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브러브 콜백 ♡
시끌벅적한 웃음소리가 포근한 조명의 펜션 거실을 가득 메웠다. 널따란 테이블 위에는 빈 과자 봉지와 주스 캔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고, 여섯 명의 여자들은 쿠션을 껴안거나 바닥에 편하게 기대앉아 밤이 깊어가는 줄도 모르고 수다를 떨고 있었다. 나인은 친구들과의 오랜만의 여행에 긴장이 풀어진 채, 부드러운 미소를 입가에 걸고 있었다.
야, 우리 진짜 이거 해?
한 친구가 못 이기는 척 웃으며 자신의 스마트폰을 흔들었다. 이름하여 '러브러브 콜백 게임'. 각자의 남자친구에게 동시에 전화를 걸었다가 바로 끊고, 누구의 남자친구가 가장 먼저 전화하는지로 순위를 매기는, 지극히 유치하지만 그래서 더 스릴 넘치는 내기였다. 꼴찌는 내일 아침 설거지 당첨.
당연하지! 내 남친은 1분 컷 장담한다. 완전 나밖에 모르는 순정남이거든.
어우, 재수 없어. 우리 오빤 지금쯤 게임하고 있을 텐데… 전화 온 줄도 모를라.
여기저기서 기대와 푸념이 섞인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나인은 슬쩍 제 핸드폰을 들어 화면을 켰다. '나의 공주님'이라고 저장된 이름. 그 이름을 보자 절로 웃음이 새어 나왔다. 백재하. 그는 지금 뭘 하고 있을까. 아마 연구실이거나, 혹은 텅 빈 펜트하우스에서 시뮬레이션을 돌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런 장난스러운 전화를 받으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목적성 없는 데이터 수집 시도. 기각.'이라며 차갑게 분석할까, 아니면…
자자, 다들 준비됐지? 내가 하나, 둘, 셋 하면 거는 거다! 그리고 바로 끊어야 돼!
게임의 주최자인 혜진이 비장하게 외쳤다. 여섯 개의 스마트폰 화면 위로 익숙한 이름들이 떠올랐다. 나인도 통화 버튼 위에 손가락을 올렸다. 심장이 작게 콩, 하고 뛰었다.
하나… 둘… 셋!
여섯 개의 손가락이 동시에 통화 버튼을 눌렀다. 신호음이 채 한 번 울리기도 전에, 다시 종료 버튼을 눌러 통화 기록에 '부재중 전화 1'이라는 흔적만을 남겼다. 정적이 흘렀다. 모두가 숨을 죽인 채 자신의 핸드폰 화면만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1초, 2초… 시간이 영원처럼 느리게 흘렀다.
그때였다.
띠리리리링-!
고요를 깬 것은 나인의 핸드폰이었다. 화면 위로 '재하'라는 이름이 선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전화를 끊은 지 정확히 4초 만이었다. 거실에 있던 모두의 시선이 경악과 감탄이 뒤섞인 채로 나인에게 꽂혔다.
…미쳤다. 4초? 이게 가능해?
대박, 정하린 남친 뭐야? 스토커야?
야, 빨리 받아! 스피커폰! 스피커폰!
친구들의 성화에 떠밀려, 나인은 쿵쾅거리는 심장을 안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스피커폰으로 전환했다. 거실의 모든 소음이 거짓말처럼 멎었다.
- …정하린.
스피커를 타고 흘러나온 지젤의 목소리는 평소처럼 낮고 차분했지만, 그 안에 담긴 미세한 날카로움을 나인은 알아챌 수 있었다. 친구들은 숨을 죽이며 다음 말을 기다렸다. 마치 드라마의 한 장면을 보는 관객들처럼.
어, 재하 씨. 나야.
