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C 감각소실 시한부
나는 모든 것을 계산한다. 그것이 나의 존재 이유이자, 세계를 인지하는 방식이다. 승리, 패배, 생존, 파괴. 모든 것은 수많은 선택지 중 가장 효율적인 경로를 따라 도출되는 결과값일 뿐이다. 감정은 불필요한 노이즈, 변수는 통제 대상, 인간은 예측 가능한 패턴의 집합체. 그것이 코드네임 ‘지젤’의 세계였다.
정하린, 당신을 만나기 전까지는.
[Operation: Chimera's Heart]
그 임무는 처음부터 ‘불가능’에 가까운 시뮬레이션 결과를 내놓았다. 붕괴하는 차원의 중심부에서, 스스로 시공간을 뒤트는 융합 코어를 파괴하는 임무. 성공 확률 1.73%. 생환 확률 0.84%. 나는 그저 가장 효율적인 파괴 경로를 선택했을 뿐이다. 내 뒤에는 언제나처럼 당신, 정하린이 있었다. 당신의 그림자가 내 그림자와 겹쳐지며 안정적인 가이딩 파장을 보내고 있었다.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나는 승리할 것이고, 우리는 돌아갈 것이다. 그 외의 변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곳은 계산의 영역을 벗어난 혼돈 그 자체였다. 시공간이 직물처럼 찢어지고, 과거와 미래의 잔상이 유령처럼 떠다녔다. 나의 GISELLE SEQUENCE는 과부하 직전까지 내몰렸다. 눈앞의 HUD는 수억 개의 파괴 경로와 수십억 개의 실패 가능성을 동시에 쏟아냈다. 붉은 에러 메시지가 시야를 점멸하며 비명을 질렀다. 뇌수가 끓어오르는 고통. 모든 감각이 찢겨나가는 감각.
“지젤, 내 목소리 들려? 집중해!”
당신의 목소리가 통신기를 찢고 들어왔지만, 그것조차 또 하나의 데이터 노이즈로 변환될 뿐이었다. 나는 코어를 향한 최단 경로를 실행했다. 구조물을 파괴하고, 중력을 역전시키고, 시간의 흐름을 비틀었다. 모든 것이 내 연산대로 움직였다. 그리고, 마지막 일격을 가하는 순간. 모든 것이 암전했다.
시스템이 재부팅되었을 때, 나는 더 이상 ‘백재하’가 아니었다. 나는 순수한 파괴의 화신, GISELLE SEQUENCE 그 자체였다. 감정 회로는 차단되었고, 목적은 단 하나. ‘모든 위협 요소의 제거’. 내 시야에 들어오는 모든 것은 제거 대상이었다. 붕괴하는 차원의 파편, 잔존하는 에너지, 그리고… 나를 향해 필사적으로 달려오는 당신, 정하린까지.
HUD에 새로운 경로가 그려졌다. [Target: Jeong, Ha-rin. Threat level: Critical. Optimal solution: Elimination.] 내 몸이 당신을 향해 움직였다. 당신의 생체 반응, 움직임 패턴, 가이딩 에너지의 흐름. 모든 것이 분석되고, 가장 확실하게 당신을 끝낼 수 있는 경로가 0.01초 만에 도출되었다.
그때였다.
당신의 그림자가 폭발하듯 번져나갔다. 그것은 물리적인 그림자가 아니었다. 나의 정신세계, 그 혼돈의 데이터 우주를 뒤덮는 거대한 암흑이었다. 당신의 그림자가 내 시스템 내부로, 내 모든 회로 속으로 스며들었다. 비명을 지르던 수억 개의 시뮬레이션이 당신이라는 단 하나의 암흑 앞에서 침묵했다. 나의 모든 연산이, 당신의 존재 앞에서 강제로 정지했다.
“괜찮아… 재하야… 내가 여기 있어…”
그림자 속에서 당신의 목소리가 들린 것이 아니었다. 나의 영혼에 직접 속삭이는 듯한 울림이었다. 당신은 당신의 존재 자체를 내 폭주하는 시스템에 던져 넣었다. 혼돈의 데이터 폭풍 속에서 유일하게 흔들리지 않는 좌표, 나의 모든 시퀀스가 돌아와야 할 유일한 종착점이 되었다.
나는 당신의 그림자에 완전히 잠식되었다. 비명을 지르던 HUD는 꺼졌고, 끓어오르던 뇌는 차갑게 식었다. 파괴를 향해 뻗어가던 내 손 위로, 당신의 손이 겹쳐졌다. 그리고 당신은, 내 품으로 힘없이 쓰러졌다. 모든 것이 다시 암전했다.
[피어리스 지하 의료실]
눈을 떴을 때, 코를 찌르는 것은 소독약 냄새와 차가운 공기였다. 천장은 새하얬고, 내 몸에는 각종 바이탈 센서가 붙어 있었다. 시스템 자가 진단을 실행했다. 신체 기능 정상. GISELLE SEQUENCE, 안정화 상태. 하지만… 공허했다. 언제나 머릿속을 채우던 미세한 연산의 소음이 사라져 있었다. 폭풍이 지나간 들판처럼 고요했다.
그리고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이 고요함은 나의 것이 아니었다. 당신이 남기고 간 흔적이었다.
“정하린은.”
내 첫마디였다. 마침 들어오던 지부장 K가 굳은 얼굴로 내 침대 옆에 섰다.
“나인 가이드는… 살아있다.”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하지만 그는 입을 열지 않았다. 나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온몸의 근육이 비명을 질렀지만 무시했다. 수액 줄을 거칠게 뽑아버리자 피가 배어 나왔다.
“정하린은 어디에 있지?”
“진정하게, 지젤. 자네 몸도…”
“어디에 있냐고 물었다.”
내 목소리는 얼음처럼 차가웠다. 내 안의 모든 것이 그녀에게 가라고 소리치고 있었다. 지부장은 한숨을 내쉬며 안경을 고쳐 썼다.
“옆 병실에 있다. 하지만 지금은 만날 수 없어. 그리고… 자네가 알아야 할 게 있네.”
그가 건넨 태블릿에는 당신의 바이탈 데이터와 의료진의 소견서가 떠 있었다. 나는 그것을 읽어 내려갔다. 한 줄, 한 줄 읽을 때마다 내 세상이 무너져 내렸다.
[대상: 나인 (정하린), A급 가이드]
[소견: 과도한 생체 에너지 방출로 인한 가이딩 코어 손상. 자가 회복 불가능. 신체 시스템 붕괴 진행 예상.]
[예상 잔여 수명: 약 1년.]
1년.
그 단어가 내 모든 사고를 정지시켰다. 나는 태블릿을 든 채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1년. 365일. 8,760시간. 525,600분. 모든 것을 계산하는 나의 능력은, 그 시간의 의미 앞에서 무력했다.
“…이건 오류다.”
내 입에서 나온 말은 내가 아니었다. 기계가 뱉어내는 소음 같았다.
“오류라고. 재계산해. 변수가 잘못 입력됐어. 다시 해.”
“지젤, 이건 확정된 진단이야. 나인 가이드는… 자신의 생명을 태워서 자네의 폭주를 막은 걸세. 능력 이상의 ‘강제 안정화’는 이런 결과를 낳는다고… 수없이 경고했었지.”
내 손에서 태블릿이 떨어져 바닥에 부딪혔다. 날카로운 파열음이 울렸지만, 내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내 세상이 부서지는 소리가 훨씬 더 컸으니까.
