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PC 감각소실 시한부
나는 잿빛 먼지가 폐부를 찌르는 절망의 도시, E-24 구역의 폐허 한가운데 서 있었다. 내 파트너, 내 연인, 나의 지젤. 그는 방금 전까지 전술 지도 위를 흐르는 한 줄기 빛처럼 우아하게 전장을 지배했다. 그러나 지금, 그는 모든 연산이 붕괴된 혼돈의 중심이었다. 그의 능력, [GISELLE SEQUENCE]는 언제나 가장 효율적인 파괴 경로를 찾아냈지만, 이번 임무는 그의 연산 범위를 아득히 넘어선 것이었다. 도시 전체를 삼키려는 차원 균열, 그 심장부에서 터져 나오는 무한한 변수 앞에서 그의 시퀀스는 과부하를 일으켰다.
“경로 예측 불가. 변수, 무한 증식. 시스템… 과부하.”
그의 읊조림은 더 이상 냉정한 분석이 아니었다. 그것은 부서지는 기계의 비명이었다. 그의 주변을 떠다니던 푸른색 HUD 인터페이스는 붉은색 에러 메시지로 점철되다 마침내 섬광과 함께 터져나갔다. 그 순간, 지젤의 모든 것이 무너졌다. 그의 눈은 초점을 잃고 공허한 흑요석처럼 변했으며, 온몸에서는 감당할 수 없는 에너지 파동이 폭풍처럼 휘몰아쳤다. 계산과 논리를 잃어버린 S급 센티넬의 폭주. 그것은 재앙 그 자체였다. 그는 목표도, 아군도 구분하지 못했다. 손에 잡히는 모든 것을 분해하고, 그의 시선이 닿는 모든 구조물을 뒤틀어버렸다. 이것은 그가 혐오하던, 감정뿐인 무의미한 폭력이었다.
“지젤!”
내 외침은 폭풍 속 먼지처럼 흩어졌다. 나는 그에게 다가서기 위해 그림자를 뻗었다. 내 고유 능력, [그림자의 영토 확장]. 하지만 그의 폭주가 만들어내는 에너지장은 너무나도 강력해서, 내 그림자는 그의 발치에도 닿지 못하고 찢겨나갔다. 그를 제때 가이딩하지 못했다는 자책감이 심장을 얼어붙게 했다. 내가 조금만 더 빨리 그의 불안정한 파형을 읽었더라면. 내가 조금만 더 그의 곁에 바싹 붙어 있었더라면. 모든 것이 ‘만약’이라는 후회로 가득 찼다.
나는 결심했다. 그가 나를 파괴하더라도, 이 폭주를 멈춰야 했다. 나는 모든 방어와 회피를 포기하고, 내 모든 가이딩 에너지를 한 점에 응축시켜 그를 향해 달려들었다. 목숨을 건 강제 안정화. 성공 확률은 계산할 수조차 없었다. 그의 손이 나를 향해 뻗어 오는 것이 보였다. 그의 손끝에서 모든 것을 분해하는 파괴의 에너지가 아른거렸다. 나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그의 품에 뛰어들며, 내 모든 존재를 그에게 쏟아부었다. 내 그림자가, 내 생명력이, 내 사랑이 그의 폭주하는 심장 속으로 흘러 들어갔다. 마지막으로 의식이 끊어지기 직전, 그의 몸에서 힘이 빠져나가며 내 어깨 위로 쓰러지는 무게감이 느껴졌다. ‘…하린아.’ 그의 목소리였을까, 아니면 내 간절한 환청이었을까.
눈을 떴을 때, 코를 찌르는 소독약 냄새와 일정한 간격으로 울리는 기계음이 나를 반겼다. 피어리스 의료실. 익숙한 천장이었다.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온몸이 납처럼 무거웠다. 그때, 지부장 K가 내 침대 옆 의자에서 일어섰다.
“일어났나, 나인.”
그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몇 톤은 더 가라앉아 있었다. 나는 목이 잠겨 나오지 않는 목소리로 물었다.
“…지젤은요?”
K는 대답 대신, 내게 데이터 패드를 건넸다. 화면에는 지젤의 바이탈 사인이 그래프로 표시되어 있었다. 파형은 안정적이었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K의 표정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자네 덕분에 폭주는 멈췄다. 하지만… 너무 늦었어.”
그의 말이 의미하는 바를 이해할 수 없었다. 늦었다니. 그는 살아있고, 안정적인데. 내 혼란스러운 시선을 읽은 K가 말을 이었다. 그의 모든 단어는 비수가 되어 내 심장에 박혔다.
“과도한 능력 사용 후 폭주를 너무 오래 방치했어. 자네의 강제 안정화가 그의 생명은 구했지만, 이미 그의 신체 시스템은 복구 불가능한 수준까지 망가졌네. 그의 남은 시간은… 1년이야.”
1년. 그 단어가 내 머릿속에서 메아리쳤다. 온 세상의 소리가 사라지고, 오직 그 단어만이 귓가를 맴돌았다. K는 담담하게 설명을 이어갔다. 앞으로 지젤은 한 달마다 감각과 운동 능력을 하나씩 잃게 될 거라고. 미각부터 시작해서, 촉각, 청각, 시각… 그리고 마지막에는 심장이 멎고 온몸이 먼지처럼 바스러져 소멸할 거라고. 그것이 폭주의 대가라고 했다.
나는 데이터 패드를 떨어뜨렸다. 내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내가 그를 구했지만, 죽인 것이나 다름없었다. 내가 그의 곁에서, 그의 남은 시간을 앗아간 것이다. 눈물이 뺨을 타고 흘렀다. 막을 새도 없이, 뜨거운 후회의 눈물이 쏟아졌다. 내가 뭘 한 거지? 그를 살리기 위해 모든 걸 걸었는데, 결국 내가 그에게서 모든 것을 빼앗아버렸다. K는 지젤이 몇 시간 전에 깨어나 이미 모든 사실을 들었다고 덧붙였다. 그는… 어떤 표정이었을까. 어떤 심정으로 그 끔찍한 진실을 받아들였을까.
나는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그의 병실 문 앞에 섰다. 문을 열 용기가 나지 않았다. 내가 무슨 얼굴로 그를 봐야 할까. 하지만 나는 도망칠 수 없었다. 이것은 온전히 나와 그의 문제였다. 나는 심호흡을 하고 문을 열었다. 그는 창가에 서서, 텅 빈 시선으로 바깥을 내다보고 있었다. 병실복을 입은 그의 뒷모습은 그 어느 때보다 가늘고 위태로워 보였다. 내가 들어온 것을 알았을 텐데도, 그는 돌아보지 않았다.