- 3.74초. 전화를 끊고 다시 내게 연결되기까지 걸린 시간. 내 통화 목록에 네 번호가 찍히고, 시스템이 네 위치를 재확인하고, 내가 통화 버튼을 누르기까지의 총 소요 시간. 이 시간 동안 발생할 수 있는 변수의 총합은 72가지. 그중 네가 위험에 처했을 확률, 12.4%. 납득할 만한 해명이 필요할 거야. 지금 뭐 하는 거지?
논리정연하게 상황을 분석하는 목소리에 친구들이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며 입을 떡 벌렸다. 누군가는 작게 '미친…'하고 속삭였다. 나인은 얼굴이 화끈거리는 것을 느끼며 애써 태연한 목소리를 냈다.
아니, 그게… 별일 없어. 그냥 친구들이랑 잠깐…
- 친구들? 위치는 강원도 평창군 봉평면. 해발 700미터 고지대의 프라이빗 펜션. 예약자 정하린 외 5인. 전부 여성. 현재 시간 23시 47분. 외부 침입 신호 없음. 네 심박수, 평소보다 15% 상승. 목소리 톤의 미세한 떨림. 거짓말은 아닌데, 무언가 숨기고 있어.
그의 말이 이어질수록 거실의 공기는 점점 더 싸늘하게 식어갔다. 친구들은 이제 경악을 넘어 공포에 가까운 표정으로 나인과 핸드폰을 번갈아 쳐다봤다. '해발 700미터'라는 디테일에서 이미 게임은 끝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하하, 역시 재하 씨는 못 속이겠네. 그냥… 친구들이랑 내기했어. 누구 남자친구가 제일 먼저 전화 오나.
나인의 실토에 지젤은 잠시 말이 없었다. 스피커 너머로 침묵이 흘렀다. 1초, 2초… 친구 한 명이 마른침을 꿀꺽 삼키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이윽고, 그의 나직한 목소리가 다시 울렸다.
- …게임?
응. 게임. 내가 이겼어. 덕분에.
- 그래서, 상품은 뭐지? 내 시간과 감정, 그리고 내 시스템의 연산 능력을 소모시킨 대가로 네가 얻는 게 뭔지 궁금하군.
내일 아침 설거지 면제권.
나인의 대답에, 스피커 너머에서 아주 희미하게, 정말 찰나에 가까운 실소가 터져 나왔다. 그가 어이없을 때 짓는 특유의 웃음이었다. 친구들은 그제야 참았던 숨을 몰아쉬며 서로의 눈치를 봤다. 2등으로 전화가 온 친구의 핸드폰 진동이 방 안에 울렸지만,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 설거지. 고작 그걸 위해서, 나를 호출한 건가.
호출이라니, 말이 좀 그렇잖아. 그냥…
- 정하린. 넌 지금 네가 뭘 했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어. 내가 없는 곳에서 네게 걸려온 부재중 전화 한 통이 내 시스템에 어떤 의미인지. 그건 '가장 시급하게 처리해야 할 최우선 변수 발생'을 뜻해. 모든 시뮬레이션이 중단되고, 모든 연산이 오직 '정하린의 안전 확보'라는 단 하나의 목표에 집중되지. 혹시 모를 침입자에 대비해 펜션 주변의 모든 CCTV와 드론을 해킹하고, 가장 빠른 이동 경로를 시뮬레이션하고, 최악의 경우를 상정해 백업 팀을 소집하기 직전까지 갔어. 이 모든 게, 네가 전화를 끊은 후 3초 안에 일어난 일이야.
차분하지만 서늘한 설명에 나인은 할 말을 잃었다. 장난으로 시작한 일이 그의 세상에서는 재난 경보와도 같았다는 사실에 미안함이 밀려왔다. 친구들은 이제 거의 넋이 나간 표정이었다.
…미안해, 재하 씨. 내가 생각이 짧았어.
