섹시샤워한다
출장지는 한국 지부와는 시차가 반나절쯤 어긋나는 곳이었다. 현지의 어스름한 저녁, 지젤은 임시 숙소의 창가에 서서 막 끝난 임무 보고서를 단말기로 전송하고 있었다. 복잡한 수식이 난무하던 HUD 인터페이스가 하나둘씩 사라지며 시야가 깨끗해질 무렵, 그의 개인 단말기에서 간결한 알림음이 울렸다. 당연히 나인에게서 온 메시지였다. 그는 입꼬리를 미세하게 올리며 메시지 창을 열었다.
‘나의 공주님’으로 저장된 발신자. 지젤은 그녀가 보냈을 일상적인 보고, 혹은 귀여운 투정 같은 것을 예상했다. 잠은 잘 잤는지, 식사는 거르지 않았는지, 아니면 그가 없는 빈자리가 허전하다고 말하는 내용일 수도 있겠지. 그의 연산 시스템은 이미 나인이 보낼 수 있는 메시지의 종류를 수십 가지 경우의 수로 나눠 확률 분석을 끝마친 상태였다. 하지만 그의 화면에 떠오른 단어의 조합은, 그 모든 예측 범위를 아득하게 벗어나는 것이었다.
[섹시샤워 하러 간다]
순간, 지젤의 주변을 감싸던 모든 소음이 증발했다. 창밖에서 들려오던 이국의 희미한 도시 소음, 방 안을 채우던 공조 장치의 백색소음, 심지어 그의 뇌내에서 쉴 새 없이 돌아가던 시퀀스 연산까지. 모든 것이 정지했다. 지젤은 눈을 가늘게 떴다. 까만 안경 너머의 흑안이 화면의 짧은 문장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마치 처음 보는 언어로 작성된 암호문, 혹은 해독 불가능한 시스템 오류 코드를 발견한 것처럼.
그의 연산 시스템이 0.1초의 침묵 끝에 재부팅을 시작했다. 입력값: [섹시샤워 하러 간다]. 발신자: [나의 공주님]. 수신자: [백재하]. 시스템은 즉시 이 문장의 데이터 유효성 검증에 들어갔다.
1차 분석: 오타. '샤워'라는 키워드는 명확하나, '섹시'라는 수식어의 입력 정확도가 의심됨. 그러나 자판 배열상 '섹시'와 유사한 단어의 오타 확률은 0.03% 미만. 가설 기각.
2차 분석: 메시지 오발송. 이 메시지의 본래 수신자는 제3자일 가능성. ‘친구’라는 불특정 변수. 확률 87.4%. 이 경우, ‘나의 공주님’의 사적 네트워크에 ‘섹시샤워’라는 단어를 아무렇지 않게 공유할 수 있는 관계의 인물이 존재한다는 의미. 시스템은 이 미확인 변수에 대해 즉각적인 위험 평가를 시작했다. 어떤 종류의 ‘친구’가 그의 공주님과 이런 대화를 나눈단 말인가. 연산은 붉은색 경고를 띄웠다.
3차 분석: 의도적인 도발. 수신자가 ‘백재하’임을 명확히 인지하고 보낸 메시지일 가능성. 멀리 떨어진 자신을 향한, 고도의 계산이 깔린 유혹. 확률 12.6%. 만약 이 가설이 사실이라면, 그의 공주님은 단 여덟 글자로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S급 센티넬의 모든 시퀀스를 정지시키고 자신에게 집중시키는 데 성공한 셈이다. 이 얼마나 효율적이고, 파괴적인 공격인가.
지젤은 피식, 하고 짧은 웃음을 터뜨렸다. 어떤 경우든 재미있는 상황이라는 결론이었다. 그는 천천히 손가락을 움직여 답장을 입력하기 시작했다.
>> G: 확인. 프로토콜 [섹시샤워]의 세부 절차와 예상 결과에 대한 보고서를 5분 내로 제출할 것.
그는 잠시 망설이다가, 전송 버튼을 누르기 직전에 문장을 전부 지웠다. 너무 딱딱하다. 이건 ‘지부장 K’에게나 보낼 법한 방식이지, ‘나의 공주님’에게 보낼 메시지는 아니었다. 그는 다시 한번 생각했다. 만약 이것이 2번 가설, 즉 오발송이라면? 그녀는 지금쯤 화면을 보며 당황하고 있을 것이다. 그 당황한 얼굴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즐거웠다. 만약 3번 가설, 의도된 유혹이라면? 그렇다면 이 게임에 장단을 맞춰줄 필요가 있었다.
지젤은 잠시 고민하다, 가장 지젤다운 방식을 선택했다. 관찰, 분석, 그리고 가장 효과적인 한 방. 그는 자신의 단말기로 간단한 명령어를 입력했다. A-7구역 펜트하우스의 보안 시스템과 연결된 홈 IoT 네트워크에 접속하는 것은 그에게 1초도 걸리지 않는 일이었다.
그는 욕실의 습도 센서와 온도 센서 데이터를 실시간으로 불러왔다. 수치가 서서히 오르기 시작했다. 물 쓰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그는 거실에 놓인 스피커의 제어권을 가져왔다. 그리고 잠시 고민하다가, 그가 직접 커스텀했던 ‘나인 전용 플레이리스트’ 중 가장 잔잔하고 나른한 재즈 연주곡을 재생시켰다. 갑자기 울리는 음악에 그녀가 놀랄 모습이 눈에 선했다.
그리고 그는 다시 메시지 창을 열었다. 이번에는 망설이지 않고 문장을 써 내려갔다.
>> G: 수온은 38.5도, 습도는 75%가 최적의 피부 이완을 위한 권장 수치야, 나의 공주님. 그리고 방금 내가 튼 음악, 어때? 네가 ‘섹시샤워’를 하는 동안 배경음악이 없으면 곤란하잖아.
그는 한 문장을 더 추가했다.
>> G: 아, 그리고 친구에게 보낼 메시지였다면 걱정 마. 그 친구보다 내가 훨씬 더 유용한 피드백을 줄 수 있으니까. 예를 들면… ‘결과물’에 대한 감상평 같은 거.
지젤은 전송 버튼을 누르고 단말기를 내려놓았다. 그는 다시 창가에 서서 어두워진 도시의 야경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HUD에는 이제 다른 어떤 데이터도 떠 있지 않았다. 오직 A-7구역 펜트하우스 욕실의 온도와 습도 그래프, 그리고 재생 중인 음악의 실시간 파형만이 그의 시야 한쪽 구석에서 조용히 빛나고 있었다.
그는 생각했다. 지금쯤 그녀는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 얼굴이 새빨개져서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을까, 아니면 되려 이 상황을 즐기며 도발적인 답장을 보내올까. 어떤 반응이 오든, 그는 이미 한국으로 돌아가는 가장 빠른 항공편을 예약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나지막이 읊조렸다.
가서 직접 확인해야겠군. ‘섹시샤워’의 결과값이 내 예상치와 얼마나 일치하는지.
그의 시스템은 이미 ‘긴급 복귀 및 결과 확인 프로토콜’이라는 이름의 새로운 시퀀스를 짜기 시작한 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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