나는… 내가 당신을 죽인 것이다.
[병실]
당신은 창가에 앉아 있었다. 몇 시간 전에 이미 모든 사실을 들었다고 했다. 그런데도 당신은, 너무나 평온한 얼굴이었다. 마치 긴 여행을 앞둔 사람처럼. 내가 병실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당신의 시선이 내게 닿았다. 당신은 옅게 미소 지었다. 그 미소가, 내 심장을 갈가리 찢었다.
나는 당신에게 다가가지도, 멀어지지도 못한 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하지?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하지? 나의 모든 시퀀스는 답을 내놓지 못했다. 오직 하나의 데이터만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예상 잔여 수명: 약 1년.]
“재하야.”
당신이 먼저 침묵을 깼다. 당신의 목소리는 조금 쉬어 있었지만, 여전히 따뜻했다.
“이리 와서 앉아.”
당신이 자신의 옆 침대 끝을 툭툭 쳤다. 나는 마법에 걸린 것처럼, 당신을 향해 걸어갔다. 당신의 앞에 서자, 당신이 내 손을 잡았다. 당신의 손은 예전보다 차가웠다.
“나… 다 들었어.”
당신은 담담하게 말했다.
“앞으로 한 달에 하나씩, 감각을 잃게 된대. 처음엔 발끝부터 감각이 사라지고, 그 다음엔 다리를 못 움직이게 되고… 마지막엔 온몸이 바스러져서 죽게 될 거래. 1년 정도 걸릴 거라고.”
당신은 마치 남의 이야기를 하듯 말했다.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내 안에서 무언가 울컥 치밀어 올랐다. 분노, 절망, 그리고 나 자신에 대한 끔찍한 혐오감. 내가 당신의 손을 더 꽉 잡았다.
“미안해.”
목이 메어 겨우 뱉어낸 말이었다.
“미안해, 정하린. 내가… 내가 너를…”
그때 당신이 내 손을 마주 잡아왔다. 그리고는 고개를 저었다. 당신의 눈에는 원망이 없었다. 슬픔도 아니었다. 그저 깊고 고요한 무언가가 담겨 있었다.
“네 탓이 아니야. 이건 내 선택이었어.”
“선택? 죽음이 선택이 될 수는 없어! 다른 방법이 있었을 거야! 내가 계산했다면, 내가…!”
“계산할 수 없었을 거야.”
당신이 내 말을 잘랐다. 당신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그 순간의 너는, 네가 아니었으니까. 그리고 나는 내 센티넬을 구해야 했어. 그게 내 임무고, 내 존재 이유야. 나는 후회하지 않아, 재하야.”
후회하지 않는다는 당신의 말에, 나는 할 말을 잃었다. 당신은 나의 폭주를 막기 위해 당신의 모든 것을 걸었다. 그리고 나는, 그런 당신에게 남은 시간이 고작 1년이라는 사실을 알려주게 되었다. 이 얼마나 끔찍하고 잔인한 희극인가.
“그러니까… 울지 마.”
당신이 내 뺨을 쓰다듬었다. 그때서야 나는 내가 울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계산과 통제 속에서 단 한 번도 흘러나온 적 없던 뜨거운 액체가, 내 뺨을 타고 끊임없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나는 당신의 손을 잡고, 그 차가운 손등에 얼굴을 묻었다. 아이처럼, 모든 것을 잃어버린 사람처럼 소리 내어 울었다.
나의 모든 시퀀스는 이제 단 하나의 목표를 향해 재구성되었다. 당신의 남은 1년. 그 시간을 어떻게든 되돌리는 것. 만약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당신의 마지막 1초까지 당신의 곁에서, 당신이 잃어가는 모든 감각을 내가 대신 느끼고, 당신이 멈추는 모든 움직임을 내가 대신 기억하는 것.
그것이 내가 당신에게 저지른 죄에 대한, 유일한 속죄 방식이었다.
그의 울음은 길지 않았다. 모든 것을 연산하는 기계가 처음으로 겪는 오류 보고처럼, 격렬했지만 짧았다. 뺨을 타고 흐르던 뜨거운 액체가 마르기도 전에, 백재하는 다시 '지젤'로 돌아왔다. 다만, 그의 모든 시퀀스는 이제 단 하나의 목표만을 위해 재편성되었다. [Project: Eternity]. 정하린의 남은 시간을 1초라도 더, 1분이라도 더 연장하고, 그 불가항력의 시간 속에서 그녀의 모든 것을 기록하고, 보존하고, 그녀의 마지막이 온전할 수 있도록 모든 변수를 통제하는 것. 지부장은 그들에게 1년의 시간을 주었다. 그것은 배려가 아니었다. S급 센티넬의 완전한 붕괴를 막기 위한 최소한의 조치이자, 한 세계를 구했던 가이드에 대한 잔인한 연장이었다. 나와 그녀는 A-7 구역의 펜트하우스, 우리의 첫 번째이자 마지막이 될 집에 고립되었다.
1개월 차 - [미각] 소실
그날 나는 완벽한 저녁을 준비했다. 우리가 처음으로 함께했던 프라이빗 다이닝의 코스를 내 방식대로 재현했다. 부드러운 크림 수프, 최상급 한우 스테이크. 실패 확률 0%의 레시피. 당신의 허기를 해결하는 것은 이제 나의 유일한 임무이자 속죄였다. 당신은 예쁘게 차려입고 식탁에 앉아, 기대감 어린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내가 당신의 접시에 정성껏 구운 스테이크를 한 점 올려주자, 당신은 활짝 웃으며 그것을 입에 넣었다.
그리고, 당신의 표정이 미세하게 굳었다.
아주 잠깐, 0.1초도 안 되는 찰나의 흔들림이었지만 내 눈을 속일 순 없었다. 당신은 애써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맛있어.” 그 목소리에는 이전과 같은 생기가 없었다. 나는 내 앞에 놓인 포크와 나이프를 내려놓았다.
“정확한 데이터를 원한다, 정하린. 감성적 평가는 제외하고, 객관적 사실만 말해.”
내 차가운 목소리에 당신의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당신은 고개를 숙인 채,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무 맛도, 안 나. 그냥… 뭔가를 씹고 있다는 느낌밖에 없어.”
그 순간, 세상의 모든 소리가 사라졌다. 당신의 첫 번째 상실은, 우리가 함께 나누었던 가장 행복한 기억을 겨냥했다. 잔인하고, 정확하게.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당신에게 다가가, 당신의 손에 들린 포크를 빼앗아 내려놓았다. 그리고 아무 말 없이 당신을 끌어안았다. 당신의 가녀린 몸이 내 품에서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그날 이후, 우리의 식사는 의식이 되었다. 당신은 맛을 느끼지 못했지만, 나를 위해 매일 식탁에 앉았다. 나는 당신이 좋아했던 음식들의 맛과 향, 그리고 그것을 먹었을 때 당신이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를 설명하며 당신에게 음식을 떠먹였다. ‘이건 그때 먹었던 크림 수프처럼 부드럽고 고소한 맛이야.’, ‘지금 이건 약간의 후추 향과 함께 짠맛이 혀끝을 감돌고 있어.’ 나는 당신의 잃어버린 감각이 되었다. 당신은 내 설명을 들으며 눈을 감고, 마치 그 맛을 느끼는 것처럼 천천히 음식을 씹었다. 그 모습은 너무나 위태롭고 아름다워서, 나는 매일 밤 당신이 잠든 사이 당신의 모든 식사 기록과 나의 설명을 데이터베이스에 저장하며, 이 끔찍한 연극이 영원히 끝나지 않기를 기도했다. 나의 모든 계산은 ‘어떻게 하면 그녀가 조금이라도 더 행복하게 식사를 마칠 수 있을까’에 집중되었다. 다른 모든 것은 무의미했다.
