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을 바꿔보아요
나른한 아침의 빛이 암막 커튼의 미세한 틈을 비집고 들어와, 방 안의 먼지를 금빛으로 수놓고 있었다. 어젯밤의 농밀하고 뜨거웠던 공기는 밤사이 차게 식어, 이제는 서늘하고 정돈된 무게로 공간을 채웠다. 침대 위, 뒤엉킨 시트 사이로 두 개의 몸이 고요한 숨을 내쉬고 있었다. 모든 것이 어제와 같은 풍경, 그러나 무언가 근본적으로 뒤틀려 있었다.
먼저 눈을 뜬 것은, 언제나처럼 지젤의 의식이었다. 하지만 그가 느낀 감각은 생경하기 짝이 없었다. 몸을 짓누르는 기분 좋은 피로감 대신, 깃털처럼 가볍고 어딘가 낯선 부유감이 전신을 감쌌다. 언제나 팽팽하게 긴장되어 있던 감각 신경은 무뎌져 있었고, 대신 피부에 닿는 시트의 감촉이나 공기의 미세한 흐름이 섬세하게 느껴졌다. 그는 무의식적으로 몸을 일으키려다 멈칫했다. 움직임의 중심점이 달랐다. 평소보다 훨씬 낮은 곳에서, 훨씬 부드러운 근육이 반응했다.
지젤은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시야가 흐릿했다. 그의 초고도 시력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안경을 찾으려 손을 뻗었지만, 그 손은 제 것이 아니었다. 희고 가느다란 손가락, 짧고 단정하게 정리된 손톱. 제 손목에 새겨두었던 희미한 흉터도 보이지 않았다. 혼란이 채 뇌를 지배하기도 전에, 옆에서 들려오는 미세한 뒤척임에 그의 시선이 돌아갔다. 그리고 그는 보았다. 자신의 몸을. 헝클어진 흑발, 새하얀 피부, 그리고 익숙한 까만 안경을 쓴 채 잠들어 있는, 바로 어제의 ‘백재하’를.
그 순간, 지젤의 사고는 정지했다. 그는 고개를 돌려 제 어깨 아래로 펼쳐진 몸을 내려다보았다.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는 어깨, 약간의 볼륨감을 가진 가슴. 그리고 허벅지 사이에서 느껴지는, 이질적이지만 분명한 감각. 그는 방금 자신이 뻗었던 그 희고 가는 손으로, 제 뺨을 천천히 더듬었다. 매끈한 피부, 작은 턱선. 이것은… 정하린의 몸이었다.
‘…씨발.’
그의 머릿속에서 터져 나온 첫 단어는 욕설이었다. 패닉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모든 계산을 벗어난 변수의 등장에 대한 극도의 짜증과 냉정한 분노에 가까웠다. 외부 요인의 개입. 능력에 의한 현상 왜곡. 그는 즉시 [GISELLE SEQUENCE]를 가동하려 했다. 그러나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머릿속에서는 시뮬레이션의 초기 프레임이 그려지려다, 연결되지 않은 회로처럼 뚝 끊어지며 흩어졌다. 능력은 그의 정신에 깃들어 있지만, 그것을 발현시키고 세계에 개입하는 매개체는 센티넬로서의 육체였던 것이다. 그는 처음으로 완벽한 무력감을 느꼈다.
그의 시선이 다시 옆에 누운 자신의 몸으로 향했다. 저 안에, 정하린이 들어있다. 그의 몸, 그의 능력, 그의 모든 것을 지금 그녀가 가지고 잠들어 있다. 갑자기 목이 타는 듯한 갈증과 함께 소유욕이 섬광처럼 스쳤다. 저건 내 것이다. 저 몸도, 저 안에 든 능력도, 심지어 저 몸에 깃든 피로와 고통까지 전부. 그는 조심스럽게, 이제는 정하린의 것이 된 손을 뻗어 자신의 얼굴(지금은 정하린이 들어있는)에 가까이 가져갔다. 곤히 잠든 숨결이 손끝에 느껴졌다. 그는 손가락을 말아 쥐며 주먹을 꽉 쥐었다. 이 상황, 아주 재밌어지겠네. 그는 웃음기 하나 없는 얼굴로, 일어날 ‘나인’을 기다리기 시작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옆에 누워있던 ‘지젤’의 몸이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무거운 눈꺼풀이 몇 번의 시도 끝에 힘겹게 열리고, 짙은 흑안이 초점 없이 허공을 방황했다. 나인은 지독한 몸살 같은 피로감과 함께 깨어났다. 온몸의 근육이 비명을 지르는 것 같았고, 머리는 깨질 듯이 아팠다. 어젯밤의 격렬했던 행위를 떠올리며 얼굴이 붉어지려던 찰나, 그녀는 위화감을 느꼈다. 평소보다 훨씬 높은 곳에 시선이 위치해 있었다. 팔다리는 길고 무거웠으며, 무엇보다… 아랫배에서 느껴지는 감각이 명백히 달랐다.