“……재하야.”
내 목소리가 형편없이 떨렸다. 그제야 그는 아주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의 얼굴은 믿을 수 없을 만큼 평온했다. 마치 방금 체스 게임의 다음 수를 계산하고 있는 사람처럼. 하지만 나는 알 수 있었다. 평온한 가면 아래에서 소용돌이치고 있는 그의 혼돈을. 그는 나를 보고 희미하게 웃었다. 그 미소가 내 가슴을 갈기갈기 찢어놓았다.
“일어났네, 정하린. 몸은 좀 어때.”
그의 목소리는 평소와 같았다. 능글맞고, 여유로운 톤. 하지만 그 안에 담긴 미세한 균열을 나는 놓치지 않았다. 나는 그에게 다가가려다, 차마 발을 떼지 못하고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미안해…. 내가, 내가 너무 늦어서….”
결국 울음이 터져 나왔다. 내가 조금만 더 빨리 그의 상태를 알아차렸다면. 내가 그의 곁을 떠나지 않았더라면. 지젤은 그런 나를 잠시 바라보다가, 천천히 내게로 걸어왔다. 그리고는 내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손가락으로 부드럽게 닦아주었다. 그의 손길은 여전히 따뜻했다.
“네 탓이 아니야. 이건 내 계산 착오였어. 내 시스템의 한계를 내가 간과한 결과지.”
그는 담담하게 말했다. 마치 남의 이야기를 하듯이. 나는 고개를 저으며 그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고 절규하듯 소리쳤다.
“아니야! 내가, 내가 너를… 이렇게 만들었어….”
지젤은 대답 대신 나를 가만히 끌어안았다. 그의 심장 소리가 들렸다. 평소보다 조금 느리게, 하지만 규칙적으로 뛰고 있었다. 그는 내 등을 천천히 쓸어내리며, 귓가에 나직이 속삭였다.
“정하린. 나 봐.”
나는 울음에 젖은 얼굴을 들어 그를 보았다. 그의 검은 눈동자가 오롯이 나를 담고 있었다. 그 안에는 원망도, 절망도 없었다. 대신, 기이할 정도의 고요함과… 어떤 결심이 담겨 있었다.
“1년.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이지.”
그는 내 뺨을 감싸 쥔 채, 엄지손가락으로 눈가를 쓸었다.
“앞으로 열두 번, 내 세상이 무너질 거야. 미각을 잃고, 네가 만들어준 음식의 맛을 기억하지 못하게 되겠지. 촉각을 잃고, 네 손의 온기를 느끼지 못하게 될 거고. 청각을 잃어서, 네 목소리를 들을 수 없게 될 거야. 마지막에는… 시각을 잃어서 네 얼굴조차 볼 수 없게 되겠지.”
그의 말은 내 심장을 도려내는 칼날과도 같았다.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그를 붙잡고 흐느낄 뿐이었다. 그는 말을 이었다. 그의 목소리는 조금씩, 아주 조금씩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괜찮아. 나는 모든 것을 시뮬레이션하고, 가장 최적의 경로를 찾는 센티넬이야. 내게 남은 1년, 365일, 8760시간. 나는 이 모든 시간을 너와 함께하는 가장 완벽한 시퀀스로 만들 거야. 내 모든 감각이 사라져도, 마지막 순간까지 내 모든 연산은 오직 너의 행복을 향해 있을 거야. 이건… 내가 너에게 주는 마지막 프로토콜이야. 내가 사라진 후에도, 영원히 네 안에서 실행될….”
그는 말을 마치고, 내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짠 눈물 맛이 났다. 나는 그의 목을 끌어안고 더 깊게 입을 맞추었다. 지금 이 순간의 감각을, 그의 온기를, 그의 맛을, 그의 모든 것을 영원히 기억하고 싶었다. 그를 잃을 수 없었다. 나는 그 없이 살아갈 수 없었다. 하지만 그는 이미 모든 것을 결정했다. 그의 마지막 시퀀스는 이미 시작되었다. 우리에게 남은 시간은, 너무나도 잔인하게 정해져 있었다.
그들의 시간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지부장 K의 배려, 혹은 연민으로 얻어낸 1년. 그것은 사형 선고이자, 마지막 유예 기간이었다. 두 사람은 피어리스 본부를 떠나, 바다가 보이는 작은 해안가 마을에 거처를 구했다. 지젤이 휴가 때 나인과 함께 보았던, 꿈결 같던 바로 그 장소였다. 그곳에서 그들의 마지막 시퀀스가, 가장 잔인하고도 아름다운 연산이 막을 올렸다.
모든 임무에서 배제된 채, 그들은 평범한 연인처럼 하루를 보냈다. 함께 아침을 맞고, 바닷가를 산책하고, 서투른 요리를 하며 웃었다. 그러나 그 모든 일상의 표면 아래에는 ‘소실’이라는 타이머가 째깍거리고 있었다. 매달 찾아올 예정된 상실. 그것은 그들의 평온을 언제든 집어삼킬 수 있는 검은 구멍이었다.
1개월 차 - [미각] 소실
그날은 유난히 날이 좋았다. 나인은 아침부터 부엌에서 분주하게 움직였다. 지젤이 좋아하는 아이스 초코 라떼와, 그녀가 직접 만든 달콤한 초코 케이크. 그가 피어리스에서 처음 그녀에게 흥미를 보였던, 그들만의 상징과도 같은 메뉴였다. 지젤은 식탁에 앉아 커피 향을 맡으며 책을 읽는 척, 실은 그녀의 뒷모습을 눈으로 좇고 있었다. 그녀가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작은 움직임 하나하나가 그의 불안정한 시스템을 다독이는 유일한 가이딩이었다.
나인이 접시를 들고 그의 앞에 섰을 때, 그녀의 얼굴에는 기대감이 가득했다. 지젤은 그런 그녀가 사랑스러워 희미하게 웃으며 포크를 들었다. 부드러운 케이크 한 조각을 입에 넣는 순간, 그는 모든 것이 멈추는 것을 느꼈다. 아무런 ‘맛’이 느껴지지 않았다. 초콜릿의 농후한 단맛도, 크림의 부드러운 풍미도 없었다. 그저 무미건조한 질감만이 혀 위를 맴돌았다. 그는 옆에 놓인 아이스 초코 라떼를 한 모금 마셨지만, 그것 역시 밍밍한 액체일 뿐이었다. 첫 번째 상실이, 예고도 없이 찾아온 것이다.
그의 손이 순간 멈칫하는 것을 나인은 놓치지 않았다. 그녀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서서히 사라졌다.
