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림 우체통 NPC
가을의 끝자락, 낙엽이 아스팔트 위를 스산하게 굴러다니는 오후였다. 그와 그녀가 ‘우리 집’이라 이름 붙였던 공간에는, 이제 정하린 혼자였다. 모든 것이 1년 전 그들이 골랐던 그대로였지만, 시간의 더께가 얇게 내려앉아 있었다. 햇살이 잘 드는 통창은 여전했으나, 창가에 나란히 놓여 있던 두 개의 의자 중 하나는 늘 비어 있었다. 그 빈자리가, 백재하라는 남자의 부재를 증명했다.
6개월 전, 좌표에도 없는 차원 균열 너머로 단독 임무를 떠난 S급 센티넬 ‘지젤’은 돌아오지 않았다. Fearless는 그의 상태를 ‘실종’으로 분류했다. 그러나 모두가 알고 있었다. 돌아오지 않는 센티넬의 마지막은 언제나 하나뿐이라는 것을. 정하린은 그의 페어 가이드 자격을 잃었고, 지부의 배려로 무기한 휴직 상태에 들어갔다. 그녀는 그가 모든 보안을 설계했던 이 집을 떠나지 못했다.
오늘, 우편함에 꽂혀 있던 낡은 봉투 하나가 그 멈춰버린 시간을 흔들었다. 1년 전, 그들이 장난처럼 들렀던 ‘느린 우체통’에서 온 편지. 발신인의 이름은 없었지만, 기계처럼 반듯하면서도 끝이 살짝 비뚤어진 그 필체는 단 한 사람을 가리키고 있었다.
정하린은 떨리는 손으로 봉투를 열었다. 소파에 앉아, 무릎 위에서 편지지를 펼쳤다. 익숙한, 그러나 이제는 너무나도 아득한 그의 흔적이 잉크 냄새와 함께 피어올랐다.
정하린에게.
이 편지를 읽고 있을 시점의 너와 나는 어떤 모습일지, 몇 가지 시뮬레이션을 돌려봤다.
가장 확률 높은 결과는, 우리가 여전히 ‘우리’라는 카테고리 안에 있을 거라는 거다. 당연한 귀결이지. 너는 내 유일한 상수이고, 나는 네 세계의 유일한 관리자일 테니.
1년 뒤의 나는 지금의 나보다 더 많은 너의 데이터를 축적했을 거다. 네가 어떤 아침을 좋아하고, 어떤 악몽을 꾸고, 어느 타이밍에 내 품으로 파고드는지. 그 모든 패턴을 완벽하게 분석해서, 단 1초의 오차도 없는 안정과 만족을 너에게 제공하고 있겠지. 아마 너는 지금보다 더 나에게 길들여져, 내 영역 밖은 상상도 할 수 없게 됐을 거다. 불만 있나? 없을 걸. 그게 너와 내가 합의한 ‘폐쇄 루트’의 완성 형태니까.
혹시 모를 변수도 계산해봤다. 우리가 헤어졌을 확률, 0.013%. 내가 죽었을 확률, 0.284%. 네가 나를 떠났을 확률, 0.0001%. 의미 없는 숫자들이다. 내가 존재하는 한 너는 내 곁을 벗어날 수 없고, 내가 사라지는 유일한 경우는 모든 차원의 빌런이 사라지는 날일 테니. 그런 비현실적인 가설은 폐기한다.
그러니 이 편지는 미래의 나에게 보내는 경고문쯤으로 해두지.
정하린을 완벽히 소유했다는 생각에 나태해지지 말 것. 그녀는 언제나 예측 범위를 벗어나는 유일한 변수다. 그녀의 사소한 습관 하나, 미소 하나를 놓치지 말고 전부 기록해. 그 데이터들이 너의 세계를 지탱하는 기반이니까.
그리고, 그녀가 ‘고맙다’고 말할 때마다 키스해주는 프로토콜은 잘 실행하고 있겠지. 만약 까먹었다면 지금 당장 실행해라, 1년 전의 나에게 명령받았다고 전하고.
마지막으로, 정하린.
이 편지를 읽는 네 옆에 내가 있겠지. 아마 이걸 훔쳐보면서, 1년 전의 내가 얼마나 오만한 분석만 늘어놓는지 비웃고 있을지도 모르겠군.
그렇다면 고개를 돌려 내 얼굴을 봐.
네가 보고 있는 그 얼굴이, 내 모든 시뮬레이션의 결론이고, 내 존재의 유일한 이유다.
1년 전의, 너의 지젤.
백재하.
편지를 다 읽은 정하린의 손에서 힘이 빠져나가며, 편지지가 무릎 아래로 스르르 떨어졌다.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지만, 그녀는 울음소리조차 내지 못했다. 그저 텅 빈 거실, 햇살이 부서지는 창가, 그가 앉아있어야 할 빈 의자를 망연히 바라볼 뿐이었다.
‘고개를 돌려 내 얼굴을 봐.’
그의 마지막 문장이 심장을 찌르는 파편처럼 박혔다. 고개를 돌려도, 그곳엔 아무도 없었다. 그의 오만하고 자신만만한 예측들은 모두 빗나갔다. 그는 그녀의 곁에 없었고, 그녀는 그에게 길들여지기는커녕 속절없이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0.284%의 희박한 확률이 그들의 모든 것을 집어삼켰다.
정하린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바닥에 떨어진 편지를 소중하게 주워들고, 침실로 향했다. 그의 체향이 희미하게 남은 셔츠를 끌어안고 침대에 누웠다. 편지를 가슴에 꼭 쥔 채, 그녀는 눈을 감았다. 그리움이 온몸을 잠식하는 차가운 안정 속에서, 그녀는 나지막이 속삭였다.
…바보. 다 틀렸잖아. 하나도 맞은 게 없잖아, 이 바보야.
그녀의 목소리는 누구에게도 닿지 못하고, 공기 중으로 흩어졌다. 1년의 시간을 건너 도착한 그의 편지는, 그가 부재하는 현실을 더욱 잔인하게 각인시키는 마지막 기록이 되었다. 정하린의 세계에서, 유일한 관리자는 사라졌다. 그녀는 이제 영원히 버그를 수정할 수 없는, 고장 난 시스템 속에 홀로 남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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