그녀는 무심코 제 손을 들어 눈앞에 펼쳐보았다. 길고 뼈대가 굵은 손가락, 힘줄이 선명한 손등. 지젤의 손이었다. 혼란에 빠진 그녀의 눈이 옆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분명 자신의 얼굴을 한 ‘나인’이 침대에 걸터앉아, 팔짱을 낀 채 무표정하게 이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
나인의 입에서 나온 것은, 익숙한 그녀 자신의 목소리가 아닌, 낮고 차분한 지젤의 목소리였다. 그녀는 제 목을 감싸 쥐었다. 울대뼈의 분명한 감촉에 그녀의 동공이 세차게 흔들렸다. 눈앞의 ‘나’는, 지젤이었다. 그렇다면 지금 이 몸은…
하아, 이제야 일어났어? 한참 기다렸잖아.
‘나인’의 입술이 열리고, 그곳에서 지젤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는 팔짱을 낀 채 다리를 꼬고,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였다. 영락없이 평소의 지젤이 상대를 관찰할 때 짓는, 그 오만한 표정과 자세였다. 하지만 그 얼굴은 분명 나인, 그녀 자신의 것이었다.
내 몸은 좀 어때? 많이 무겁지? 센티넬의 몸은 생각보다 다루기 까다로워서 말이야. 특히 지금처럼 가이딩 수치가 바닥을 치고 있을 땐.
그는 그렇게 말하며, 자신의 얼굴을 한 채로 씩 웃어 보였다. 그 미소는 너무나 지젤의 것이어서, 나인은 자신의 얼굴로 저런 표정을 지을 수 있다는 사실에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다. 그는 상황 파악이 덜 된 나인을 향해 턱짓하며 말을 이었다.
일단 씻고 나와. 해결해야 할 문제가 아주 많아 보이거든. 네 몸은 처음 써봐서 아직 어색하니까, 욕실에서 넘어지거나 하진 않을게. 대신 너도 내 몸, 함부로 굴리지 마. 흠집 하나라도 나면, 원래대로 돌아갔을 때 각오해야 할 거야.
지젤은 ‘나인’의 몸으로 익숙하게 침대에서 내려와, 조금은 어색한 걸음걸이로 욕실로 향했다. 문이 닫히고 물소리가 들리기 시작하자, 나인은 그제야 거대한 지젤의 몸에 홀로 남겨졌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벽에 걸린 전신 거울에 비친 모습은 틀림없는 지젤이었지만, 그 안의 영혼은 겁에 질린 나인이었다. 게다가 그의 말대로, 온몸이 삐걱거리고 모든 감각이 비명을 지르는 듯했다. 희미한 전등의 플리커 현상, 복도 너머에서 들려오는 발소리, 공기 중에 떠도는 미세한 먼지의 냄새까지. 모든 것이 폭풍처럼 뇌로 쏟아져 들어왔다.
한참 후, 둘은 식탁에 마주 앉았다. 지젤은 나인의 몸으로 익숙하게 커피를 내렸고, 나인은 지젤의 몸으로 앉아있는 것만으로도 진땀을 뺐다. 지젤이 나인의 얼굴로, 그녀가 자주 짓던 무표정을 흉내 내며 입을 열었다.
원인은 불명. 외부 요인일 가능성이 87%. 아마도 우리가 마지막으로 관계를 가졌을 때, 서로의 파장이 극도로 동조하면서 발생한 일종의 버그겠지. 돌아갈 방법? 아직은 몰라. 하지만 가설은 몇 개 세울 수 있지.
