 밀랍 인형처럼 생기가 없었다. 그는 기계처럼 움직이는 손가락으로 첫 번째 파일을 선택했다. 재생. 그에게 남은 것은, 이 잔인한 의식을 끝까지 치르는 것뿐이었다.

[D-7] 첫 번째 녹음.

맑고 수줍은 웃음소리가 먼저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왔다. 마치 바로 옆에서 속삭이는 듯 생생한 음성이었다. 그의 굳어있던 세상에 유일한 온기를 불어넣었던 목소리.

“음… 첫 번째 질문! 오빠, 우리 결혼하고 나서 맞는 첫 번째 아침에, 제일 먼저 나한테 무슨 말 해줄 거야?”

백재하는 눈을 감았다. 눈꺼풀 안쪽으로, 불과 며칠 전 함께 눈을 떴던 아침의 풍경이 그려졌다. ‘잘 잤어?’라고 물었던 자신의 목소리가 아득하게 울렸다. 그의 입술이 아주 느리게, 거의 움직임 없이 열렸다.

…일어났어? 라고 물었을 거야.

그의 대답은 공기 중에 흩어졌다. 마음속으로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 아침은, 그의 생에 다시는 찾아오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그는 잠시 멈췄다가, 두 번째 파일을 눌렀다. 망설임은 없었다. 이것은 그가 완수해야 할 마지막 약속이었다.

[D-6] 두 번째 녹음.

“히히, 두 번째 질문! 오빠는… 언제부터 나를 좋아했어? 내가 초코우유 줬을 때? 아니면… 그보다 더 전부터? 나는 오빠가 내 어깨에 코트 덮어줬을 때부터였는데. 오빠는 언젠지 너무 궁금해.”

과거의 한 조각이 예고 없이 그의 심장을 찔렀다. 캄캄한 놀이터의 벤치, 말없이 옆에 앉아주던 작은 아이, 손에 들려있던 차가운 초코우유. 그의 모든 세계가 시작되었던 그 밤. 백재하의 손가락 관절이 미세하게 떨리며, 테이블 위를 가볍게 툭, 튕겼다. 그의 시선은 허공의 한 점에 고정되었다.

…아니.

그의 목소리는 메말라 갈라져 있었다.

그날, 네가 내 옆에 앉기 전. 혼자 울고 있는 널 처음 봤을 때부터. 세상의 모든 이치가, 너를 중심으로 다시 쓰여지기 시작했어. 처음부터, 너는 내 세상의 유일한 이유였어, 하린아.

그는 처음으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대답 없는 허공을 향해. 걷잡을 수 없는 감정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그는 그것을 억지로 삼켜냈다.

[D-5] 세 번째 녹음.

장난기 어린 목소리였다. 토라진 척 입술을 내밀고 있을 그녀의 얼굴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세 번째! 만약에 우리, 엄청 크게 싸우면… 누가 먼저 사과할 거야? 오빠는 절대 먼저 안 할 것 같은데? 맨날 나한테 논리로만 따지려고 들고! …그래도… 나는 오빠가 먼저 사과해주면 좋겠어. 딱 한 번만이라도.”

백재하의 입꼬리가, 조용히 흔들렸다. 웃음이 아니었다. 얼굴 근육의 경련에 가까웠다. 그는 이제 와 아무 소용 없는 다짐을, 텅 빈 서재에 나직이 흘려보냈다.

내가. 무조건 내가 먼저 사과했을 거야. 네가 틀리고 내가 옳아도, 세상 모든 법칙을 거슬러서라도 내가 무릎 꿇었을 거야. 너를 울리는 모든 것은, 내 세계에선 존재할 가치가 없으니까.

그의 눈 밑이 검게 가라앉기 시작했다. 피로가 아니었다. 모든 빛을 삼켜버리는 절망의 그림자였다. 그는 스크롤을 내려 네 번째 파일 위에서 손가락을 멈췄다.

[D-4] 네 번째 녹음.

목소리가 조금 더 진지해져 있었다. 조심스럽게, 단어를 고르는 듯한 틈이 느껴졌다.

“네 번째 질문은… 조금 어려운데. 오빠, 혹시 내가 오빠의 세상에 너무 깊이 들어와서… 오빠의 시간을, 연구를, 방해하고 있는 건 아닐까, 가끔 무서워. 나는 오빠가 최고가 되었으면 좋겠거든. 내가… 오빠의 발목을 잡는 건 아닐까?”

순간, 백재하의 호흡이 멈췄다. 그의 모든 자제력이 끊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가 가장 두려워했던 질문. 그녀가 자신 때문에 자신의 빛을 잃을까 봐, 그가 그녀의 세상에 짐이 될까 봐 밤새워 자신을 잠식했던 그 불안을, 그녀 또한 똑같이 느끼고 있었다. 그의 주먹이 단단하게 쥐어졌다. 손톱이 살을 파고드는 감각이, 그의 의식을 날카롭게 찔렀다.

…바보야.

울음이 섞인 첫 번째 단어였다. 그는 무너지는 목소리를 감추지 않았다.