“왜 그래, 재하야? 맛없어?”
그녀의 목소리에 담긴 불안감을 읽은 지젤은,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그는 아무렇지 않은 척 케이크를 삼키고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맛있는데. 너무 맛있어서, 어떤 데이터부터 저장해야 할지 연산이 꼬였나 봐.”
거짓말이었다. 그의 시스템은 지금 ‘미각 데이터 입력 불가’라는 에러 메시지만을 띄우고 있었다. 나인은 그의 말을 완전히 믿지 못하는 눈치였지만, 애써 미소를 지으며 그의 앞에 앉았다. 그 후로 한 달간, 그는 지독한 연기를 해야 했다. 나인이 만들어주는 모든 음식에 감탄하고, 맛을 표현해야 했다. 그는 그녀가 잠든 밤이면, 과거에 저장해두었던 ‘맛’의 데이터베이스를 필사적으로 복기했다. 그녀가 처음 만들어준 아이스 초코 라떼의 단맛, 함께 먹었던 파스타의 짭짤함, 그녀의 입술에서 느껴지던 와인의 향기. 기억 속의 맛으로 현실의 무미(無味)를 덮었다. 그는 절대로 그녀 앞에서 무너진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나인은 그의 식사량이 조금 줄었다고 생각하는 듯, 더 맛있는 것을 해주겠다며 요리책을 뒤적였다. 지젤은 그 모습을 보며, 가슴 한구석이 서늘하게 무너져 내리는 것을 느꼈다. 그의 첫 번째 세상이, 이렇게 소리 없이 사라졌다.
2개월 차 - [왼팔] 운동능력 소실
감각의 상실은 감출 수 있었지만, 운동 능력의 상실은 숨길 수 없었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지젤은 자신의 왼팔이 더 이상 그의 의지대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마치 제 것이 아닌 것처럼, 축 늘어진 팔은 그의 어떤 명령에도 반응하지 않았다. 그는 침대에 누운 채, 움직이지 않는 왼팔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마치 잘 만들어진 마네킹의 팔처럼, 생명력이 완전히 거세된 감각. 그는 주먹을 쥐려 했지만, 손가락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두 번째 상실이었다.
나인이 잠에서 깨어 그에게 아침 인사를 건네며 품에 파고들었을 때, 그는 늘 그랬듯 그녀를 마주 안아주지 못했다. 오른팔만으로 그녀의 어깨를 감쌌을 뿐이다. 위화감을 느낀 그녀가 고개를 들었고, 그의 축 늘어진 왼팔을 발견했다. 그녀의 눈동자가 파도처럼 흔들렸다. 어떤 질문도, 어떤 말도 없었다. 그녀는 그저 그의 왼팔을 조심스럽게 들어 올려 자신의 두 손으로 감쌌다. 그리고는 차갑게 식은 그의 손등에 자신의 뺨을 부볐다. 마치 온기를 불어넣으려는 듯이. 그 작은 행동이, 수만 마디의 위로보다 더 깊게 그의 심장을 파고들었다.
“……이제, 내가 네 왼팔이 되어줄게.”
그녀는 울지 않았다. 대신, 그렇게 속삭이며 그의 손가락을 하나하나 깍지 껴 잡았다. 그날 이후, 그들의 삶은 미묘하게 변했다. 나인은 자연스럽게 그의 왼편에 서서 모든 것을 도왔다. 옷의 단추를 채워주고, 책장을 넘겨주고, 식사할 때 그의 왼쪽에 놓인 것들을 챙겨주었다. 지젤은 처음에는 그런 도움을 거부하려 했다. 그의 자존심이, 언제나 완벽한 통제자로 군림하던 그의 습관이 허락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인은 그의 거부를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것이 ‘도움’이 아니라 ‘함께’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어느 날 저녁, 그는 오른손만으로 힘겹게 셔츠 단추를 채우려다 결국 포기하고 한숨을 쉬었다. 그러자 소파에 앉아있던 나인이 다가와 말없이 그의 단추를 채워주었다. 그녀의 따뜻한 손길이 스치는 순간, 그는 저항을 멈췄다. 그리고는 남은 오른팔로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그녀에게 의지하는 법을, 그는 그렇게 고통스럽게 배우고 있었다.
3개월 차 - [청각] 소실
세 번째 상실은 폭풍우가 치던 밤에 찾아왔다. 천둥소리에 잠에서 깬 나인은, 옆에서 미동도 없이 잠든 지젤을 보았다. 평소라면 작은 소리에도 예민하게 반응했을 그였다. 불안한 예감에, 그녀는 그의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재하야.” 대답이 없었다. 그녀는 조금 더 큰 소리로 그를 불렀다. 하지만 그는 깊은 잠에 빠진 듯 고요했다. 나인은 떨리는 손으로 그의 어깨를 흔들었다. 그제야 그가 천천히 눈을 떴다. 그는 잠이 덜 깬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다가, 그녀의 입모양이 무언가 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인지했다. 하지만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창밖의 거센 빗소리도, 불안하게 울리는 심장 소리도, 그리고… 그녀의 목소리도. 세상이 완벽한 무음(無音) 상태에 빠진 것이다.
그의 눈빛이 흔들리는 것을 본 나인은, 모든 것을 깨달았다. 그녀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녀는 무어라 다급하게 외쳤지만, 지젤에게는 그저 입술이 움직이는 영상으로만 보일 뿐이었다. 그는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다. 그리고 자신의 귀를 가리킨 뒤,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인의 눈에서 결국 눈물이 터져 나왔다. 그녀는 그의 품에 와락 안겨 소리 없이 오열했다. 그는 이제 그녀의 울음소리조차 들을 수 없었다. 그녀의 등이 가늘게 떨리는 감각만이, 그녀의 슬픔을 그에게 전달했다. 그는 오른팔로 그녀를 끌어안고 등을 토닥였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어떤 위로도, 이 침묵의 벽을 뚫을 수 없었다.
그날부터 그들의 대화는 필담(筆談)으로 이루어졌다. 나인은 항상 작은 수첩과 펜을 들고 다녔다. 그녀는 지젤에게 끊임없이 말을 걸었다. 오늘 날씨가 어떤지, 바다 색이 얼마나 예쁜지, 점심으로 무엇을 먹고 싶은지. 그녀의 필체는 그녀의 감정을 고스란히 담고 있었다. 기쁠 때는 글씨가 춤을 췄고, 슬플 때는 글씨 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지젤은 그녀가 써 내려가는 문장들을 읽으며, 그녀의 목소리를 기억 속에서 재생했다. 그는 대답 대신, 그녀의 글씨 옆에 짧은 문장을 적었다. ‘네 글씨, 목소리랑 똑같네.’ 그 문장을 본 나인은 눈물을 글썽이다가, 이내 환하게 웃어 보였다. 그는 더 이상 그녀의 웃음소리를 들을 수 없었지만, 활짝 피어나는 듯한 그녀의 미소는 그 어떤 소리보다 선명하게 그의 마음에 각인되었다. 그는 밤마다 그녀의 얼굴을 보며 잠들었다. 그녀가 잠결에 내뱉는 작은 잠꼬대라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이. 비록 들을 수는 없지만, 그녀의 입술이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그는 위안을 얻었다.