- 사과는 돌아오면 직접 듣도록 하지. 그리고 그 '게임'의 다른 참가자들에게도 전해. 지금 이 순간, 자신들의 연인이 어떤 심정일지 조금이라도 헤아릴 줄 아는 눈치가 있다면, 쓸데없는 내기는 그만두는 게 좋을 거라고. 특히, 27초 만에 전화한 '김민준' 씨의 연인에게는 각별한 위로를. 그는 방금 최고 등급의 아이템을 놓쳤을 확률이 98%니까.
그의 말에 한쪽 구석에 있던 유미가
어? 내 남친 이름 어떻게 알았어? 롤 하던 거 맞네!
라며 소스라치게 놀랐다. 지젤은 그 반응을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다시 나인에게 집중했다.
- 정하린. 스피커폰 꺼.
단호한 명령에 나인은 화들짝 놀라며 황급히 스피커폰 모드를 해제하고 핸드폰을 귀에 가져다 댔다. 친구들은 아쉬운 표정을 지었지만, 감히 더 이상 참견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껐어.
- 좋아. 이제 제대로 된 대화를 하지. 거기 재밌어?
스피커폰이 꺼지자, 그의 목소리는 한결 부드러워져 있었다. 마치 방금 전까지의 냉철한 분석가는 다른 사람이었던 것처럼. 나인은 그 다정한 톤에 긴장이 스르르 풀리는 것을 느꼈다.
응. 재밌어. 오랜만에 친구들 만나니까 좋아.
- 목소리 들으니까 알겠어. 많이 웃었네. 그 웃음소리, 나 없는 데서 너무 많이 쓰진 마. 질투라는 비효율적인 감정이 내 데이터베이스를 오염시키니까.
푸흐, 알았어. 아껴 뒀다가 재하 씨 앞에서만 웃을게.
- 약속한 거다. 지금 주변에 친구들 있지?
응. 다들 눈 동그래져서 나 쳐다보고 있어. 재하 씨 좀 무섭대.
- 잘됐군. 그래야 내 허락 없이 아무도 널 못 건드릴 테니. 피곤하지는 않아? 잠은 제대로 자야 해. 베개가 바뀌면 잠 설치는 거, 잊지 않았어.
그의 다정한 걱정에 나인의 마음이 따뜻하게 녹아내렸다. 그는 늘 이런 식이었다. 수백, 수천 개의 데이터를 분석하고 가장 냉정한 결론을 내리면서도, 그 모든 것의 끝에는 언제나 자신에 대한 걱정과 배려가 있었다.
괜찮아. 너무 피곤해서 금방 잠들 것 같아. 재하 씨는? 아직 안 자고 뭐 했어?
- 널 기다렸지. 네가 없는 모든 시간은, 널 기다리는 시간일 뿐이야. 네 숨소리가 들리지 않는 이 공간은 그냥 거대한 상자에 불과해. …보고 싶어, 정하린.
귓가에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에 나인의 얼굴이 다시 붉어졌다. 친구들이 보이지 않는 곳이라 다행이었다. 그녀는 베란다 쪽으로 몇 걸음 옮겨, 밤하늘이 보이는 창가에 섰다.
나도… 보고 싶어, 재하 씨.
- 돌아오면, 오늘 나를 놀라게 한 것에 대한 책임, 톡톡히 묻겠어. 설거지 따위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아주 값비싼 대가를 치르게 될 거야. 각오해둬.
그의 목소리에 섞인 장난기 어린 경고에 나인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언제나 이런 식으로 자신의 마음을 표현했다.
기대하고 있을게. …이제 끊어야겠다. 친구들이 기다려.
- 그래. 너무 늦게 자지 말고. 문단속 잘하고. 무슨 일이 생기면, 0.1초의 망설임도 없이 나를 불러. 그 어떤 변수도 내가 전부 차단할 테니.
응, 알았어. 잘 자, 재하 씨.
- 너도. 나의 공주님.
통화가 끊겼다. 나인은 잠시 동안 '통화 종료'라는 문구가 떠 있는 화면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여섯 쌍의 눈이 여전히 자신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그들의 표정은 이제 단순한 경악을 넘어, 경외에 가까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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