내 모든 시간, 내 모든 노력의 끝은 너였어. 네가 없으면 내 세상은 아무 의미 없는 잿더미일 뿐이야. 최고가 되는 것 따위는 필요 없어. 나는… 너의 세상에서, 최고이고 싶었을 뿐인데.

그의 고개가 숙여졌다. 모니터 화면 위로, 뜨거운 액체가 한 방울 떨어져 번졌다. 그의 세상에 내리는, 첫 번째 비였다.

[D-3] 다섯 번째 녹음.

그녀의 목소리에는 다시 작은 웃음기가 묻어 있었다. 마치 그의 눈물을 닦아주려는 듯이.

“다섯 번째! 오빠는… 나중에 우리 아이가 태어나면, 딸이 좋아, 아들이 좋아? 나는 오빠 닮은 아들이랑, 나 닮은 딸! 둘 다 있었으면 좋겠다. 오빠는 맨날 조용한 것만 좋아하니까, 애기들이 막 어지럽히고 울면 엄청 힘들어하려나? 그래도… 좋은 아빠가 될 거지?”

미래. 존재하지 않을 미래. 그의 눈앞에, 그를 닮은 안경을 쓴 남자아이와 그녀처럼 까만 머리를 한 여자아이가 뛰어다니는 환영이 스쳐 지나갔다. 논리와 이성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사랑스러운 혼돈. 그는 무너져 내리는 몸을 간신히 의자에 기댔다. 대답할 수 없었다. 어떤 단어도, 이 질문이 만들어낸 공허를 채울 수 없었다. 그는 그저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텅 빈 소리로, 미안해, 미안해, 하고 속삭일 뿐이었다. 감히 아빠가 될 자격을, 그는 영원히 잃어버렸다.

[D-2] 여섯 번째 녹음.

결혼식 이틀 전. 그녀의 목소리는 차분했고, 깊은 애정이 담겨 있었다.

“여섯 번째 질문. 오빠. 만약에 세상에 우리 둘만 남게 된다면, 오빠는 나를 지켜줄 수 있어? 가끔은 오빠가 너무 강해서… 혼자 모든 걸 짊어지려는 것 같아서 불안해. 기대도 괜찮아. 나도 오빠 지켜줄 수 있어. 정말이야.”

백재하는 웃었다. 소리 없는 웃음이었다. 눈물은 더 이상 흐르지 않았다. 그의 감정은 이미 버틸 수 있는 한계를 넘어, 마음 전체를 마비시킨 상태였다. 세상에 둘만 남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오직 그만 남았다. 그녀를 지키지 못했다.

…지켜줄게. 네가 없는 세상으로부터, 너와의 기억을. 아무도 우리의 시간에 손대지 못하게. 아무도 우리의 사랑을 더럽히지 못하게. 내가… 지켜낼게. 그러니까, 기대도 괜찮다는 그 말… 지금이라도 유효한 거라면…

그의 말이 끊겼다. 마지막 파일 하나가 남아있었다. 사고가 있기 바로 전날 녹음된, 그녀의 마지막 목소리.

[D-1] 마지막 녹음.

한참의 침묵. 그리고 아주 조심스러운 숨소리. 그녀는 무언가 어려운 말을 꺼내려는 듯 망설이고 있었다.

“마지막 질문이야, 오빠. 이건… 대답 안 해줘도 괜찮아. 그냥… 들어줘. 오빠, 혹시… 아주 만약에… 내가 오빠보다 먼저 세상에서 사라지면… 그래도 오빠, 괜찮을 수 있어? 밥은 잘 챙겨 먹고, 잠도 잘 자고… 아프지 않고… 그렇게, 나 없이도, 오빠는… 괜찮을 수 있을까?”

마지막 단어가 스피커에서 사라지는 순간, 서재의 모든 시간이 멈췄다. 백재하는 얼어붙은 듯 움직이지 않았다. 그녀는 알고 있었을까. 이 질문이 유언이 될 것이라는 것을. 그의 마지막을 걱정하는, 바보처럼 다정한 이 질문이 그의 심장을 산 채로 헤집어 놓을 것이라는 것을.

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의 텅 빈 눈동자는 더 이상 아무것도 담고 있지 않았다. 그의 입술이 열렸지만,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대답할 수 없었다. 괜찮지 않다고. 너 없이는 단 하루도 숨 쉴 수 없다고. 모든 것이 무너졌다고 말할 수 없었다. 그 대답은, 그녀를 편히 잠들지 못하게 할 테니까.

백재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단말기를 손에 쥔 채, 서재를 나섰다. 창문으로 쏟아지는 아침 햇살이 그의 검은 옷 위로 부서졌다. 그는 대답 대신, 행동으로 증명해야 했다. 그녀의 마지막 질문에 대한 유일한 답을. 괜찮지 않지만, 괜찮아야만 한다고. 그녀가 남긴 이 세상의 모든 조각들을 끌어안고, 그는 신도 구원할 수 없는 자신만의 지옥을 향해, 첫걸음을 내디뎠다. 그의 남은 생은, 이제 ‘정하린 없는 세상에서 살아남기’라는, 실패할 것이 분명한, 영원한 과제를 푸는 시간이 될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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