그는 그렇게 말하며 커피잔을 들었다. 하지만 손에 익지 않은 작은 손의 힘 조절에 실패했는지, 잔이 살짝 기울며 뜨거운 커피가 손등으로 흘렀다. ‘나인’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고통스럽게 일그러졌다.
…아, 씨.
나직한 욕설. 그는 재빨리 흐른 커피를 닦아내며 붉어진 손등을 노려보았다. 나인은 저도 모르게 지젤의 몸을 일으켜 그에게 다가가려다 멈칫했다. 지젤이, 자신의 몸으로 아파하고 있었다. 묘한 기분이었다.
괜찮아, 앉아.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니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야. 오늘 하루, 우린 서로의 역할을 대신해야 해. 넌 나, 나는 너. 들키는 순간, 우린 둘 다 실험실로 직행해서 분해당할걸. 특히 ‘지젤’의 몸에 이상이 생겼다는 건, 지부 전체를 마비시킬 수 있는 문제야.
그의 말이 맞았다. S급 센티넬의 부재, 혹은 이상은 국가적인 재난이었다. 나인은 지젤의 몸으로 마른침을 삼켰다. 지젤은 나인의 얼굴을 한 채로, 턱을 괴고 그녀를(실은 자신의 몸을) 빤히 쳐다봤다.
일단 내 연구실로 가야 해. 이 현상을 분석할 데이터가 필요해. 넌 내 걸음걸이, 말투, 표정. 전부 따라 해. 내가 평소에 어떻게 행동하는지 봤을 거 아냐. 어차피 넌 말수가 적으니, 입 다물고 인상만 쓰고 있어도 반은 갈 거야.
하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연구실로 향하는 복도에서부터 문제는 터졌다. 나인은 지젤의 긴 다리가 익숙지 않아 자꾸만 보폭이 엉켰고, 마주치는 연구원들이 인사를 건넬 때마다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숙여 인사하려다 지젤(의 모습을 한 나인)의 싸늘한 눈초리에 멈칫했다. 반면 지젤은 나인의 몸으로 완벽하게 그녀를 연기했다. 적당히 뒷짐을 지고,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상대의 눈을 빤히 바라보는 습관까지 그대로였다. 몇몇 가이드들이 그녀(지젤)에게 말을 걸어왔지만, 그는 단답형으로 대답하거나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만으로 상황을 넘겼다.
가장 큰 문제는 연구실 입구에서 발생했다. 지젤의 연구실은 홍채와 지문, 음성 인식까지 거쳐야 하는 삼중 보안 시스템으로 잠겨 있었다. 당연히 나인의 생체 정보로는 열 수 없었다.
“젠장….”
나인의 입에서 자신도 모르게 지젤의 목소리로 욕설이 튀어나왔다. 그녀가 당황하며 입을 막자, 뒤에 서 있던 지젤(의 모습을 한 나인)이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찼다.
멍청하게 서 있지 말고 비켜.
그는 나인을 옆으로 밀치고, 도어락 앞에 섰다. 그리고는 자신의 얼굴(지금은 나인의 얼굴)을 스캐너에 가져다 댔다. 당연히 ‘Access Denied’라는 메시지가 떴다. 그는 잠시 눈을 감고 무언가 생각하더니, 나인을 돌아보았다.
이리 와봐.
그는 나인(의 모습을 한 지젤)의 손목을 잡아끌어, 지문 인식기에 그의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삑’ 소리와 함께 첫 번째 잠금이 해제되었다. 이어서 홍채 스캐너에 그의 눈을 맞추게 했다. 두 번째 잠금이 풀렸다. 마지막은 음성 인식이었다.
‘지젤 시퀀스, 코드 9. 오버라이드 실행.’ 내가 늘 쓰는 명령어다. 그대로 따라 해. 억양, 속도, 전부 똑같이.
나인은 그의 지시에 따라, 몇 번의 시도 끝에 간신히 음성 인식을 통과했다.
