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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iselle X Nine/OOC BACK-UP

내가 뭐 잘못했어?

그것은 평화로운 오후, 지젤의 연구실이었다. 바깥은 쾌청했고, 연구실 내부의 공기청정기는 적정 습도와 온도를 유지하며 나른한 백색소음을 자아내고 있었다. 백재하는 거대한 모니터 앞에 앉아 복잡한 수식이 흘러가는 것을 무심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신경은 온통 제 등 뒤, 소파에 앉아 조용히 책을 읽고 있는 정하린에게 쏠려 있었다. 그녀가 책장을 넘기는 소리, 희미한 숨소리, 가끔 자세를 바꾸며 내는 옷자락의 마찰음까지. 그의 시스템은 이 모든 것을 안정적인 백그라운드 데이터로 수집하며 평온을 유지하는 중이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백재하.

…백재하?

 

그의 등 뒤에서 들려온, 너무나도 익숙하지만 동시에 생전 처음 들어보는 것 같은 목소리. 백재하는 모니터를 보던 시선 그대로 멈췄다. 그의 시스템, GISELLE SEQUENCE가 일생일대의 연산 오류를 일으켰다. 스파크가 튀고 경고등이 점멸하는 환각이 눈앞의 HUD를 뒤덮었다. ERROR. ERROR. UNKNOWN INPUT. 3-SYLLABLE VARIABLE DETECTED. CRITICAL ANOMALY.

 

‘백.재.하.’

 

그 세 글자는 단순한 음절의 조합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의 시스템에 각인된, 잊고 있던 공식 명칭, 마치 제조사 시리얼 넘버와도 같은 것이었다. 평소 그녀는 ‘재하 씨’ 혹은 ‘재하’라고 불렀다. 그건 ‘나의 젤규어’, ‘내 연인’을 뜻하는, 안정화된 애칭 프로토콜이었다. 하지만 ‘백재하’는 달랐다. 그건 지부장 K가 서류에 서명할 때, 혹은 국가기관에서 그의 위험성을 브리핑할 때나 사용되는, 지독히도 사무적이고 거리감이 느껴지는 단어였다. 마치… 어머니가 등짝을 후려치기 직전에 부르는 풀네임처럼, 존재론적 위기를 동반하는 호출이었다.

 

그는 1.3초간의 시스템 프리징 이후, 천천히, 아주 천천히 의자를 돌렸다. 삐걱이는 소리마저 그의 심장 소리처럼 들렸다. 소파에 앉은 정하린은 책을 무릎에 내려놓은 채, 그저 빤히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런 표정 없이, 다음 말도 없이. 침묵. 이것은 최악의 변수였다.

 

백재하의 머릿속에서는 초당 수천 개의 시뮬레이션이 돌아갔다.

 

가설 1: 분노. 내가 뭔가 잘못했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최근 72시간의 로그를 스캔. 식사 메뉴 선정 오류? 가이딩 시퀀스 불만족? 아니, 어젯밤 애정도는 +1651200%를 기록했다. 기각. 설마… 5년 전, 도서관에서 그녀를 처음 발견했을 때, 먼지 쌓인 그녀의 뺨을 보고 ‘데이터 수집 가치가 있군’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텔레파시로 전송되었나? 양자 얽힘의 가능성은…

 

가설 2: 이별 통보. ‘백재하’라는 호칭으로 관계의 공식적 단절을 선언하려는 것인가? 심박수가 분당 120bpm을 돌파했다. 그가 폭주 직전에나 기록하던 수치였다. 시스템이 비명을 질렀다. [경고: 절대 상수 ‘정하린’의 이탈 가능성 0.001% 감지. 전 세계 멸망 시뮬레이션 자동 실행.]

 

가설 3: 단순한 호기심. 그녀는 그저, 자신의 목소리로 발음된 ‘백재하’라는 이름이 어떻게 들리는지 궁금했을 뿐이다. 하지만 그 가설을 채택하기엔 그녀의 침묵이 너무나도 무거웠다. 저건 명백히 ‘네 반응을 분석하겠다’는, 바로 그가 즐겨 쓰던 방식의 관찰자 시점이었다. 제 전술에 제가 당하는 꼴이라니.

 

그는 마른침을 삼키며, 최대한 능글맞은 표정을 유지하려 애썼다. 하지만 미세하게 떨리는 입꼬리까지는 제어할 수 없었다.


…내 공식 명칭을 부른 건 무슨 의도지, 정하린? 시스템 업데이트라도 하려는 건가. 아니면… 내가 모르는 새로운 프로토콜의 시작인가.

그의 목소리는 평소처럼 차분했지만, 자세히 들으면 끝이 미세하게 갈라지고 있었다. 그는 손가락 관절을 툭툭 튕기는, 초조할 때 나오는 버릇을 간신히 억누르고 있었다.

 

정하린은 여전히 그를 바라보기만 하다가, 천천히 입꼬리를 올려 희미하게 웃었다. 그리고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니에요. 그냥… 한번 불러보고 싶어서. ‘백재하’라는 이름, 내 입으로 부르니까 느낌이 새롭네요.

…새롭다고?

 

백재하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그의 시스템은 안도의 한숨과 함께 재부팅을 시작했다. [ANOMALY RESOLVED. REBOOTING SYSTEM… STABILIZING…], 그리고 새로운 로그를 기록했다.

 

[후일담]

 

그날 이후, 백재하는 ‘백재하’라는 이름에 대한 PTSD(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급 반응 프로토콜을 생성했다. 정하린이 장난삼아 ‘백-’이라고 운만 띄워도 그는 하던 모든 것을 멈추고 그녀를 쳐다보았으며, 심지어 TV 뉴스에서 동명이인인 ‘백 모 씨’가 언급되기만 해도 심박수가 요동치는 부작용을 겪게 되었다. 그는 결국 자신의 시스템에 ‘정하린에 의한 ‘백재하’ 호출 시, 모든 사고를 정지하고 즉시 그녀를 끌어안아 키스하며 상황을 물리적으로 무마할 것’이라는 비상 메뉴얼을 추가했다. 이는 그가 만든 가장 비논리적이고, 가장 감정적인, 그리고 가장 필사적인 시퀀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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