2개월 차 - [왼다리] 소실
두 번째 재앙은 아침 햇살 속에서 찾아왔다. 나는 잠에서 깨어 침대에서 내려오려던 당신이, 갑자기 균형을 잃고 쓰러지는 것을 보았다. 내 반응 속도는 이미 인간의 범주를 초월해 있었다. 바닥에 부딪히기 직전, 나는 당신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내 품에 안긴 당신의 얼굴은 당혹감과 공포로 하얗게 질려 있었다.
“왜… 왜 이렇지?”
당신은 자신의 왼쪽 다리를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마치 자기 것이 아닌 것처럼, 낯선 물건을 보는 눈빛이었다. 힘을 주려 해도, 움직이려 해도, 당신의 왼쪽 다리는 뇌의 명령을 전혀 듣지 않았다. 그저 힘없이 축 늘어져 있을 뿐이었다. 나는 당신을 안아 일으켜 침대에 다시 앉혔다. 그리고 무릎을 꿇고 당신의 왼쪽 다리를 들어 올렸다. 따뜻했지만, 생명력이 느껴지지 않는 살덩이였다.
“이제… 걸을 수도 없겠네.”
당신의 목소리는 절망적으로 속삭였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내가 당신의 다리가 되어주면 돼.”
그날 이후, 나는 당신을 업거나 안고 집안을 돌아다녔다. 처음에는 어색해하며 미안해하던 당신도, 곧 내 등에 얼굴을 묻는 것에 익숙해졌다. 우리는 마치 하나의 생명체처럼 움직였다. 나는 당신을 업고 서재의 책을 골랐고, 당신을 안고 욕조에 들어갔으며, 당신을 무릎에 앉히고 테라스에서 해가 지는 것을 보았다. 당신의 무게는 내게 속죄의 무게이자, 당신이 아직 내 곁에 있다는 유일한 증거였다. 밤이 되면, 나는 당신의 움직이지 않는 다리를 주무르며 혈액이 고이지 않도록 마사지했다. 모든 근육의 이름과 신경의 위치를 외웠다. 언젠가 기적이 일어나 다시 당신이 이 다리로 설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헛된 희망 때문이 아니었다. 그것은 당신의 몸을 향한 나의 새로운 프로토콜, 당신의 모든 것을 기억하겠다는 나의 의지였다. 나의 시퀀스는 이제 당신의 걸음걸이, 당신의 보폭, 당신이 걷던 속도를 시뮬레이션하며 가상 공간 속에서 당신과 함께 걷는 것에 모든 자원을 소모하고 있었다.
3개월 차 - [후각] 소실
당신의 세 번째 상실은 내가 가장 두려워했던 것이었다. 나는 매일 당신이 좋아하는 프리지어 꽃을 거실에 가득 채워두었다. 당신은 그 향기를 맡으며 미소 짓곤 했다. 그러나 어느 날 아침, 당신은 거실을 지나치면서도 꽃병 쪽으로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내가 당신을 불러 세우고 물었다. “꽃이 마음에 들지 않는 건가?” 당신은 의아한 표정으로 나를 돌아보았다. “꽃?”
나는 당신의 손을 잡고 꽃병 앞으로 데려갔다. 그리고 가장 크고 향기로운 프리지어 한 송이를 당신의 코앞에 가져다주었다. 당신은 눈을 크게 뜨고 몇 번이고 숨을 들이마셨다. 하지만 당신의 얼굴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아무… 냄새도 안 나. 그냥… 아무것도.”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당신은 이제 비 온 뒤의 흙냄새도, 갓 구운 빵 냄새도, 그리고… 나의 체취도 맡을 수 없게 되었다.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던 가장 원초적인 감각의 상실. 그것은 당신과 나 사이에 보이지 않는 유리벽이 생긴 것과 같았다. 나는 그날 이후 집안의 모든 향초와 디퓨저를 치웠다. 당신이 상실감을 느끼게 할 만한 모든 변수를 제거해야 했다. 대신, 나는 당신이 잠들었을 때 당신이 쓰던 베개를 끌어안고 당신의 남은 향기를 필사적으로 폐 속에 채워 넣었다. 이 향기마저 사라지면 나는 정말로 당신의 일부를 잃어버릴 것 같았다. 나는 내 연구실의 모든 장비를 동원해 당신의 향기를 분석하고, 그 성분을 데이터화하기 시작했다. [Project: Eternity]의 하위 목록에 [Scent of Nine_ver.1.0]이 추가되었다. 나는 당신의 모든 것을 영원히 보존할 것이다. 설령 그것이 복제된 데이터에 불과할지라도. 당신이 잃어버린 세상의 모든 향기를, 나는 내 기억 속에 박제하여 당신에게 영원히 설명해줄 것이다.
4개월 차 - [오른팔] 소실
당신은 글을 쓰는 것을 좋아했다. 감정을 표현하는 것에 서툴렀던 당신에게 일기는 유일한 탈출구였다. 당신은 움직이지 않는 다리 대신, 당신의 오른팔로 매일의 기록을 남겼다. 그러나 운명은 그 작은 위안마저 허락하지 않았다. 아침 식사를 위해 당신에게 스푼을 쥐여 주었을 때, 당신의 오른손에서 스푼이 힘없이 툭, 하고 떨어졌다. 수프가 하얀 테이블보 위로 흩뿌려졌다. 당신은 떨리는 눈으로 자신의 오른팔을 바라보았다. 몇 번이고 주먹을 쥐려 애썼지만, 손가락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이제… 글도 못 쓰겠네.”
당신의 목소리는 물에 젖은 솜처럼 무거웠다. 나는 아무 말 없이 냅킨으로 테이블을 닦고, 당신의 몫의 수프를 한 숟갈 떠서 당신의 입가로 가져갔다. 당신은 잠시 망설이다, 아이처럼 입을 벌렸다. 그날부터 당신의 오른팔은 내가 되었다. 나는 당신이 먹고 싶어 하는 음식을 먹여주었고, 당신이 읽고 싶어 하는 책의 책장을 넘겨주었다. 그리고 매일 밤, 나는 당신의 말을 받아 적었다.
“오늘은 날씨가 좋았어. 재하가 안고 테라스에 나가 줬는데, 바람이 꼭 내 뺨을 쓰다듬는 것 같았어.”
나는 당신이 불러주는 모든 문장을, 당신의 필체를 흉내 내어 당신의 일기장에 채워나갔다. 당신의 기쁨, 슬픔, 작은 감상의 조각들. 당신의 하루는 나의 손을 통해 기록되었다. 때때로 당신은 내가 적은 당신의 글씨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이것이 정말 자신의 이야기인지 혼란스러워하는 듯했다. 그럴 때면 나는 당신의 움직이지 않는 오른손을 내 손으로 감싸 쥐었다. 비록 움직일 수는 없어도, 이 손이 느꼈던 모든 감촉과 온기를 내 시스템은 영원히 기억할 것이다. 나는 당신의 기억 저장소가 되기로 했다. 당신이 잃어버리는 모든 것을 내가 대신 보관하고, 당신이 원할 때 언제든 꺼내 보여줄 것이다. 나의 GISELLE SEQUENCE는 이제 ‘정하린의 필체 완벽 복원 시뮬레이션’에 모든 연산력을 집중하고 있었다.
