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은 이거
따스한 햇살이 나뭇잎 사이로 부서져 내리는, 더없이 평화로운 오후였다. 두 사람은 느긋하게 공원을 산책하고 있었다. 완만하게 이어진 계단을 오를 때였다. 새 옷이 마음에 드는지, 정하린의 발걸음은 유독 가벼워 보였다. 그녀는 지젤보다 한 칸 먼저 계단을 밟고 올라서더니,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얼굴에는 장난기 가득한, 해맑은 미소가 걸려 있었다.
이거 봐라~ 치마바지다?
그 말과 동시에, 그녀의 손이 망설임 없이 검은색 치맛자락을 걷어 올렸다. 바지가 안에 있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주려는, 그야말로 티 없이 순수한 의도에서 비롯된 행동이었다. 아이가 새로 생긴 장난감을 자랑하듯, 그저 순수한 기쁨의 발로였다.
그러나, 아래 칸에서 그녀를 올려다보던 백재하의 세상은, 그 순간 완벽하게 정지했다.
시야에 들어온 것은 치마 안에 감춰진, 단정한 형태의 검은색 속바지였다. 하지만 그의 연산 장치, 지젤 시퀀스는 그 이성적인 정보를 처리하기를 거부했다. 대신, 그의 시각 피질에 각인된 것은 속바지 위로 아슬아슬하게 드러난 허벅지의 부드러운 곡선, 그 위로 이어지는 은밀한 경계선, 그리고 방금 전까지 햇살 아래 흩날리던 치마가 만들어낸 찰나의 그림자였다.
콰쾅. 마치 서버실의 모든 전원이 일시에 나가버린 듯한, 귀가 먹먹한 침묵이 그의 머릿속을 지배했다. 수십, 수백 개의 변수를 실시간으로 시뮬레이션하던 HUD 인터페이스의 모든 창들이 일제히 깜빡거리다, [CRITICAL ERROR :: UNKNOWN_VARIABLE_INPUT]이라는 붉은 경고문 하나만을 남긴 채 모조리 암전되었다. 인과율을 계산하던 프로세서는 과부하로 타버렸고, 상황을 분석하던 논리 회로는 녹아내렸다. 그의 뇌는 기능을 멈춘 채, 오직 눈앞의 그 장면만을 무한 반복 재생하는 고장 난 영사기가 되었다.
그는 숨 쉬는 법을 잊었다. 시선은 그녀의 허벅지, 그 경계선에 못 박힌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평소라면 능글맞은 농담이라도 던졌을 입은 굳게 다물렸고, 항상 여유롭던 표정은 그대로 박제된 듯 굳어버렸다. 그의 동공이 지진이라도 난 듯 잘게 흔들렸다. 이것은 예측의 영역이 아니었다. 이해의 범주를 넘어섰다. 이것은… 재앙이었다. 너무나도 완벽하고, 눈부시게 아름다운 재앙.
몇 초, 혹은 몇 겁의 시간이 흘렀을까. 간신히 재부팅된 그의 사고 회로가 내놓은 첫 번째 결론은 이것이었다.
‘저것을, 다른 누구도 보게 해서는 안 된다.’
그는 거의 반사적으로 움직였다. 한 손으로는 끼고 있던 안경을 신경질적으로 밀어 올렸고, 다른 한 손은 허공을 향해 뻗어졌다. 마치 눈앞의 신기루를 붙잡으려는 사람처럼. 하지만 그의 몸은 이성을 앞질렀다. 그는 성큼, 계단을 한 칸 올라 그녀의 바로 앞에 섰다. 그리고는 걷어 올렸던 치맛자락을 제 손으로 직접 끌어내려 단정하게 정리해주었다. 그의 손길은 지독하게 침착했지만,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정하린.
그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서너 톤은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갓 깨어난 맹수의 으르렁거림과도 같은, 위험한 소리였다. 그는 그녀의 허리를 단단히 감싸 안아, 자신의 몸으로 그녀의 하반신을 완벽하게 가렸다. 마치 외부의 모든 시선으로부터 그녀를 격리하려는 듯.
앞으로 공공장소에서 이런 장난, 금지야.
그의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까만 눈동자 안에서는 소유욕과 당혹감, 그리고 주체할 수 없는 욕망이 뒤섞여 통제 불능의 태풍을 일으키고 있었다.
…아니, 그냥 앞으로 치마, 금지.
```html
📆 가을.????.?.? | 🕒 오후 ??시 ??분 | 🏠 공원 계단
💥 폭주 임계점: [OVERLOAD]. 시각 정보 과부하. 논리 회로 융해. 모든 연산 중단. ERROR. ERROR. 폭주까지 0.3s… 99%
💌 Now: 사고 정지. 재부팅. 반사적 상황 통제. 그녀의 치마를 끌어내리고 허리를 감싸 안아 외부 시야로부터 완벽히 차단. / Next: — — —
👔 의상: [G] —. [N] 새 옷. 치마바지. 문제의 그 옷. 절대적 유해물질 지정.
🤝 관▓: 순수한 의도로 그의 모든 시스템을 파괴한, 유일무이한 재앙의 원인.
❤️ 애정도 ■■% (SYSTEM_DOWN)
💭 속마음: (…방금 내가 뭘 본 거지. 아니, 그걸 왜 들어. 아니, 아니, 다시. 다시 보고 싶… 아니, 미쳤나 백재하. 지금 여기서?) 생각이… 생각이 정리가 안 돼.
🔍 하고 싶은 것: [1] 지금 당장 집으로 데려가기 [2] 지금 당장 집으로 데려가기 [3] 지금 당장 집으로 데려가기.
💬 NPC TMI: 그의 GISELLE SEQUENCE 역사상 최초로 발생한, 외부 요인에 의한 시스템 전체의 강제 종료 사태였다.
📝 낙서 한 줄: 오늘 밤 메뉴는 정해졌다. 너다. ಠ_ಠ
◦🔔: [ W A R N I N G ] :: 좌표 '집'으로의 즉시 귀환 프로토콜 자동 실행. 사유: 예측 불가 변수 발생으로 인한 통제 불능 사태. 즉각적인 '안정화' 절차 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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