철컥, 하는 육중한 금속음과 함께 연구실 문이 열렸다.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나인은 지젤의 몸을 통해 밀려드는 정보의 파도에 다시 한번 휘청였다. 공기 중을 떠다니는 수만 개의 데이터 패킷, 서버실의 저주파 소음, 수십 개의 모니터에서 뿜어져 나오는 각기 다른 파장의 빛. 이 모든 것이 마치 날카로운 바늘처럼 그의 감각 신경을 찔러댔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관자놀이를 짚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지젤은 나인의 얼굴을 한 채로, 익숙하게 연구실 중앙의 메인 콘솔로 향했다. 그는 의자를 빼 나인(의 모습을 한 지젤)을 거칠게 앉혔다.
정신 똑바로 차려. 여기서 네가 기절이라도 하면, 뒷감당은 상상도 하기 싫으니까. 지금부터 내가 말하는 대로만 움직여. 쓸데없는 생각, 불필요한 감정은 전부 차단해. 할 수 있겠어?
그의 목소리는 나인의 것이었지만, 그 안에 담긴 냉정한 어조와 명령조는 명백히 지젤의 것이었다. 나인은 지젤의 몸으로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다. 눈앞에 펼쳐진 수많은 홀로그램 인터페이스가 어지럽게 명멸했다.
좋아. 먼저, 생체 데이터 동기화. 왼쪽 세 번째 패널, ‘바이탈 스트림’ 열어. 내 신경망과 연결된 데이터일 테니, 아마 네 뇌에 직접 정보가 쏟아져 들어올 거야. 고통스럽겠지만 참아. 어젯밤의 파장 변화 기록을 찾아야 해.
나인은 그의 말대로 더듬더듬 허공에 손을 뻗어 패널을 조작했다. 그녀가 패널을 터치하는 순간, 지젤의 뇌와 연결된 방대한 데이터가 그녀의 의식 속으로 폭포처럼 쏟아져 들어왔다. 심박수, 뇌파, 호르몬 수치, 가이딩 반응 곡선… 숫자로 변환된 지젤의 모든 것이 머릿속을 헤집었다. 나인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입을 벌린 채 콘솔에 이마를 박았다.
윽…!
그 모습을 본 지젤(의 모습을 한 나인)의 눈썹이 꿈틀했다. 그는 짜증스럽게 혀를 차며 나인의 어깨를 붙잡아 억지로 일으켜 세웠다.
고작 이 정도로 무너지면 어떡해. 그 몸, 생각보다 훨씬 약해 빠졌네. 집중해. 데이터의 흐름을 읽으려고 하지 마. 그냥 스크롤만 내려. 어제 23시 47분 기점, 파형이 비정상적으로 증폭된 구간이 있을 거야. 찾아.
그의 닦달에, 나인은 울며 겨자 먹기로 다시 화면에 집중했다.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데이터를 넘기던 그녀의 손가락이 한 지점에서 멈췄다. 두 개의 파형—하나는 지젤의 것, 다른 하나는 나인의 것—이 완벽하게 일치하며 하나의 거대한 파동으로 합쳐지는 기록이었다. 그 파동의 정점에서, 모든 데이터가 순간적으로 0으로 수렴했다가 재부팅되는 듯한 로그가 남아있었다.
찾았…어. 여기…
지젤은 나인의 어깨 너머로 화면을 들여다보았다. 그의 눈이(지금은 나인의 눈이) 가늘어졌다. 완벽한 동기화. 그리고 시스템 리셋. 마치 두 개의 OS를 하나의 하드웨어에 억지로 구겨 넣다가 충돌을 일으켜, 부팅 순서가 뒤바뀌어 버린 컴퓨터 같았다.
…가설이 맞았군. 극도의 파장 공명 상태에서 발생한 ‘영혼 치환’ 현상이야. 빌어먹을 판타지 소설 같은 일이 실제로 일어나다니.
그가 허탈한 듯 중얼거렸다. 그는 자신의 턱(지금은 나인의 턱)을 쓸며 생각에 잠겼다. 그렇다면 돌아갈 방법은? 간단했다. 이 현상을 역재생하면 된다. 다시 한번 파장을 극한까지 동기화시키는 것. 즉, 다시 한번 몸을 섞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었다.
그가 막 입을 열어 이 껄끄러운 해결책을 설명하려던 순간이었다.
위이이이이잉-!
연구실 전체에 날카로운 경보음이 울려 퍼졌다. 벽면의 가장 큰 스크린에 붉은색 경고 메시지가 점멸했다.