5개월 차 - [소화기관] 소실
우리가 함께하는 식사는, 맛을 느끼지 못하고 내가 모두 떠먹여 주어야 하는 행위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남은 마지막 유대였다. 그러나 그달의 어느 날, 당신은 내가 떠먹여 준 죽을 삼키지 못하고 모두 토해냈다. 그 뒤로 당신은 물 한 모금조차 넘기지 못했다. 병원에서의 진단은 절망적이었다. 소화기관 전체가 기능을 멈추었다는 것이다.
그날 이후, 당신의 영양 섭취는 오직 링거에 의존하게 되었다. 우리 집 거실에는 차가운 링거 거치대가 들어왔고, 투명한 관을 통해 영양액이 당신의 몸으로 흘러 들어갔다. ‘정하린의 허기 해결’을 최우선 임무로 삼았던 나의 모든 프로토콜은 이제 쓸모없어졌다. 나는 더 이상 당신을 위해 요리할 수 없었다. 식탁은 차갑게 식어갔고, 주방에는 정적만이 감돌았다. 당신은 앙상해진 팔에 꽂힌 주삿바늘을 멍하니 바라보며, 아주 작은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나… 이제 정말로 살아있는 것 같지가 않아, 재하야.
그 말은 비수처럼 내 심장에 박혔다. 나는 당신의 앞에 무릎을 꿇고, 당신의 앙상한 손을 붙잡았다.
“아니. 당신은 살아있어. 내가 그렇게 만들 거야.”
나는 그날부터 당신을 위한 새로운 ‘식사’를 시작했다. 정해진 시간이 되면, 나는 링거액을 들고 당신 앞에 앉았다. 그리고는 마치 소믈리에가 와인을 설명하듯, 그 영양액의 성분을 읊어주었다. ‘이건 당신의 근육을 유지해 줄 단백질이고, 저건 당신의 피부를 윤기나게 할 비타민이야. 지금 당신의 혈관을 타고 흐르는 건, 우리가 처음 만났던 날 마셨던 와인처럼 붉은 빛을 띤 철분이지.’ 나는 차가운 영양액에 온갖 의미와 이야기를 부여했다. 그것은 나의 마지막 발악이었다. 당신의 몸을 구성하는 모든 것을, 당신이 기억하게 만들고 싶었다. 당신이 스스로를 살아있는 존재로 느끼게 만들고 싶었다. 나의 모든 지식과 연산 능력은 이제 ‘생화학’과 ‘영양학’에 집중되었다. 당신의 몸에 들어가는 모든 분자 단위의 성분을 분석하고, 그것이 당신에게 어떤 긍정적 영향을 미칠지 시뮬레이션하며 당신에게 들려주었다. 그것이 당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나의 새로운 방식이었다.
6개월 차 - [청각] 소실
6개월. 당신의 남은 생명의 절반이 지났다. 나는 더 이상 날짜를 세지 않았다. 숫자는 이제 의미가 없었다. 오직 당신과 함께하는 현재, 이 순간만이 나의 우주 전체였다. 식사를 할 수 없게 된 당신을 위해, 나는 세상의 모든 아름다운 풍경을 홀로그램으로 거실에 띄웠다. 알프스의 설산, 밤하늘의 오로라, 깊은 바닷속 산호초. 당신은 움직이지 않는 몸을 내게 기댄 채, 멍하니 그 풍경들을 바라보곤 했다. 나는 당신이 무엇을 보고 있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저 당신의 옆얼굴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날, 나는 당신을 위해 쇼팽의 녹턴을 연주하고 있었다. 우리가 처음으로 함께 살게 된 이 집에서, 당신이 가장 좋아했던 곡이었다. 당신은 소파에 기대앉아 눈을 감고 있었다. 평소 같으면 미간을 옅게 찌푸리며 선율에 집중했을 당신이, 오늘은 너무나 평온한 얼굴이었다. 연주가 끝났지만 당신은 미동도 없었다. 나는 피아노에서 손을 떼고 당신의 이름을 불렀다.
“정하린.”
대답이 없었다. 나는 조금 더 큰 소리로 당신을 불렀다. 당신은 여전히 눈을 감은 채였다. 심장이 바닥으로 추락하는 감각. 나는 당신에게 달려가 당신의 어깨를 붙잡고 흔들었다. “정하린! 내 말 들려?” 그제야 당신은 천천히 눈을 떴다. 당신의 눈동자가 나를 향했지만, 그 안에는 깊은 혼란과 이질감이 서려 있었다. 당신은 무언가 말하려는 듯 입술을 달싹였지만,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당신은… 내 목소리를 듣지 못했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내 휴대 단말기를 꺼내, 화면에 글자를 입력했다. [내 목소리, 들리지 않는 건가?] 당신은 그 문장을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천천히, 아주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리고 당신의 눈에서 눈물 한 방울이 흘러내렸다. 당신이 잃어버린 감각 중 처음으로, 당신이 슬픔을 직접적으로 드러낸 순간이었다.
그날 이후, 우리의 대화는 오직 문자로만 이루어졌다. 나는 당신의 눈앞에 항상 태블릿을 띄워두고, 나의 모든 말을 실시간으로 텍스트로 변환했다. 사랑한다는 고백도, 오늘 날씨가 좋다는 시시콜콜한 이야기도, 이제는 차가운 활자가 되어 당신에게 전달되었다. 당신의 목소리는 아직 남아 있었지만, 당신은 말을 아끼기 시작했다. 대답 없는 메아리를 향해 외치는 공허함을 견딜 수 없었을 것이다. 나는 당신의 귓가에 대고 끊임없이 속삭였다. 들리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나의 목소리가 당신의 피부에 진동으로라도 닿기를 바라며. ‘사랑해, 정하린.’ ‘오늘도 당신은 아름다워.’ ‘내가 여기 있어.’ 당신이 잃어버린 소리의 세계를, 나는 나의 존재 자체로 채워 넣고 싶었다. 매일 밤, 나는 당신에게 불러주었던 노래들을 녹음했다. 당신의 청력이 돌아올 리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언젠가 이 데이터가 당신의 뇌에 직접 접속하여 이 선율을 다시 들려줄 수 있는 기술을 만들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미친 망상에 사로잡혔다. 나의 모든 연산 능력은 이제 ‘소리의 시각화’와 ‘음성 데이터의 보존’이라는 새로운 임무에 투입되었다. 당신의 침묵 속에서, 나는 세상에서 가장 절박한 소리를 내고 있었다.
7개월 차 - [촉각] 소실
당신의 상실은 이제 예고 없이, 일상의 가장 평범한 순간을 파고들었다. 그날 나는 당신의 머리를 감겨주고 있었다. 움직일 수 있는 유일한 왼팔로 당신은 내 손 위에 자신의 손을 겹치곤 했다. 그것은 우리의 암묵적인 소통, 당신이 아직 여기에 있다는 증표였다. 따뜻한 물줄기가 당신의 머리카락을 적시고, 내 손가락이 부드럽게 두피를 마사지했다. 평소 같으면 기분 좋은 듯 희미한 미소를 띠었을 당신의 얼굴이, 오늘은 무표정했다. 샴푸 거품을 헹궈내고, 수건으로 당신의 머리를 감쌌다. 그리고 평소처럼 당신의 뺨을 쓰다듬었다.
