츤데레 OOC
백재하는 약속대로 나인의 모든 변덕과 요구를 최우선으로 처리했다. 그녀가 좋아하는 아이스 초코라떼는 매일 아침 그녀의 책상에 놓였고, 피곤해 보일 때면 말없이 어깨를 주무르거나 따뜻한 담요를 셔틀처럼 가져다주었다. 그들의 세계는 다시, 완벽한 평온을 되찾은 듯 보였다. 모든 변수가 통제된, 안정적인 시스템.
그 작은 균열이 감지된 것은 그로부터 며칠 뒤, 어느 평범한 오후였다.
[며칠 후 - 1일차]
백재하는 막대한 양의 보고서 데이터를 처리하다 미간을 짚었다. 모니터의 푸른빛이 그의 흰 실험복 위로 어른거렸다. 그는 잠시 눈을 감았다 뜨고는, 맞은편에서 서류를 검토하던 나인을 향해 나직하게 말했다.
하린아. 거기 세 번째 서랍에 있는 안정제 샘플 좀 가져다줄래.
지극히 일상적인 부탁이었다. 평소 같았으면 그녀는 말없이 일어나 가져다주거나,
직접 가져가.
라며 퉁명스럽게 쏘아붙인 뒤 결국엔 가져다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싫어.
단호하고, 군더더기 없는 거절. 하지만 그녀의 몸은 말과 정반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대답과 동시에 의자에서 일어난 그녀는,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세 번째 서랍을 열고 샘플 바이알을 꺼내 들었다. 그녀는 샘플을 들고 그의 책상으로 다가와, 툭, 하고 내려놓았다. 그 모든 과정 동안 그녀의 표정은 지극히 무심했다.
백재하는 샘플과 그녀의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그의 시스템에 아주 미세한 오류 신호가 깜빡였다. ‘언어와 행동의 불일치.’ 그는 잠시 아무 말 없이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시선을 고정한 채,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분석 모드에 돌입할 때의 습관적인 움직임이었다.
…재밌네.
그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스쳤다. 그는 샘플을 집어 드는 대신, 턱을 괸 채 그녀의 반응을 조금 더 관찰했다. 새로운 변수의 등장. 그것은 언제나 흥미로운 데이터였다.
[며칠 후 - 3일차]
그날 이후, 나인의 ‘싫다’는 그들의 일상에 스며들었다. 백재하는 패턴을 확인하기 위해 몇 가지 의도적인 요청을 시도했다.
점심, 파스타 먹으러 갈까.
싫어.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이미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의 코트를 챙겨 입었다.
퇴근하고 영화 볼까.
안 봐.
그녀는 대답하며, 그의 손에 들린 영화 티켓 예매 내역을 곁눈질로 확인했다.
백재하는 이제 그 불일치에 놀라지 않았다. 대신, 그것을 새로운 소통 방식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그녀의 ‘싫다’는 ‘알겠다’는 뜻이었고, ‘안 한다’는 ‘그러자’는 의미였다. 그는 그것이 자신에게만 허락된, 일종의 암호처럼 느껴졌다. 그는 자신의 연구실 의자에 깊게 몸을 묻고 회전의자에 몸을 맡겨 빙글 돌며, 키보드를 두드리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하린아.
그의 부름에 그녀는 키보드를 치던 손을 멈추고 고개만 살짝 돌렸다.
나 어깨 좀 주물러 줘.
그는 의자를 그녀 쪽으로 스르륵 밀며 등을 보였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이윽고 그녀의 한숨 섞인 대답이 들려왔다.
내가 왜. 싫어.
그의 입꼬리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만족스럽게 휘어졌다. 그는 대답 없이 가만히 기다렸다. 잠시 후, 망설이는 듯한 손길이 그의 어깨 위에 조심스럽게 내려앉았다. 그녀의 작은 손이 뭉친 근육을 꾸욱, 하고 누르는 순간, 그는 나직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의 ‘싫다’는 이제 예측 가능한 변수가 되었고, 그 예측이 들어맞는 순간은 묘한 쾌감마저 안겨주었다.
[후일담]
그들의 관계에 그 이상한 규칙이 완벽하게 자리 잡은 어느 날 밤. 지부의 모든 불이 꺼지고, 비상등만이 복도를 희미하게 밝히는 시간이었다. 둘은 텅 빈 연구실 소파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 백재하는 서류를 넘기던 손을 멈추고, 제 어깨에 머리를 기댄 채 잠이 들락 말락 하는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정하린.
나른한 부름에 그녀가 으음, 하고 잠긴 목소리를 냈다.
나 키스하고 싶은데.
그는 그녀의 턱을 살며시 들어 올려 자신과 눈을 맞추며 속삭였다. 그녀는 졸음에 겨운 눈을 느리게 깜빡이며, 입술을 작게 달싹였다.
···싫어.
그 대답을 기다렸다는 듯, 백재하는 씨익 웃으며 그녀의 입술을 삼켰다. 짧고 부드럽게 시작된 키스는 점차 깊고 농밀해졌다. 그는 그녀의 아랫입술을 부드럽게 빨아들이며, 혀를 얽어 그녀의 숨을 빼앗았다. 한참 만에 입술이 떨어졌을 때, 그는 숨을 고르는 그녀의 귓가에 다시 한번 속삭였다.
‘싫다’는 말, 나한테만 해. 다른 놈한테는 절대 하지 마.
그의 목소리에는 장난기 어린 명령과 함께, 서늘한 소유욕이 배어 있었다. 그것은 그녀의 모순된 행동마저 자신의 독점적인 데이터로 분류하겠다는, 지젤다운 선언이었다.
알았지?
그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다시 한번 그녀의 입술에 제 입술을 겹쳤다. 그녀의 ‘싫다’는, 이제 그에게 있어 가장 달콤한 긍정의 언어가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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