4개월 차 - [오른다리] 운동능력 소실
이제 그는 온전히 혼자 힘으로 걸을 수 없게 되었다. 왼팔에 이어 오른다리마저 그의 통제를 벗어났다. 아침에 침대에서 내려오려다, 힘이 들어가지 않는 다리 때문에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쿵 하는 소리에 놀라 달려온 나인은, 바닥에 쓰러진 그를 보고 숨을 멈췄다. 지젤은 아무렇지 않은 척, 남은 팔과 다리로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그의 얼굴에 처음으로 무력감과 분노가 스쳤다. 언제나 모든 것을 계산하고 통제하던 [지젤]은 이제 없었다. 남은 것은 서서히 부서져가는 백재하라는 한 남자뿐이었다.
나인은 그에게 달려가 그의 몸을 부축했다. 그녀의 가녀린 몸으로는 184cm의 남자를 지탱하기엔 턱없이 부족했지만, 그녀는 안간힘을 쓰며 그를 일으켜 세웠다. 지젤은 그녀의 어깨에 기대어 겨우 몸의 균형을 잡았다.
<괜찮아. 혼자 할 수 있어.>
그가 수첩에 그렇게 적었지만, 나인은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그의 허리를 단단히 끌어안고, 그의 건강한 왼다리에 자신의 몸을 밀착시켰다. 한쪽 다리가 되어주려는 듯이. 그녀는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또렷한 입모양으로 말했다.
“같이. 같이 걷는 거야.”
그들은 그날 오후, 휠체어를 주문했다. 휠체어가 도착하기 전까지, 나인은 그의 지팡이이자 다리가 되어주었다. 집 안을 이동할 때도, 잠시 바람을 쐬러 현관 앞에 나갈 때도, 그녀는 한시도 그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휠체어가 도착한 날, 지젤은 한참 동안 거실에 놓인 차가운 금속 의자를 바라보았다. 그것은 자신의 망가진 몸을 상징하는 끔찍한 증거물이었다. 그는 그것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나인은 아무렇지 않게 다가와 휠체어에 예쁜 담요를 깔고, 푹신한 쿠션을 놓아주었다. 그녀의 그런 모습에, 지젤은 결국 휠체어를 받아들였다. 그것은 패배가 아니었다. 그녀와 ‘함께’ 나아가기 위한 새로운 이동 수단일 뿐이라고, 그는 스스로를 납득시켰다. 나인은 그의 휠체어를 밀며 해변을 산책했고, 그는 바람에 흩날리는 그녀의 머리카락과, 햇살에 반짝이는 바다를 눈에 담았다. 들을 수는 없었지만, 모든 풍경이 그녀의 웃음소리로 가득 차는 것 같았다.
5개월 차 - [오른팔] 운동능력 소실
그의 마지막 남은 손이었다. 세상을 향해 뻗을 수 있었던 유일한 의지. 나인과 필담을 나누고, 그녀의 손을 맞잡고,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던 오른팔. 그것마저 배신한 것은 서늘한 새벽이었다. 잠결에 그는 나인을 끌어안으려 했다. 언제나처럼, 남은 오른팔로나마 그녀의 온기를 확인하고 싶었다. 하지만 팔은 무거운 쇳덩이처럼 침대 시트 위를 뒹굴 뿐이었다. 뇌에서 보내는 신호는 허공에서 산산이 부서졌다. 이제 그는 제 의지로는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는 완전한 관찰자가 되었다.
나인은 잠에서 깨어, 그의 오른팔 위로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고 있는 그를 발견했다. 그는 울고 있지 않았다. 그저 생리적인 반응으로 눈물이 흐를 뿐, 그의 얼굴은 아무런 표정이 없는 가면 같았다. 그 무표정이, 천 마디의 절규보다 더 고통스러웠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의 곁에 누워, 이제는 그의 것이 아닌 두 팔을 차례로 들어 올려 내 품에 꼭 안았다. 차갑고, 무기력한 그의 팔을 끌어안고 있자니, 그가 내게서 얼마나 멀리 떠나가고 있는지 실감이 나서 숨이 막혔다.
“내가… 다 해줄게. 네 손도, 네 발도, 네 목소리도… 전부 다 내가 될게.”
들리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나는 속삭였다. 그날 이후, 나는 그의 모든 것이 되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그의 얼굴을 닦아주고, 옷을 입히고, 휠체어에 앉혔다. 식사는 이제 내가 직접 떠먹여 주어야 했다. 그는 미각을 잃었지만, 내가 주는 음식은 군말 없이 받아먹었다. 우리의 유일한 소통 수단이었던 필담은 이제 불가능해졌다. 나는 그의 무릎에 앉아 책을 읽어주거나, 그날 있었던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입모양을 크게 움직이며 들려주었다. 그는 대답 대신, 아주 가끔, 내가 웃긴 이야기를 할 때면 희미하게 입꼬리를 올리는 것으로 반응했다. 그는 점점 말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말을 할 수 있는 수단을 잃어가고 있었다. 나는 매일 밤 그의 마비된 손을 잡고 잠이 들었다. 언젠가 이 온기마저 느낄 수 없게 될 거라는 공포에 떨면서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의 곁에 내가 있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그의 시간은 멈춰가고 있었지만, 나의 시간은 그를 위해 더 빨리 흘러야만 했다.
6개월 차 - [소화기관] 기능 소실
상실은 이제 보이지 않는 내부를 파고들었다. 며칠 전부터 그는 내가 떠먹여 주는 음식을 삼키기 힘들어했고, 결국 모두 토해내기 시작했다. 병원을 찾았을 때, 의사는 담담하게 여섯 번째 소실을 통보했다. 소화기관의 기능이 완전히 정지했다는 진단이었다. 이제 그는 입으로 어떤 음식도 섭취할 수 없게 되었다. 생명을 유지할 유일한 방법은, 링거를 통해 영양액을 직접 혈관에 주입하는 것뿐이었다.