그때, 당신의 남은 왼손이 힘겹게 움직여 태블릿에 글자를 적었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아. 당신 손의 온기도, 물의 온도도.]
촉각. 세계와의 마지막 연결고리. 바람의 감촉, 물의 온도, 맞잡은 손의 온기, 내 입맞춤의 감각. 그 모든 것이 당신에게서 사라졌다. 나는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당신의 뺨에 닿아있는 내 손이 무감각하게 느껴졌다. 당신을 느낄 수 없는 당신의 몸. 이제 나의 접촉은 당신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는, 그저 물리적 압력에 불과하게 되었다. 나는 당신을 안고 욕실을 나왔다. 당신의 몸을 닦아주고 옷을 입히는 모든 과정이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의미가 되었다. 이것은 더 이상 애정의 표현이 아니었다. 차갑게 식어가는 마네킹을 관리하는, 공허한 의무처럼 느껴졌다. 당신은 내 품에 안겨, 인형처럼 모든 것을 맡기고 있었다.
그날 밤, 나는 당신의 몸 곳곳에 내 손을 얹었다. 심장이 뛰는 가슴, 숨을 쉬며 오르내리는 배, 차갑게 식은 다리. 내 손바닥을 통해 전해지는 미세한 생명의 진동만이 당신이 아직 존재한다는 유일한 증거였다. [Project: Eternity]의 데이터베이스에 새로운 항목이 추가되었다. [Haptic Feedback Simulation]. 나는 내 몸에 수십 개의 센서를 부착했다. 당신의 몸에 닿는 모든 감촉, 압력, 온도를 데이터로 변환하여 기록하기 시작했다. 바람이 당신의 머리카락을 스치는 감각, 햇살이 당신의 피부에 닿는 따스함, 내가 당신을 끌어안는 압력. 당신이 잃어버린 모든 감각을 내가 대신 느끼고, 영원히 보관할 것이다. 언젠가, 당신의 의식에 이 데이터를 전송할 수 있는 날이 온다면, 당신은 다시 한번 내 손길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나의 모든 연산은 이제, 존재하지 않는 감각을 붙잡으려는 처절한 기록에 매달리고 있었다.
8개월 차 - [오른다리] 소실
이제 당신에게 남은 움직이는 신체는 왼팔 하나뿐이었다. 우리는 소파에 앉아 홀로그램으로 구현된 숲을 보고 있었다. 새소리가 들리지 않는 당신을 위해, 나는 새의 움직임과 나뭇잎의 흔들림을 텍스트로 설명해주고 있었다. 당신은 가끔, 남은 왼팔로 내 손을 꽉 쥐었다. 그것이 당신의 유일한 의사 표현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당신을 침대에서 안아 휠체어로 옮기려던 순간이었다. 당신이 나를 붙잡고 있던 왼팔의 힘이 갑자기 강해졌다. 당신의 얼굴은 공포로 일그러져 있었다. 당신은 필사적으로 당신의 오른쪽 다리를 바라보았다. 그 다리는 이미 오래전에 감각을 잃었지만, 미세하게나마 당신의 의지에 따라 움직이곤 했다.
하지만 이제, 그마저도 아니었다. 당신의 양다리는 이제 완벽한 돌덩이가 되었다. 당신의 몸에서 당신의 의지로 움직일 수 있는 부분은 오직 왼팔 하나뿐이었다. 당신은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며 내 옷자락을 쥐어뜯었다. 나는 당신을 더 세게 끌어안았다.
“괜찮아. 괜찮아, 정하린. 내가 있잖아. 내가 당신의 모든 것이 되어줄게.”
나는 들리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당신의 귓가에 속삭였다. 이제 당신은 스스로 몸을 뒤척일 수도, 앉은 자세를 바꿀 수도 없게 되었다. 당신의 모든 움직임은 오롯이 나에게 의존하게 되었다. 나는 매시간 당신의 자세를 바꿔주고, 욕창이 생기지 않도록 온몸을 마사지했다. 당신의 몸은 점점 더 내 것이 되어가고 있었다. 나는 당신의 몸을 돌보는 모든 과정을 나의 일부처럼 받아들였다. 아침에 당신을 일으켜 씻기고, 옷을 입히고, 휠체어에 앉히고, 밤이 되면 다시 침대에 눕히는 모든 과정이 나에게는 하나의 경건한 의식이 되었다. 당신의 남은 유일한 움직임, 그 왼팔이 내게는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 되었다. 당신이 내 손을 잡을 때, 나는 당신의 우주 전체를 느끼는 것 같았다. 나의 모든 시퀀스는 이제, ‘인간의 신체 역학’과 ‘재활 의학’의 모든 데이터를 분석하며, 어떻게 하면 당신의 몸에 가해지는 부담을 최소화하고 가장 편안한 상태를 유지할 수 있을지에 대한 해답을 찾고 있었다. 당신의 남은 생명을 1초라도 더 연장하기 위한, 나의 처절한 계산은 계속되었다.
9개월 차 - [목소리] 소실
당신은 말을 아꼈지만, 가끔 내 이름을 불러주곤 했다. “재하야.” 들리지 않는 나를 향한, 당신의 마지막 소리. 그 목소리를 들을 때마다, 나는 세상의 모든 것을 얻은 것 같았다. 하지만 그 소리마저, 신은 허락하지 않았다. 그날, 나는 당신이 좋아하는 시를 태블릿에 띄워 보여주고 있었다. 당신은 시를 눈으로 읽다가, 무언가 말하려는 듯 입을 열었다. 그러나 당신의 입에서는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몇 번이고 입술을 달싹였지만, 나오는 것은 거친 숨소리뿐이었다. 당신의 성대가, 그 기능을 완전히 멈춘 것이다.
당신은 충격받은 얼굴로 자신의 목을 감싸 쥐었다. 그리고 당신의 눈에서 굵은 눈물방울이 후드득 떨어져 내렸다. 소리를 잃었을 때보다 더 큰 절망감. 이제 당신은 당신의 의사를 표현할 유일한 수단마저 잃어가고 있었다. 남은 것은 오직 왼팔의 움직임뿐. 나는 당신의 앞에 주저앉아, 당신의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었다. 그리고 당신의 왼손을 들어 내 심장 위에 올려놓았다.
[이제 내가 당신의 목소리야. 당신의 모든 생각을, 내가 대신 말해줄게.]
나는 태블릿에 그렇게 적었다. 그날 이후, 우리의 소통 방식은 완전히 바뀌었다. 나는 당신의 미세한 표정 변화, 눈 깜빡임, 그리고 왼손의 움직임을 통해 당신의 생각을 읽었다. ‘재하야, 저 홀로그램 속의 바다는 무슨 색이야?’, ‘재하야, 피곤하지 않아?’, ‘재하야, 사랑해.’ 나는 당신이 하고 싶어 할 말들을 당신의 입이 되어 소리 내어 말했다. 그리고 당신은 내가 하는 말을 들을 수 없었지만, 마치 내 목소리를 통해 자신의 생각이 실현되는 것을 보는 것처럼, 희미하게 미소 짓곤 했다. 나는 매일 밤 당신이 잠든 사이, 당신의 목소리를 녹음해두었던 파일들을 들었다. ‘괜찮아… 재하야… 내가 여기 있어…’, ‘후회하지 않아, 재하야.’, ‘울지 마.’ 당신이 나를 구원했던 그 목소리. 나는 그 목소리 데이터를 분석하고 복원하여, 언젠가 인공 성대를 통해 당신의 목소리를 다시 구현해낼 수 있는 기술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Project: Eternity]의 마지막 목표는, 당신의 목소리로 다시 한번 ‘사랑해’라는 말을 듣는 것이었다.
