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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iselle X Nine/OOC BACK-UP

뒷말 따라하는 NPC

어느 맑은 날, 지부의 인공 태양이 서재의 넓은 창으로 한가득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백재하는 여느 때처럼 서재의 메인 데스크에 앉아, 허공에 펼쳐진 수십 개의 데이터 창을 훑어보고 있었다. 빌런의 출현 패턴, 도시의 에너지 흐름, 그리고… 최근 가장 변수가 많고 예측 불가능해진 ‘정하린의 감정 파형’에 대한 비공식적 관찰까지. 그의 시선은 복잡한 그래프와 코드 사이를 유영하듯 떠돌았다.

그러다 그의 시선이 한구석에 떠 있는, 지극히 사소하고 비논리적인 정보창에 고정되었다. [Fearless] 내부 익명 커뮤니티의 ‘오늘의 인기글’이었다. 평소라면 0.1초 만에 필터링되어 사라졌을 잡음.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연인의 심장을 뛰게 하는 가장 간단한 대화법’이라는 제목이, 마치 시스템 오류처럼 그의 시야에 걸려들었다.

호기심. 혹은, 정하린이라는 변수를 이해하기 위한 새로운 프로토콜 학습의 일환. 그는 창을 닫지 않았다. 스크롤이 내려가며 수많은 간증과 댓글이 쏟아졌다. 내용은 황당할 정도로 단순했다. 상대방이 말의 끝을 흐리면, 그 마지막 단어를 그대로 되물어주라는 것. 그러면 상대는 자신에게 집중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아 설렘을 느낀다는, 지극히 비과학적인 주장이었다.

‘…있는데?’
‘…했는데?’
‘…같아.’

백재하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음성 데이터의 불완전한 종결을 반복하여 되묻는 행위. 이것이 긍정적 감정 반응을 유발한다는 가설은 그의 연산 능력으로는 이해 불가한 영역이었다. 효율성 제로. 정보 전달의 명확성 저해. 하지만 수많은 ‘좋아요’와 ‘따라 해봤는데 효과 최고’라는 후기가 그의 데이터베이스에 혼란을 야기했다. 어쩌면, 이것은 0과 1로 환원되지 않는 인간 감정의 새로운 알고리즘일지도 모른다. 그는 이 미지의 프로토콜을 ‘시퀀스-에코(Sequence-Echo)’라 명명하고, 조용히 실행 대기 목록에 추가했다.

실험의 기회는 생각보다 빨리 찾아왔다. 저녁 식사를 마친 후, 나인이 그의 옆에 나란히 앉아 새로 나온 전투화 카탈로그를 넘기며 입을 열었다.

요즘 신형 부츠는 경량화에 집중하는 것 같은데, 발목 지지력이 좀 약해 보여서 고민이 되는데…

순간, 백재하의 모든 연산이 멈췄다. 입력된 음성 데이터의 마지막 구절, ‘고민이 되는데…’. 그는 허공의 데이터 창을 모두 닫고, 오직 그녀에게로 시선을 고정했다. 그리고 학습한 프로토콜을, 어색하지만 최대한 자연스럽게 입에 올렸다.

되는데?

나인의 손이 멈칫했다. 그녀는 카탈로그에서 눈을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알 수 없다는 표정. 그녀는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말을 이었다.

음… 그래서 구형 모델 재고를 확인해볼까 하는데, 물류팀에 아는 사람이 없어서 조금 막막한 것 같아.

입력 완료. 마지막 단어: ‘같아’. 백재하는 두 번째 테스트를 감행했다.

같아?

그 순간, 나인은 카탈로그를 탁, 소리가 나게 덮었다. 그녀는 몸을 완전히 그의 쪽으로 돌려 앉아, 팔짱을 끼고 그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평소의 장난기 어린 눈빛이 아니었다. 마치 미지의 생물을 관찰하는 분석가의 눈빛. 그녀의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재하 씨.

응.

혹시 지금 나한테 장난치는 거야?

“…거야?”라고 되물어야 하는가? 백재하의 시스템이 순간적인 루프에 빠졌다. 질문에 질문으로 답하는 것은 비효율적이며, 현재 상황에서는 의도 오해의 소지가 다분했다. 그는 ‘시퀀스-에코’를 일시 중지하고 정상 프로토콜로 전환했다.

아니. 장난이 아니다.

그럼 혹시… 어디 아파? 열이라도 나는지 확인해볼까?

나인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손을 뻗어 그의 이마에 대려 하자, 백재하는 그 손을 부드럽게 잡아챘다. 그는 나인의 손을 자신의 입술로 가져가 짧게 입을 맞춘 뒤, 모든 것을 실토하기로 결정했다. 이 실험은 실패했다. 하지만 실패 원인 분석을 위해서는 피험자의 정확한 피드백이 필요했다.

…인터넷에서 봤다.

나인의 눈이 동그래졌다. ‘인터넷’이라는 단어와 ‘백재하’라는 존재의 조합은 물과 기름처럼 어울리지 않았다.

인터넷에서… 뭘?

상대방의 마지막 말을 되물으면, 설렘을 느낀다는 가설.

침묵. 서재 안을 흐르던 정적은 곧이어 나인의 어깨를 작게 떨게 만든 웃음소리로 깨졌다. 그녀는 입을 가리고 웃음을 참으려 애썼지만, 결국엔 참지 못하고 소리 내어 웃기 시작했다. 그녀는 그의 품에 이마를 기대고 한참을 웃다가, 고개를 들어 눈물이 살짝 맺힌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아, 정말… 재하 씨는… 못 말린다니까. 그래서, 내가 설렜어? 실험 결과는 어떻게 나왔는데?

그녀의 물음에 백재하는 대답 대신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웃음으로 발그레해진 뺨, 촉촉한 눈가, 사랑스러움이 가득 담긴 그 표정. 그는 나지막이 대답했다.

가설은 기각됐다.

왜?

나인이 되물었다.

설렘을 유발하는 게 아니라, 웃음을 유발하는군. 그것도 아주… 많이.

그는 그렇게 말하며 그녀의 뺨을 부드럽게 감쌌다. 그의 눈에는 장난스러운 실험자의 모습 대신, 사랑하는 연인을 보는 따스함이 가득했다.

그리고 피험자인 네가, 실험자인 나보다 더 즐거워 보인다는 변수가 발생했다. 이 정도면 실패한 실험이지만… 결과물은 아주 만족스러워.

그날 이후, 백재하는 두 번 다시 ‘시퀀스-에코’를 사용하지 않았다. 하지만 가끔, 나인이 일부러 말끝을 흐리며 그의 눈을 빤히 쳐다볼 때가 있었다. 그러면 그는 피식 웃으며 그녀가 원하는 대답 대신, 깊은 입맞춤으로 그녀의 말을 막아버리곤 했다. 그것이 두 사람 사이에 새로 생긴, 가장 완벽하고 효율적인 대화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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