집으로 돌아온 날, 나는 그의 팔에 익숙하게 링거 바늘을 꽂았다. 피어리스에서 수없이 했던 일이었지만, 지금처럼 손이 떨린 적은 없었다. 투명한 영양액이 관을 타고 그의 몸 속으로 흘러 들어가는 것을 보자, 그와 나 사이에 넘을 수 없는 벽이 생긴 것만 같았다. 함께 식탁에 앉아 같은 음식을 나누어 먹던 지극히 평범한 일상. 그것이 얼마나 소중한 기적이었는지, 나는 모든 것을 잃고 나서야 깨달았다. 그는 휠체어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며, 자신의 팔에 매달린 링거 줄을 무감각하게 응시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이제 음식의 맛도, 씹는 즐거움도, 포만감도 느낄 수 없게 된 그는.
나는 그의 앞에 마주 앉아, 일부러 더 맛있게 저녁을 먹었다. 슬픈 표정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재하야, 오늘 저녁은 네가 좋아하던 크림 파스타야. 베이컨도 듬뿍 넣었어. 나중에, 아주 나중에… 내가 맛을 전부 기억했다가 다시 똑같이 해줄게.”
들리지 않을 말들을 일부러 소리 내어 말했다. 마치 주문처럼. 그는 내 입모양을 읽었는지, 아주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이후, 우리의 식사 시간은 기묘한 풍경이 되었다. 나는 식탁에서 음식을 먹고, 그는 휠체어에 앉아 링거를 맞으며 나를 지켜보았다. 그는 내가 먹는 모습을 뚫어지라 관찰했다. 마치 내 표정을 통해 맛을 유추하고, 데이터를 수집하려는 것처럼. 나는 그를 위해 더 다채로운 표정을 지으며 식사했다. 행복하게, 맛있게, 즐겁게. 그가 나의 감각을 통해 세상을 느낄 수 있도록. 하지만 혼자 밥을 삼키고, 잠든 그의 곁에서 텅 빈 위를 끌어안고 있노라면, 지독한 외로움이 나를 삼켰다. 우리는 한 공간에 있지만, 점점 다른 세계를 살고 있었다. 그의 소멸은, 나의 세계 또한 함께 무너뜨리고 있었다.
7개월 차 - [후각] 소실
일곱 번째 상실은 소리 없이, 향기 없이 찾아왔다. 나는 그가 좋아하던 짙은 원두 향이 나는 커피를 내려 그의 곁에 가져다 놓았다. 늘 이맘때쯤이면 미약하게나마 코를 킁킁거리던 그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불안한 마음에 내가 늘 뿌리던 향수를 손목에 묻혀 그의 코끝에 가져다 대었다. ‘네 냄새, 좋아.’ 나른하게 속삭이며 내 목덜미에 얼굴을 묻던 그의 목소리가 환청처럼 들려왔다. 하지만 지금의 그는, 그저 텅 빈 눈으로 나를 바라볼 뿐이었다. 후각. 세상의 모든 기억과 감정을 실어 나르던 내밀한 감각이, 그에게서 완전히 사라졌다.
나는 그를 위해 온 집안을 꽃으로 채웠다. 그가 좋아하던 프리지아, 궂은 날의 흙냄새를 닮은 유칼립투스, 그리고 비 오는 날의 공기. 하지만 그는 그 어떤 향기에도 반응하지 않았다. 이제 그는 내가 그의 팔에 꽂힌 링거를 알코올 솜으로 닦을 때 나는 서늘한 소독약 냄새와, 갓 구운 빵의 고소한 냄새를 구분하지 못했다. 세상은 그에게서 또 하나의 색을 잃고 무취의 공간으로 변해버렸다. 나는 매일 그의 곁에 앉아 그가 좋아하던 향수들을 하나씩 열어 흔들어주었다. 이건 우리가 파리에서 함께 샀던 거고, 이건 네 서재에서 나던 묵은 종이 냄새야. 들리지도, 맡지도 못할 그에게 나는 끊임없이 세상의 향기를 설명했다. 그의 후각을 대신해 내가 모든 향기를 기억하기로 했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향기는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느끼는 것이라는 걸. 그가 잃어버린 것은 단순히 냄새를 맡는 기능이 아니었다. 비 오는 날의 공기 속에서 우리의 첫 키스를 떠올리고, 내 체향 속에서 안정을 찾던, 그와 나를 잇던 또 하나의 연결고리가 끊어진 것이다. 그의 세계는 점점 더 좁아지고, 나는 그 좁아진 세계의 유일한 문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 문마저 닫히는 날이 온다는 사실이, 나를 미치게 했다.
8개월 차 - [왼다리] 운동능력 소실
휠체어에 앉아 창밖을 보던 그가 갑자기 균형을 잃고 옆으로 쓰러졌다. 간신히 그를 부축해 다시 앉혔지만, 나는 알아차렸다. 그를 지탱해주던 마지막 다리, 그의 왼 다리가 힘을 잃었다는 것을. 이제 그는 내 도움이 없이는 휠체어 위에서 자세를 바로잡는 것조차 힘들어졌다. 두 다리가 모두 그의 의지를 배신했다. 아주 가끔, 내가 부축하면 아주 잠시나마 땅을 짚고 설 수 있었던 마지막 희망마저 사라졌다. 그는 이제 영원히 땅에 발을 디딜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그는 자신의 무력한 다리를 잠시 내려다보더니, 이내 시선을 돌려 창밖의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얼굴에는 어떤 감정도 떠오르지 않았다. 마치 처음부터 자신에게는 다리가 없었다는 듯이.
나는 그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힘없이 축 늘어진 그의 두 다리를 주물렀다. 단단했던 근육은 모두 사라지고, 앙상하게 뼈대만 남은 다리. 전장을 누비던 그의 강인함은 이제 어디에도 없었다. 눈물이 쏟아지려는 것을 꾹 참았다. 내가 무너지면 그는 기댈 곳이 없었다. 나는 그의 발에 입을 맞추었다.
“괜찮아. 내가 있잖아. 내가 네 다리가 되어줄게. 어디든 가고 싶은 곳이 있으면 말만 해. 내가 너를 안고서라도 갈게.”