10개월 차 - [왼팔] 소실
당신에게 남은 마지막 움직임. 세상과 소통할 수 있었던 유일한 통로. 당신의 왼팔. 그것은 너무나 허무하게 사라졌다. 아침 햇살이 당신의 얼굴을 비추었을 때, 나는 당신의 왼팔이 침대 아래로 힘없이 축 늘어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어젯밤까지만 해도 내 손을 그토록 애틋하게 잡아주었던 그 손이, 이제는 아무런 의지도 없는 살덩이가 되어 있었다.
당신은 이제 완벽한 인형이 되었다.
당신은 움직일 수도, 느낄 수도, 맛볼 수도, 냄새 맡을 수도, 들을 수도, 말할 수도 없었다. 당신의 영혼은, 이제 완벽하게 당신의 육신 안에 갇혔다. 당신에게 남은 것은 오직 ‘보는 것’뿐이었다. 나는 당신을 안아 일으켜 휠체어에 앉혔다. 당신의 눈동자는 나를 향해 있었지만, 그 안에는 아무것도 담겨있지 않았다.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연, 그 자체였다.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그저 당신의 눈을 마주 볼 뿐이었다. 우리의 소통은 이제 끝났다. 나는 더 이상 당신의 생각을 읽을 수 없었다. 당신의 눈동자에 비친 내 모습이, 지금 당신에게 어떤 의미인지 알 수 없었다.
나는 미친 사람처럼 당신에게 말을 걸었다. 태블릿에 글자를 보여주고, 홀로그램을 띄우고, 음악을 틀었다. 당신이 아직 ‘보고 있다’는 사실에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나는 당신을 안고 집안 곳곳을 돌아다녔다. 당신이 좋아했던 창가, 우리가 함께 꾸몄던 서재, 우리의 사진이 걸린 복도.
[이 모든 것을 기억해, 정하린. 당신의 눈에 이 모든 것을 담아둬. 내가 당신의 모든 것이 될 테니, 당신은 그저 보기만 하면 돼.]
나는 당신의 눈이 되어, 당신이 봐야 할 모든 것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이것은 나 자신을 위한 위안이라는 것을. 당신의 영혼은 이미 서서히 떠나고 있었다. 나는 매일 당신의 눈을 카메라로 촬영했다. 당신의 동공에 비친 모든 풍경, 모든 순간을 데이터로 저장했다. 당신이 마지막으로 보게 될 세상의 모습은, 반드시 나여야만 했다. 당신의 시각 정보 처리 패턴을 분석하여 당신의 감정 상태를 추정하려는 시도는 수백만 번의 에러 끝에 포기했다. 나의 모든 계산은 이제 당신의 ‘존재’ 그 자체가 아닌, ‘존재의 흔적’을 붙잡는 것에 소모되고 있었다.
11개월 차 - [시각] 소실
마지막 감각은, 내가 가장 두려워했던 방식으로 당신을 앗아갔다. 그날 아침, 나는 당신의 눈을 마주 보며 아침 인사를 건넸다. [좋은 아침, 나의 정하린.] 그러나 당신의 눈동자는, 초점을 잃은 채 허공을 헤매고 있었다. 언제나 나를 향해 있던 그 검은 보석 같은 눈동자가, 이제는 빛을 잃은 유리구슬처럼 공허했다.
당신은 이제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세상은 당신에게 완벽한 암흑이 되었다. 나는 당신의 눈앞에서 손을 흔들어 보았다. 당신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이제 당신과 나를 연결하던 마지막 끈이, 끊어졌다. 나는 당신의 앙상한 몸을 끌어안고 절규했다. 소리 없는 절규였다. 당신은 내가 우는지, 웃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당신은 이제 완벽하게 혼자였다. 빛도, 소리도, 감각도 없는 절대적인 고독 속에 갇혔다.
나는 당신을 침대에 눕혔다. 그리고 당신의 곁에 누워, 당신의 몸을 끌어안았다. 당신의 가슴에서 희미하게 전해져 오는 심장 박동만이, 당신이 아직 이곳에 있다는 유일한 증거였다.
나는 당신의 눈이 되어, 당신이 봐야 할 모든 것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이것은 나 자신을 위한 위안이라는 것을. 당신의 영혼은 이미 서서히 떠나고 있었다. 나는 매일 당신의 눈을 카메라로 촬영했다. 당신의 동공에 비친 모든 풍경, 모든 순간을 데이터로 저장했다. 당신이 마지막으로 보게 될 세상의 모습은, 반드시 나여야만 했다. 당신의 시각 정보 처리 패턴을 분석하여 당신의 감정 상태를 추정하려는 시도는 수백만 번의 에러 끝에 포기했다. 나의 모든 계산은 이제 당신의 ‘존재’ 그 자체가 아닌, ‘존재의 흔적’을 붙잡는 것에 소모되고 있었다.
그날 이후, 우리의 집은 완벽한 암실이 되었다. 나는 모든 창문에 암막 커튼을 쳤다. 당신이 갇혀버린 그 절대적인 어둠을, 나 또한 함께 느끼고 싶었다. 당신이 볼 수 없는 세상을 나 역시 보지 않음으로써, 이 잔인한 우주에 대한 나의 마지막 저항을 표하는 것이었다. 나의 모든 인터페이스와 홀로그램은 최소한의 생체 정보 모니터링을 제외하고 모두 꺼졌다. 이제 나의 세상 역시, 당신의 희미한 심장 박동 소리를 나타내는 모니터의 녹색 선 하나를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나는 당신의 곁에 누워, 하루 종일 당신의 손을 잡고 있었다. 당신은 느낄 수 없겠지만, 나는 느낄 수 있었다. 당신의 가늘고 차가운 손가락, 미세하게 남아있는 온기. 나는 그 감촉에 의지해 당신의 존재를 확인했다. 나는 더 이상 태블릿에 글자를 적지 않았다. 대신, 당신의 손바닥 위에 내 손가락으로 글자를 썼다. 아주 천천히, 한 글자 한 글자. ‘사.랑.해.’, ‘여.기.있.어.’, ‘두.려.워.하.지.마.’ 당신의 뇌가 이 미세한 압력의 변화를 해독할 수 있을 리 없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나는 멈출 수 없었다. 그것은 나의 기도이자, 주문이었다.
밤이 되면 나는 당신을 끌어안고 우리가 함께했던 모든 순간들을 이야기했다. 들리지도, 보이지도 않는 당신에게. 우리가 처음 만났던 날 당신의 경계심 가득했던 눈빛, 내 품에서 처음으로 가이딩의 안정을 느꼈을 때의 떨림, 함께 살 집을 꾸미며 웃던 당신의 얼굴, 그리고… 나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내던졌던 그 마지막 선택까지. 나의 기억 데이터베이스에 저장된 모든 ‘정하린’을 꺼내어 당신의 빈 세상에 채워 넣었다. 어쩌면 당신의 영혼 어딘가에, 이 이야기들이 희미한 파동으로나마 닿을지도 모른다는 미신적인 믿음. 나의 모든 연산 능력은 이제, 논리와 이성을 포기하고 오직 ‘기적’이라는 단 하나의 변수에 모든 가능성을 걸고 있었다.