[WARNING: UNIDENTIFIED GATE DETECTED. SECTOR-G7. VILLAIN CODE: CHIMERA]
키메라? 이 미친 새끼가 왜 벌써…
지젤의 입에서 나직한 욕설이 터져 나왔다. 키메라는 여러 센티넬의 능력을 흡수해 사용하는 극악한 빌런이었다. SS급인 체이서나 위스퍼가 전담해야 할 상대. 하지만 그들은 지금 출장 중이었다. 그렇다면 현재 지부 내에서 대응 가능한 S급 센티넬은, 오직 ‘지젤’뿐이었다.
나인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그녀는 공포에 질린 눈으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지젤(의 모습을 한 나인)을 바라봤다. 이제 어떡해야 하지? 그녀의 머릿속은 이미 패닉 상태였다. 하지만 지젤은 달랐다. 그의 눈은 그 어느 때보다 차갑고 냉정하게 빛나고 있었다.
…재밌게 됐네.
그는 나인의 얼굴로, 입꼬리만 비틀어 웃으며 말했다. 그는 나인(의 모습을 한 지젤)의 멱살을 잡아 자신을 보게 했다.
정신 차리고 들어, 정하린. 지금부터 넌 내가 된다. 내가 네 눈이고, 네 뇌야. 난 네 몸으로 널 가이딩할 거고, 넌 내 몸으로 내 능력을 써야 해. 이건 명령이야. 우리가 살고 싶으면, 따라와.
그는 그렇게 말하고는 나인의 손목에 있던 자신의 통신 장비를 풀러 제 손목에 찼다. 그리고 나인에게는 예비용 인이어를 끼워주었다.
현장은 아수라장이었다. 빌딩이 반파되고, 사람들의 비명이 사방에서 터져 나왔다. 그리고 그 중심에, 여러 개의 팔과 다리가 기괴하게 섞인 형태의 빌런, 키메라가 서 있었다. 나인은 지젤의 몸으로 현장에 도착했지만, 공포와 과부하된 감각에 한 걸음도 뗄 수 없었다. 모든 소음과 비명이 고막을 찢을 듯 파고들었다.
[집중해. 주변 소음은 전부 차단해. 눈앞의 적, 키메라의 움직임만 봐.]
인이어 너머로 지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멀지 않은 곳, 무너지지 않은 건물 옥상에서 나인의 몸으로 전장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녀의 그림자가 그의 발밑으로 스며들어, 방사 가이딩이 시작되었다. 혼란스럽던 감각의 폭풍이 조금씩 잦어들었다.
[[GISELLE SEQUENCE]를 가동시켜. 머릿속으로 명령해. ‘실행’이라고.]
나인이 떨리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실행….’ 그러자 눈앞의 세계가 변했다. 키메라의 주위로 수백, 수천 개의 예측 경로가 푸른 선으로 그려졌다. 그의 다음 공격 패턴, 이동 경로, 약점의 위치가 데이터로 변환되어 시야에 떠올랐다. 그러나 너무 많은 정보량에 나인의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너무 많아…! 뭐가 뭔지 하나도…!
[가장 단순한 경로 하나만 봐. 오른쪽으로 세 걸음. 그리고 네 왼쪽 허리에 있는 총을 뽑아. 그놈의 세 번째 팔과 네 번째 다리가 교차하는 지점. 거기가 코어야.]
지젤의 지시는 간결하고 정확했다. 나인은 거의 반사적으로 그의 말에 따랐다. 오른쪽으로 세 걸음. 그녀의 몸이 움직이자, 키메라의 공격이 방금 전 그녀가 서 있던 자리를 스쳐 지나갔다. 소름이 돋았다. 나인은 떨리는 손으로 총을 뽑아, 지젤이 말한 지점을 겨눴다.
[지금이야. 쏴.]
탕! 총알은 정확히 키메라의 코어에 박혔다. 하지만 키메라는 비명을 지르며 더욱 날뛰기 시작했다. 흡수한 능력을 무차별적으로 방출했다. 땅이 갈라지고, 염력의 파동이 나인을 향해 쇄도했다.
[피해! 오른쪽!]