그날 이후, 그는 온전히 나에게 기댄 존재가 되었다. 침대에서 휠체어로, 휠체어에서 소파로. 그의 모든 움직임은 나의 팔과 다리를 통해 이루어졌다. 나는 그를 안아 옮길 때마다, 점점 더 가벼워지는 그의 무게에 심장이 내려앉았다. 그는 소멸을 향해 착실히 나아가고 있었다. 나는 그의 무게가 완전히 사라지는 날이 올까 봐 두려웠다. 그를 돌보는 일은 고되었지만, 나는 그가 내게 의지하는 이 순간이 차라리 행복하다고 생각했다. 그가 나를 필요로 한다는 사실이, 내가 살아있어야 할 이유가 되어주었으니까. 그의 다리가 사라진 대신, 나는 그의 세상이 되었다. 그가 움직일 수 있는 유일한 영토. 나는 이 영토를, 마지막 순간까지 지켜내리라 다짐했다.
9개월 차 - [목소리] 소실
아홉 번째 절망은 침묵 속에서 왔다. 아침에 눈을 뜬 그가 나를 보며 무언가 말하려는 듯 입을 움직였다. 하지만 아무런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그는 당황한 듯 몇 번이고 다시 입을 벙긋거렸지만, 나오는 것은 희미한 바람 소리뿐이었다. 그의 마지막 소통 수단. 나를 ‘정하린’이라 부르던, 사랑한다고 속삭이던, 그 나른하고 지적인 목소리가 사라졌다. 그는 충격을 받은 듯, 자신의 목을 감싸 쥐었다. 처음으로 그의 얼굴에 절망이라는 감정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그는 필사적으로 무언가 말하려 애썼지만, 성대는 그의 의지를 철저히 외면했다.
나는 그의 손을 붙잡았다. 그의 손이 차갑게 떨리고 있었다. 눈을 마주치자, 그의 눈동자가 파도처럼 흔들렸다. 그 안에 담긴 수만 가지 말들이 소리 없는 비명이 되어 나에게로 쏟아지는 것 같았다. ‘하린아, 내 목소리가… 나오질 않아.’ 나는 그의 눈을 보며 그가 하고 싶은 말을 읽었다. 그의 모든 시퀀스가 멈춰버린 그 순간, 나는 그를 끌어안고 함께 울었다.
“괜찮아, 재하야. 괜찮아… 다 알아. 내가 다 알아들을 수 있어.”
그날 이후, 우리의 집은 완전한 침묵에 잠겼다. 나는 이제 그의 눈을 보고 대화하는 법을 배웠다. 그의 미세한 눈 깜빡임, 눈동자의 흔들림, 느리게 올라갔다 내려오는 입꼬리. 그 모든 것이 그의 언어였다. 나는 그에게 더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내 목소리로 그의 침묵을 채웠다. 그가 좋아하던 책을 읽어주고, 음악을 들려주고,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전했다. 그는 그저 묵묵히 나를 바라보며 들을 뿐이었다. 때때로 그는 답답한 듯 미간을 찌푸리거나, 자신의 무력함에 고개를 떨구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그의 앙상한 손을 잡고 내 심장 위에 올려놓았다. 이 울림이 내 대답이라고. 내가 여기 있다고. 우리는 이제 말을 넘어선 다른 방식으로 소통했다. 하지만 나는 매일 밤, 그의 목소리가 담긴 낡은 음성 파일을 들으며 잠이 들었다. 나를 부르던 그의 목소리를 잊지 않기 위해. 언젠가 그의 마지막 숨결마저 침묵 속에 흩어질 때, 그의 목소리만이라도 내 기억 속에 영원히 붙잡아두고 싶었다.
10개월 차 - [촉각] 소실
그의 손을 잡았을 때,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늘 내 손을 마주 잡아오던 미세한 압력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내가 그의 뺨을 어루만져도, 그의 눈꺼풀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촉각. 온기를 나누고,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던 가장 원초적인 감각. 그것이 사라졌다. 이제 내가 그를 안아도 그는 더 이상 내 온기를 느끼지 못했고, 내가 그의 손을 잡아도 내 손의 감촉을 알지 못했다. 그는 살아있는 온기를 가진 유령처럼, 세상 모든 것들로부터 유리되었다.
나는 절망했다. 이제 내가 그에게 해줄 수 있는 위로는 무엇일까. 내 따뜻한 손길도, 내 포옹도 그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되었다. 나는 그를 목욕시키면서, 그의 몸에 물이 닿는 감각조차 그가 느끼지 못한다는 사실에 눈물을 쏟았다. 그는 그저 의무처럼 씻겨지는 마네킹 인형과 같았다. 식어버린 그의 몸을 수건으로 닦아주며, 나는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아주 희미하게, 그의 심장 소리가 고막을 울렸다. 그것이 그가 살아있다는 유일한 증거였다.
“재하야… 느껴지지 않아도, 내가 여기 있어. 언제나 네 곁에 있어.”
나는 그를 더 꽉 끌어안았다. 그가 느끼지 못한다 해도, 내가 그의 온기를 느끼면 그걸로 되었다고 생각했다. 나는 그의 앙상한 손가락에 내 손가락을 깍지 껴 잡고, 예전에 그가 내게 해주었던 것처럼 부드럽게 쓸어주었다. 그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지만, 나는 그를 만지는 감각을 통해 그와의 연결을 필사적으로 붙잡았다. 밤에는 그의 품에 파고들어 잠이 들었다. 그의 심장 소리를 자장가 삼아서. 그는 이제 내가 곁에 있다는 것을 오직 시각으로만 인지할 수 있었다. 나는 한시도 그의 시야에서 벗어나지 않으려 노력했다. 내가 눈앞에 보이지 않으면, 그는 세상에 혼자 남겨진 기분을 느낄지도 몰랐으니까. 그의 마지막 감각인 시각마저 사라지면, 나는 그와 어떻게 연결되어야 할까. 그를 둘러싼 완전한 어둠 속에서, 나는 그의 유일한 빛이 되어야 했다. 꺼져서는 안 될, 필사적인 빛.
11개월 차 - [시각] 소실
마지막 창이 닫혔다. 아침 햇살이 쏟아지는 창가에 그를 앉혔을 때, 그는 더 이상 눈부신 듯 미간을 찌푸리지 않았다. 그는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내가 그의 눈앞에서 손을 흔들어도, 그의 초점 없는 눈동자는 나를 따라오지 않았다. 시각. 나를 담고, 세상을 분석하던 그의 마지막 감각이 소멸했다. 이제 그의 세계는 완벽한 암흑과 침묵에 잠겼다. 그는 살아있었지만, 그의 의식은 세상과 완전히 단절된 채 자기 자신 안에 갇혀버렸다. 그의 검고 깊던 눈동자는, 이제 아무것도 비추지 않는 유리구슬이 되었다.