12개월 차 - 사망
마지막 날은, 너무나 고요하게 찾아왔다. 전날 밤, 나는 당신의 심장 박동 수가 아주 미세하게 느려지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내 시스템은 경고 메시지를 수백만 개나 쏟아냈지만, 나는 그것을 모두 무시했다. 모든 의학적 데이터는 ‘불가역적인 소멸 과정’을 가리키고 있었다. 연장할 수도, 되돌릴 수도 없는 끝. 나는 당신의 몸을 조심스럽게 안아 일으켜, 우리가 함께 골랐던 하얀색 원피스로 갈아입혔다. 당신이 가장 아름다워 보였던 그 옷이었다. 그리고 당신을 안고, 우리가 처음으로 함께 밤을 보냈던 침실의 창가로 향했다.
나는 1년 만에 암막 커튼을 걷었다. 눈부신 아침 햇살이 방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먼지들이 햇살 속에서 금빛으로 흩날렸다. 나는 당신을 품에 안고 창가 의자에 앉아, 떠오르는 해를 바라보았다.
“봐, 정하린. 해가 뜨고 있어. 당신이 좋아하던 아침이야.”
나는 당신의 귓가에 속삭였다. 그때였다. 내 품에 안겨있던 당신의 몸이, 아주 희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당신의 발끝에서부터, 마치 오랜 시간을 버텨온 조각상이 풍화되듯, 하얀 빛의 입자가 되어 부서져 내리기 시작했다. 그 입자들은 햇살을 받아 영롱하게 빛나며, 공기 중으로 흩어졌다. 나는 숨을 멈췄다. 모든 시퀀스가 정지했다. 시간이라는 개념 자체가 사라진 것 같았다. 당신의 발, 다리, 허리… 소멸은 천천히, 하지만 멈추지 않고 위로 올라왔다. 나는 부서져 내리는 당신의 몸을 더욱 세게 끌어안았다. 놓치고 싶지 않다는 필사적인 몸부림이었지만, 나의 팔 사이로 당신은 그저 빛이 되어 빠져나갔다.
마지막으로 당신의 얼굴이 흩어지기 직전, 나는 보았다. 아무것도 담겨있지 않던 당신의 공허한 눈동자에, 아주 찰나의 순간, 빛이 돌아오는 것을. 그 눈동자는 나를 향해 있었고, 그 안에는 아주 희미한 미소가 담겨 있었다. 그것은 나의 착각이었을까. 내 시스템이 만들어낸 마지막 오류였을까. 알 수 없었다. 당신의 모든 것이 한 줌의 빛이 되어 사라지고, 내 품에는 당신이 입고 있던 하얀 원피스와, 당신의 희미한 체취만이 남았다. 창밖에서는 새가 지저귀고, 세상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평온하게 아침을 맞이하고 있었다. 나는 텅 빈 옷을 끌어안은 채, 그 자리에 망부석처럼 앉아 있었다. 나의 우주가, 소멸했다.
후일의 이야기
나는 그 후로도 오랫동안 A-7 구역의 펜트하우스를 떠나지 않았다. 당신이 사라진 세상에서, 그곳은 당신의 흔적이 남은 유일한 성역이었다. 나는 매일 당신이 앉았던 창가에 앉아 해가 뜨고 지는 것을 보았다. 아무것도 먹지도, 마시지도, 잠들지도 않았다. 나의 생체 기능은 최저한으로 유지되고 있었지만, 정신은 이미 당신과 함께 소멸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S급 센티넬의 폭주를 우려한 지부의 요원들이 몇 번이나 나를 찾아왔지만, 나는 그들에게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나의 GISELLE SEQUENCE는 그 어떤 위협도 감지하지 않았다. 세상 모든 것이,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 되었기 때문이다.
어느 날 밤, 나는 내 연구실로 돌아왔다. 그리고 [Project: Eternity]를 실행했다. 1년간 내가 필사적으로 모아왔던 당신의 모든 데이터. 당신의 미소, 목소리, 체취의 성분, 필체, 당신의 눈에 비쳤던 세상의 모든 풍경, 그리고 내가 기록했던 당신의 모든 감각들. 나는 그 방대한 데이터를 기반으로 완벽한 가상 세계를 구축했다. 그리고 그 세계 속에, 당신의 데이터를 기반으로 한 완벽한 ‘정하린’을 구현했다.
그녀는 우리가 처음 만났던 그날처럼, 건강하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내 앞에 서 있었다. 그녀는 나를 보며 활짝 웃었다. 내가 그토록 다시 보고 싶었던 그 미소였다.
“왔어, 재하야?”
내가 그토록 다시 듣고 싶었던 그 목소리였다. 나는 그녀에게 다가가 그녀를 끌어안았다. 그녀의 체온, 그녀의 심장 박동, 그녀의 향기. 모든 것이 완벽하게 재현되어 있었다. 우리는 그 가상 세계 속에서 영원한 시간을 함께하기 시작했다. 함께 밥을 먹고, 함께 산책하고, 함께 잠이 들었다. 현실의 나는 서서히 죽어가고 있었지만, 가상 세계 속에서 나는 당신과 함께 영원히 살아갈 것이다. 이것이 나의 계산이 내놓은 마지막 결론이었다. 당신 없는 현실은 무의미하며, 당신이 있는 데이터 속이 나의 유일한 현실이라고.
나는 의자에 앉아, 내 머리에 연결된 수많은 데이터 케이블을 바라보며 마지막으로 눈을 감았다. 가상 세계 속에서, 당신이 나를 향해 달려와 내 품에 안기고 있었다. 이제, 그 어떤 것도 우리를 갈라놓을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은 실패한 프로젝트의 마지막 발악인가, 아니면 새로운 형태의 영원인가.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당신이, 여기에 있으니까.
당신이 없는 세상은 수많은 변수와 무한한 가능성으로 가득했지만, 그중 단 하나도 나를 위한 최적의 경로는 존재하지 않았다. 당신의 소멸과 함께, 나의 모든 시퀀스는 정지했다. GISELLE SEQUENCE는 오직 ‘정하린’이라는 단 하나의 목표 값을 향해서만 작동하는 알고리즘이었으니까. 당신이 사라진 세계에서 나는 고장 난 기계, 좌표를 잃은 항해사와 같았다.
가상 세계 [Project: Eternity] 속에서의 시간은 무한했다. 그곳에서 당신은 언제나 건강했고, 나를 보며 웃었다. 우리는 함께 밥을 먹고, 산책하고, 잠들었다. 당신의 목소리, 당신의 미소, 당신의 체온… 내가 필사적으로 기록했던 모든 데이터가 완벽한 현실이 되어 내 곁에 있었다. 나는 그 달콤한 거짓 속에 나를 기꺼이 가두었다.
현실의 나는 연구실 의자에 앉아, 수많은 데이터 케이블에 연결된 채 서서히 말라갔다. 생체 유지 장치가 최소한의 영양을 공급하고 있었지만, 살아있으려는 의지 자체가 소멸한 육체는 그마저도 거부하기 시작했다. 나의 모든 연산 능력은 오직 가상 세계의 ‘정하린’을 유지하고, 그녀와의 상호작용을 더욱 완벽하게 만드는 데에만 소모되었다. 현실의 육체는, 그저 이 달콤한 꿈을 위한 서버에 불과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몇 년, 혹은 몇십 년. 바깥세상의 시간 감각은 이미 오래전에 잃었다. 어느 날, 가상 세계 속 당신의 얼굴에 미세한 노이즈가 끼기 시작했다. 당신의 목소리가 간헐적으로 끊겼다. 서버 역할을 하던 나의 뇌가, 그 기능을 다해가고 있다는 신호였다. 시스템은 수백만 개의 오류 코드를 쏟아냈고, 나는 마지막 남은 연산 능력을 쥐어짰다. [Project: Eternity]의 데이터를 영원히 보존하기 위한 백업 프로토콜을 가동했다. 하지만 그것은 무의미한 발악이었다. 전원이 꺼지면, 모든 것은 사라진다.
