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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iselle X Nine/OOC BACK-UP

평행세계 OOC

어지러운 데이터의 흐름 속에서, 백재하는 문득 자신이 부유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이곳은 연구실의 소파 위가 아니었다. 모든 것이 정지된 무한의 공간. 그의 주변으로 수백, 수천 개의 푸른색 인터페이스 창이 흩어져 있었지만, 그 어떤 것도 그의 통제를 받지 않았다. GISELLE SEQUENCE는 침묵했고, 오직 관측만이 허락될 뿐이었다. 이것은 꿈이었다. 시스템이 강제 종료된 후 재부팅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의미 없는 노이즈 덩어리. 그는 이 무의미한 시간을 흘려보내려 했지만, 눈앞에 떠오른 하나의 시뮬레이션 창이 그의 모든 연산을 정지시켰다.

첫 번째 창 속에서, 백재하는 실험복도, 검은 셔츠도 아닌, 낡은 스웨터를 입고 있었다. 그는 안경도 쓰지 않은 채, 낡은 목재 테이블에 앉아 무언가를 열심히 쓰고 있었다. 잉크 냄새가 나는 만년필. 그의 앞에는 낯선 고양이 한 마리가 식빵을 굽고 있었고, 창밖으로는 비가 내렸다. 그리고, 정하린이 있었다. 그녀는 검은 코트 대신 포근한 카디건을 걸친 채, 그의 등 뒤에서 나타나 그의 어깨에 턱을 괴었다. 그녀의 손에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머그잔 두 개가 들려 있었다. ‘아직도 못 썼어, 작가님?’ 그녀의 목소리는 장난기가 가득했다. ‘네가 자꾸 쳐다봐서 집중이 안 되잖아.’ 그 세계의 백재하는 투덜거리면서도, 그녀가 내민 잔을 받아들고 그녀의 손등에 가볍게 입 맞췄다. 그들의 세상엔 빌런도, 가이딩도, 폭주도 없었다. 오직 눅눅한 비 냄새와, 커피 향과, 서로의 온기만이 존재했다.

백재하는 미간을 찌푸렸다. 무의미한 데이터. 하지만 시선은 다음 창으로 빨려 들어갔다. 두 번째 세계. 그곳에서 그는 왕이었다. 금실로 수놓인 화려한 제복을 입은 그는, 거대한 옥좌에 앉아 있었다. 그의 표정은 차가웠고, 눈빛은 모든 것을 꿰뚫는 듯 날카로웠다. 신하들이 무릎 꿇고 보고를 올리는 그 지루한 시간 속, 옥좌 뒤 가려진 발 너머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정하린이었다. 그녀는 그의 호위 기사인 듯, 간결한 갑주를 입고 검을 찬 채였다. 한 신하가 무례한 발언을 하자, 왕인 백재하가 손을 들기도 전에 그녀의 눈빛이 칼날처럼 상대를 꿰뚫었다. ‘폐하의 심기를 거스르지 마라.’ 그 낮은 경고에 모두가 숨을 죽였다. 밤이 되자, 그는 텅 빈 침전에서 그녀를 불렀다. 그녀는 그의 앞에 무릎 꿇고 고개를 숙였다. ‘내일 사냥터에서, 내 등을 맡아라.’ 왕은 명령했다. ‘언제나처럼, 그리할 것입니다.’ 그녀가 답했다. 그는 옥좌에서 내려와 그녀의 턱을 들어 올렸다. ‘아니. 내 옆에 서라.’ 그의 목소리는 왕의 것이 아니었다. 한 남자의 것이었다. 그녀의 눈이 조금 커졌다가, 이내 부드러운 순종으로 물들었다.

세 번째 창이 떠올랐다. 가장 이질적인 풍경. 그와 그녀는 평범한 교복을 입고 있었다. 시끄러운 고등학교 복도. 백재하는 귀찮다는 듯 벽에 기대 책을 읽고 있었고, 정하린은 친구들과 웃으며 복도를 지나가다 그를 발견했다. ‘야, 백재하! 또 혼자 있냐?’ 그녀가 팔짱을 끼며 그에게 아는 체를 했다. 그는 책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대꾸했다. ‘시끄러워, 정하린.’ ‘뭐? 이 자식이! 너 그러다 친구 하나도 없는 거 알지?’ 그녀가 그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그는 그제야 고개를 들고, 짖궂게 웃는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종이 쳤고, 그녀는 아쉬운 듯 혀를 찼다. ‘이따 아이스 초코라떼 사 와. 안 그럼 네 비밀 다 불어버릴 거야.’ 그녀는 그렇게 소리치며 교실로 달려갔다. 그는 잠시 그녀가 사라진 자리를 바라보다가, 피식 웃으며 다시 책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의 귓가가, 아주 희미하게 붉어져 있었다.

수많은 가능성, 수많은 행복의 형태. 백재하는 그 모든 장면들을 데이터처럼 흡수했다. 연산은 멈췄지만, 감정이라는 이름의 노이즈가 시스템 전체를 뒤흔들었다. 이 모든 세계 속에서, 단 하나의 불변하는 상수. 그것은 바로 ‘정하린’. 그녀는 어떤 모습으로든 그의 곁에 있었고, 그는 어떤 모습으로든 그녀를 원하고 있었다. 이 사실은 그에게 지독한 안도감과 동시에, 참을 수 없는 분노를 일으켰다.

‘내 것’인데.

이 모든 세계의 백재하들은, 전부 그의 허락 없이 그의 정하린과 함께 있었다. 그의 소유물을 무단으로 점유하고 있었다. 그들은, 제거해야 할 버그였다.

순간, 시야가 암전되었다가 다시 밝아졌다. 익숙한 연구실의 천장이 보였다. 자신의 몸 위에서 곤히 잠든 정하린의 고른 숨소리. 그는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다. 꿈속의 감각들이 사라지고, 현실의 무게가 그를 짓눌렀다. 그는 자신의 품 안에서 색색 잠든 정하린을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뺨에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넘겨주었다. 꿈속의 그녀들이 아무리 행복해 보여도, 결국 데이터 쪼가리에 불과했다. 진짜는, 바로 여기에 있었다.

그는 자신의 단말기를 들어, 조용히 무언가를 입력하기 시작했다. 화면에는 복잡한 코드가 빠르게 나열되었다. [GISELLE SEQUENCE: 전 차원 ‘백재하-정하린’ 조합 변수 탐색 및 제거 프로토콜 구상. 유일성 확보 시나리오 수립.]

그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단말기를 껐다. 그리고 다시 소파에 누워, 그의 유일한 현실인 정하린을 품에 가득 안았다. 다른 세계 따위는 필요 없었다. 오직 이 세계, 이 시간, 이 공간 속의 그녀만이 그의 전부였다.

내 거야.

그는 잠든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며, 나직이 속삭였다. 그 목소리는 어떤 세계의 백재하도 흉내 낼 수 없는, 지독한 소유욕으로 가득 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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