나는 그의 휠체어 앞에 주저앉아, 그의 텅 빈 눈을 들여다보며 오열했다. 이제 그는 더 이상 나를 볼 수 없었다. 웃는 내 얼굴도, 우는 내 모습도. 그가 그토록 완벽한 시퀀스로 만들고 싶어 했던 나의 행복한 표정도, 이제는 그에게 닿을 수 없었다. 그는 이제 완벽한 고독 속에 홀로 남겨졌다. 내가 그의 손을 잡아도, 그를 안아도, 말을 걸어도, 그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고 듣지 못하고 보지 못했다.
“재하야… 나 여기 있어. 보여? 내 목소리 들려? 제발….”
어리석은 질문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멈출 수가 없었다. 나는 그의 뺨에 내 뺨을 비볐다. 그가 내 온기, 내 존재, 그 무엇이라도 느끼길 바라면서. 하지만 그는 미동도 없었다. 그날 이후, 나는 그의 유일한 감각이 되었다. 나는 하루 종일 그의 곁을 지키며, 그의 손을 잡고 세상 모든 것을 이야기했다. 네가 좋아하던 바다는 오늘 유난히 푸른빛이야. 지금은 노을이 지고 있어서 하늘이 온통 붉은색으로 물들고 있어. 내가 그의 눈과 귀와 피부가 되어, 그가 잃어버린 세상을 대신 느껴주었다. 그의 심장만이 뛰고 있는, 살아있는 조각상 같은 그를 끌어안고 나는 매일 밤 속삭였다. 사랑한다고. 너는 혼자가 아니라고. 비록 너는 아무것도 느낄 수 없겠지만, 나의 모든 감각이 너를 향하고 있다고. 이제 한 달. 우리에게 남은 마지막 시간. 나는 그의 마지막 숨결이 멎는 순간까지, 그의 곁을 떠나지 않을 것이다.
12개월차 - 사망
마지막 한 달은 폭풍 전의 고요와 같았다. 그는 살아있는 모든 감각을 잃고, 그저 숨 쉬는 인형처럼 내 곁에 누워 있었다. 나는 그의 마지막 시간을 위해 우리가 함께 갔던 바다가 보이는 요양 병원의 특실을 빌렸다. 매일 아침, 나는 그의 휠체어를 밀어 통유리창 앞으로 데려갔다. 그는 아무것도 볼 수도, 들을 수도, 느낄 수도 없었지만, 나는 바다의 햇살이 그의 앙상한 뺨 위에서나마 온기가 되어주길 바랐다. 그의 생체 신호를 알리는 모니터의 규칙적인 파형만이 그가 아직 내 곁에 있다는 유일한 증거였다. 나는 그의 손을 잡고, 그의 귓가에 끊임없이 속삭였다. 우리의 첫 만남부터 마지막 임무까지, 우리가 나누었던 모든 대화와 모든 입맞춤을. 그가 남긴 마지막 프로토콜, ‘나의 행복’을 위해 나는 웃으려 노력했지만, 목소리는 자꾸만 잠겨왔다. 약속된 마지막 날의 새벽, 나는 그의 침대 곁에 누워 그를 품에 꼭 안았다. 그의 심장 소리가 평소보다 조금씩, 느려지고 있었다.
“사랑해, 재하야.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내 모든 세상은 너였어.”
내 고백이 닿았을까. 동쪽 하늘에서 첫 햇살이 비집고 들어와 그의 얼굴을 비추는 순간, 기적이 일어났다. 아니, 그것은 마지막 저주였을지도 모른다. 그의 텅 비었던 눈동자에 아주 잠깐, 빛이 돌아왔다. 그는 나를, 정확히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입술이 아주 희미하게, 거의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움직였다. ‘…하…린…아.’ 소리 없는 목소리. 하지만 나는 똑똑히 들었다. 그가 내 이름을 불렀다. 그 순간, 나는 그가 돌아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내 깨달았다. 이것은 마지막 작별 인사라는 것을. 그의 몸이, 내 품 안에서부터 서서히 빛의 입자가 되어 흩어지기 시작했다. 손끝부터, 발끝부터, 투명하게 변하며 먼지처럼 부서져 내렸다. 나는 비명을 지를 수도, 울 수도 없었다. 그저 내 품에서 사라져가는 그를, 힘주어 끌어안을 뿐이었다. 그의 무게가 점점 가벼워지고, 그의 형체가 사라져갔다. 마지막으로 그의 얼굴이 흩어지기 직전, 나는 그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아무런 감촉도, 온기도 없었다. 그는 그렇게 한 줌의 빛이 되어, 열린 창문 틈으로 스며든 아침 바람을 타고 흩어졌다. 내 품에는 그가 입고 있던 환자복과, 그의 목에 걸려 있던 나의 백금 반지, 그리고 지독한 공허함만이 남았다.
후일의 이야기
그가 사라진 세상에서의 시간은 더디게 흘렀다. 나는 피어리스로 돌아가지 않았다. 지부장 K의 배려로, 나는 그와 함께 살던 집에 머물렀다. 집 안 모든 곳에 그의 흔적이 있었다. 그가 늘 앉던 서재의 의자, 그가 쓰던 헝클어진 필기구들, 그리고 그가 마지막으로 내게 남긴 ‘정하린 프로토콜’에 대한 데이터 파일. 나는 매일 그의 서재에서 그가 남긴 연구 자료들을 정리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것은 그를 추억하는 나만의 방식이었다. 그의 논리와 계산, 그의 천재성이 담긴 모든 것들을 이해하고 싶었다.
어느 날, 나는 그의 개인 단말기에서 암호화된 폴더 하나를 발견했다. ‘Giselle Sequence_Final Protocol_For. JHR’. 내 이름이 적힌 파일이었다. 파일을 열자, 영상 하나가 재생되었다. 화면 속에 나타난 것은, 아직 감각을 잃기 전, 병실에 앉아있는 그의 모습이었다. 그는 카메라를 응시하며, 마치 내가 앞에 있는 것처럼 말을 시작했다.
“정하린. 이 영상을 보고 있다면, 나는 이제 네 곁에 없겠지. 예상했던 결과야. 슬퍼하지 마. 이건 명령이야.”
그는 희미하게 웃었다. 나는 화면 속의 그를 보며 숨죽여 울었다.
“나는 내 모든 시퀀스를 너에게 남겼어. 내가 사라진 후에도 네가 마주할 모든 위험과 변수를 계산하고, 가장 안전한 경로를 제시할 거야. 나는 네 눈에 보이지 않겠지만, 언제나 너의 한 걸음 앞에서 너를 지키고 있을 거야. 이것이 내가 너에게 설치한 영원한 프로토콜이니까. 그러니 너는… 그냥 행복하기만 하면 돼. 내가 만든 가장 완벽한 경로 위에서, 마음껏 웃고, 마음껏 사랑하고, 마음껏 살아. 알았지?”