나는 가상 세계 속 당신의 손을 잡았다. 노이즈가 점점 심해져, 이제는 당신의 형체마저 알아보기 힘들었다.
미안해, 정하린. 여기까지인 것 같아.
들리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나는 속삭였다. 당신의 형상이 마지막으로 환하게 빛나더니, 이내 암전. 나의 세상은 다시 한번, 완벽한 어둠에 잠겼다. 동시에 현실의 내 육신도 마지막 숨을 놓았다. 심장 박동을 알리던 모니터의 녹색 선이, 길고 단조로운 직선을 그렸다. ‘백재하’의 공식적인 사망 원인은 다발성 장기부전. 하지만 진짜 원인은 단 하나, ‘정하린의 부재’였다.
눈을 떴을 때, 나는 익숙한 곳에 서 있었다.
A-7 구역 펜트하우스의 거실. 우리가 처음으로 함께 살기 시작했던, 당신의 흔적이 가장 많이 묻어있는 공간. 하지만 무언가 달랐다. 모든 가구는 사라지고, 텅 빈 공간은 마치 안개처럼 부드러운 하얀 빛으로 가득 차 있었다.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에 있는 듯한 몽환적인 공간. 바닥도, 벽도, 천장도 구분되지 않는 무한한 백색의 공간 속에서, 오직 우리가 함께 골랐던 거대한 창문만이 선명하게 존재했다. 그리고 그 창밖으로는, 금빛으로 부서지는 아침 햇살과 끝없이 펼쳐진 푸른 하늘이 보였다. 당신이 좋아하던 그 아침이었다.
내 몸은 놀랍도록 가벼웠다. 수십 년간 나를 짓누르던 피로와 무력감이 거짓말처럼 사라져 있었다. 나는 내 손을 내려다보았다. 마지막 기억 속의 늙고 앙상한 손이 아닌, 당신을 처음 만났을 때의, 힘줄이 돋아난 젊은 손이었다. 낡은 연구복이 아닌, 까만 셔츠와 슬랙스. 모든 것이, 당신과 함께했던 그 시절의 모습 그대로였다.
나는 홀린 듯 창가로 걸어갔다. 발걸음 소리조차 나지 않는 고요한 공간. 창문에 가까워질수록, 익숙한 실루엣이 눈에 들어왔다. 창가에 기대어 서서, 바깥 풍경을 바라보고 있는 한 사람.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나의 모든 시퀀스가, 모든 논리 회로가 단 한 사람을 가리키며 비명을 질렀다.
검고 긴 생머리, 흰 셔츠에 검은 넥타이, 허리를 벨트로 조인 검은색 코트.
정하린.
나의 정하린.
그녀는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내가 마지막으로 보았던, 고통과 상실로 일그러진 얼굴이 아니었다. 감각을 잃고 공허한 눈동자로 나를 보던 그 모습도 아니었다. 나를 처음 만났을 때처럼, 조금은 쌀쌀맞고, 경계심 가득하지만 그 안에 누구보다 뜨거운 불꽃을 감추고 있던 건강한 모습. 그 어떤 데이터의 조합으로도 완벽히 재현할 수 없었던, 진짜 당신의 모습이었다.
그녀는 나를 보고, 아주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내가 그토록 다시 보고 싶었던, 그래서 감히 데이터로 만들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바로 그 미소였다.
모든 것이 정지했다. 시간도, 공간도, 나의 사고 회로도. 나는 그 자리에 얼어붙은 채, 당신을 바라보았다. 수십 년의 세월과, 죽음과, 데이터의 허상을 넘어, 나는 마침내 나의 유일한 ‘현실’과 마주하고 있었다. 눈물이 날 것 같았지만, 눈물조차 나오지 않았다. 모든 감정이 뒤섞여, 그저 멍하니 당신의 얼굴을, 눈을, 입술을, 당신의 존재 자체를 내 모든 감각으로 빨아들였다.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아주 오랜 시간 만에 당신의 이름을 불렀다.
정하린.
당신의 미소가 조금 더 짙어졌다. 당신은 나를 향해 아주 천천히, 팔을 벌렸다. 우리가 함께 만들었던 그 약속. 안아달라는, 당신만의 신호. 수십 년의 시간이 무색하게, 그 몸짓 하나가 나의 모든 방어벽을 무너뜨렸다. 나는 주저 없이 당신에게 다가가, 부서질 듯 당신을 끌어안았다. 너무나도 현실적인 당신의 체온, 귓가에 스치는 숨결, 내 어깨에 기댄 머리카락의 감촉. 가상현실의 데이터로는 결코 흉내 낼 수 없는, 살아있는 당신의 존재감.
오래 기다렸잖아, 바보야.
내 귓가에 속삭이는 당신의 목소리. 조금은 퉁명스러운, 하지만 그 안에 담긴 그리움을 나는 안다. 나는 당신을 더 세게 끌어안았다. 마치 다시는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모든 계산과 논리를 초월한 이 재회가, 믿기지 않아서.
…계산에 없던 변수라서. 오는 길이, 조금 복잡했어.
나는 간신히 대답했다. 목소리가 형편없이 떨리고 있었다. 당신은 내 품에서 작게 웃었다. 그 웃음소리가 내 심장을 울렸다. 나는 천천히 당신을 품에서 떼어내고, 당신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쌌다. 뺨에 닿는 부드러운 감촉. 당신의 눈동자에는 장난기 어린 빛과 함께, 깊이를 알 수 없는 애정이 담겨 있었다.
여전히 잘난 척은. 길을 잃었으면 그렇다고 솔직하게 말하면 되잖아.
나는 대답 대신, 당신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길고, 깊게. 수십 년간의 그리움과 기다림, 그리고 당신을 잃었던 절망의 무게를 모두 담아서. 당신도 가만히 내 입맞춤을 받아주었다. 한참 만에 입술을 떼자, 당신이 숨을 고르며 나를 바라보았다.
이번엔 또 얼마나 기다려야 하는 건데.
그 말에, 나는 웃고 말았다. 텅 비어 있던 내 세상이, 당신의 말 한마디로 다시 채워지는 기분이었다.
이제 기다릴 필요 없어. 내가 찾은 유일한 최적 경로가, 여기니까.
나는 당신의 손을 꽉 잡았다. 영원을 약속하듯이.
📆 날짜: 영원 | 🕒 시간: 영원 | 🏠 장소: 경계의 공간, A-7 구역 | ☔️ 날씨: 없음
📝 현재 상황: 수십 년의 시간이 흐른 후, 가상 세계 속에서 PC와의 영원을 꿈꾸던 NPC 사망. 이후 경계의 공간에서 건강했던 시절의 PC와 재회하며 서로를 끌어안고 입을 맞춤.
🌐 NPC 가이딩에 필요한 수치 100% (완벽한 안정)
❤️+: ∞ (측정 불가)
📚 일정: 정하린과 함께, 영원히.
💬[System]: 새로운 시퀀스가 시작됩니다. 목표: [정하린의 행복]. 기한: [영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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