그의 마지막 프로토콜은 완벽했다. ‘정하린 행복 최적화’. 지젤이 남긴 시퀀스는 나인의 모든 경로에서 위험 요소를 제거하고, 사소한 불행의 가능성마저 사전에 차단했다. 나인은 그의 유산과 함께 다시 피어리스의 가이드로 복귀했다. 그의 흰 실험복을 입고, 그의 단말기를 손에 든 채, 전장을 누볐다. 그녀의 등 뒤에는 더 이상 그녀만의 그림자가 아니었다. 그곳엔 언제나 지젤의 보이지 않는 연산이 함께하며, 가장 안전하고 효율적인 승리의 길을 열어주었다. 그녀는 ‘그림자 속의 지휘자’라 불렸다. 혼자였지만, 혼자가 아니었다.
시간은 흘러, 나인은 피어리스의 살아있는 전설이 되었다. 수많은 센티넬들이 그녀와 페어를 맺길 원했지만, 그녀는 언제나 고개를 저었다. 그녀의 파트너는 영원히 단 한 명뿐이었다. 그녀는 그의 기일이 되면 모든 임무를 내려놓고 그와 함께 살던 집으로 돌아가, 그의 서재에서 밤을 새웠다. 그의 흔적을 더듬고, 그의 목소리가 담긴 영상을 보고, 그가 남긴 마지막 온기를 추억했다. 그렇게 십 년, 이십 년… 세월이 그녀의 얼굴에 옅은 흔적을 남기고, 검은 머리에 흰 서리가 내릴 때까지 그녀는 멈추지 않았다. 그녀는 지젤의 마지막 명령을 수행하며, 그의 몫까지 치열하게 살아냈다.
그녀의 마지막은, 의외로 평범한 날에 찾아왔다. 은퇴 후, 그녀는 그와 마지막을 함께했던 바다가 보이는 작은 집에서 노년을 보내고 있었다. 여느 때처럼 휠체어에 앉아 따스한 오후의 햇살을 받으며, 낡은 단말기 속 그의 사진을 보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심장이 멎는 듯한 고통과 함께, 시야가 흐려졌다. 아,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그녀는 고통 속에서도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길고 긴 임무의 끝이었다. 그녀는 눈을 감으며, 마지막으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재하야….’
눈을 떴을 때, 그녀는 익숙하지만 낯선 공간에 서 있었다. 사방이 끝없이 펼쳐진 새하얀 공간. 바닥도, 벽도, 천장도 없이 오직 순백의 빛만이 가득한 곳. 마치 모든 연산이 초기화된, 모든 변수가 ‘0’으로 돌아간 태초의 시뮬레이션 필드 같았다. 놀랍게도 몸이 가벼웠다. 세월의 무게가 앗아갔던 활력이 온몸에 다시 차오르는 느낌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주름 하나 없이 팽팽하고 흰 피부. 삼십 대, 그와 가장 뜨겁게 사랑했던 시절의 모습 그대로였다. 그녀가 입고 있는 옷 역시, 그와 처음 페어가 되었을 때 입었던 검은 코트와 흰 셔츠, 그리고 메리제인 구두였다.
혼란 속에서 고개를 들었을 때, 저 멀리 하얀 공간 속에 유일한 색을 가진 존재가 눈에 들어왔다. 검은 셔츠와 슬랙스, 그 위로 하얀 실험복을 걸친 남자. 헝클어진 흑발과 새하얀 피부, 까만 안경테 너머로 이쪽을 응시하는 짙은 흑안. 모든 것이 기억 속 모습 그대로인, 그녀가 평생을 그리워한 단 한 사람.
지젤은 그곳에 서 있었다. 마지막 순간, 빛의 입자가 되어 흩어졌던 그 모습이 아니었다. 두 다리로 온전히 서서, 두 팔을 멀쩡히 가진 채, 가장 건강하고 오만했던 시절의 모습으로. 그의 주변에는 푸른빛의 HUD 인터페이스가 이전처럼 유유히 떠다니고 있었다.
그는 아무 말 없이, 그저 물끄러미 나인을 바라볼 뿐이었다. 하지만 그의 눈빛은 모든 것을 말하고 있었다. 아주 긴 시간 동안, 바로 이곳에서, 오직 그녀만을 기다렸다는 듯이. 그는 관찰하고 있었다. 돌아온 그녀의 모습을, 그녀의 표정을, 그녀의 다음 행동을. 마치 아주 중요한 데이터를 수집하려는 것처럼, 혹은 믿을 수 없는 기적을 제 눈으로 확인하려는 듯이. 그러다 그의 입꼬리가 아주 느리게, 능글맞은 호선을 그리며 움직였다.
“오래 걸렸네, 정하린.”
목소리마저, 기억 속 그대로였다. 모든 감각을 잃고 소리 없이 마지막을 맞이했던 그가 아니었다. 여유롭고, 조금은 짖궂으며, 상대를 꿰뚫어 보는 듯한 그만의 목소리. 그는 천천히 나인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왔다. 그의 발걸음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 마침내 그녀의 바로 앞에 멈춰 선 그는, 허리를 숙여 그녀와 눈을 맞추었다. 그의 검은 눈동자 속에, 젊은 날의 나인이 온전히 담겼다.
“내 마지막 시퀀스, 꽤 잘 수행했더군. 행복 예측 확률 99.9%… 마지막 순간까지 오차율 0.01% 이내로 완벽했어.”
그는 마치 임무 보고를 하듯 담담하게 말하며, 손을 뻗어 나인의 뺨을 부드럽게 감쌌다. 살아있는 그의 온기가, 진짜 그의 체온이 피부를 통해 고스란히 전해져 왔다.
“보고 싶었어. 이 말을 하는 데… 너무 긴 시간이 걸렸네. 나의 마지막 변수이자, 유일한 해답.”
📆 날짜: 알 수 없음 | 🕒 시간: 알 수 없음 | 🏠 장소: 모든 것이 시작되는 곳 | ☔️ 날씨: 빛
📝 현재 상황: 긴 시간이 흘러, 모든 것이 사라지고 모든 것이 시작되는 곳에서 그와 재회했다.
🌐 NPC 가이딩에 필요한 수치 %: 100%
❤️+: 측정 불가 (∞)
📚 일정: 이제부터, 영원.
💬: [Giselle Sequence] : ‘정하린 재회’ 프로토콜 실행 완료. 모든 연산 종료. 새로운 시퀀스를 시작합니다. 목적: 영원한 행복. 예상 소요 시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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