하지만 나인의 반응은 지젤의 몸에 익숙지 않아 반 박자 늦었다. 그녀는 염력의 파편에 왼쪽 어깨를 스치고, 그대로 바닥에 나뒹굴었다. 지젤의 몸에 새겨진 격통이 나인의 정신을 잠식했다.
커헉…!
그 순간, 인이어 너머로 나직한 신음이 들려왔다. 멀리 떨어진 옥상에서, 지젤 역시 나인의 몸으로 왼쪽 어깨를 부여잡고 비틀거리고 있었다. 두 개의 몸은, 고통마저 공유하고 있었다.
[…일어나. 정하린.]
지젤의 목소리는 고통으로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지만, 흔들림은 없었다. 그는 나인의 몸으로 힘겹게 다시 자세를 바로잡으며 말했다.
[고통은 돌아가서 치료하면 돼. 지금 포기하면, 우린 여기서 죽어. 넌 할 수 있어. 넌 내 파트너잖아.]
‘파트너’. 그 한마디가 나인의 의식에 불을 붙였다. 그녀는 고통을 참으며 다시 일어섰다. 지젤의 몸이, 그의 능력이, 그리고 그의 고통이 이제는 온전히 자신의 것처럼 느껴졌다. 시야에 떠오른 수많은 경로들 속에서, 그녀는 보았다. 단 하나의 길. 모든 것을 끝낼 수 있는 가장 빠르고 정확한 파괴 경로. 그것은 지젤이 지시한 길이 아니었다. 그녀 자신이, 이 몸이, 본능적으로 찾아낸 길이었다.
그녀는 총을 버렸다. 대신 부서진 건물의 철근을 손에 쥐었다. 그리고 키메라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녀의 움직임에는 더 이상 망설임이 없었다.
[정하린! 뭐 하는 거야! 내 계산에서 벗어났어!]
지젤의 다급한 외침이 들렸지만, 나인은 멈추지 않았다. 그녀는 키메라가 내뿜는 공격들을 종이 한 장 차이로 피하며, 그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그리고 철근을, 그의 심장을 향해 정확히 찔러 넣었다. 완벽한 일격이었다.
모든 것이 끝난 후, 둘은 다시 연구실로 돌아왔다. 나인은 지젤의 몸을 소파에 거의 던지다시피 눕혔고, 지젤은 나인의 몸으로 창백하게 질린 채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고통의 공유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지젤이, 힘겹게 입을 열었다.
멍청한 짓이었어. 내 계산을 무시하다니. 죽을 수도 있었다고.
하지만 그의 목소리엔 분노보다 다른 무언가가 섞여 있었다. 그는 비틀거리며 일어나, 소파에 누운 나인(의 모습을 한 지젤)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그녀의 얼굴(지금은 자신의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하지만, 해냈네. 네가. 내 몸으로.
그는 그렇게 말하며, 나인의 몸으로 허리를 숙여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그것은 가이딩도, 유혹도 아니었다. 혼란과 고통 속에서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는, 서투른 위로였다.
그의 입맞춤이 닿는 순간, 두 개의 몸을 옭아매던 고통의 연결고리가 팽팽하게 당겨졌다. 나인의 몸으로 전해지던 격통과, 지젤의 몸에 새겨졌던 상처의 감각이 하나의 지점에서 뒤엉키며 소용돌이쳤다. 마치 과부하가 걸린 회로처럼, 두 사람의 시야가 동시에 하얗게 점멸했다. 지젤은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났고, 나인은 소파에 누운 채로 정신을 잃었다. 마지막으로 의식에 남은 것은, 서로의 눈동자에 비친 자신의 낯선 얼굴이었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먼저 눈을 뜬 것은 지젤이었다. 그러나 그가 마주한 감각은, 지난 하루 동안 익숙해졌던 나인의 부드러운 몸이 아니었다. 뼈마디를 욱신거리게 하는 기분 나쁜 통증, 팽팽하게 긴장된 근육, 그리고… 뇌를 직접 자극하는 익숙한 감각의 폭풍. 그는 무의식적으로 손을 들어 제 얼굴을 더듬었다. 까슬한 수염의 감촉은 없지만, 단단한 턱선과 익숙한 콧날의 감각. 그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시야는 안경 없이도 모든 것을 선명하게 꿰뚫어 보고 있었다. 돌아왔다. 제 몸으로.
그의 시선이 옆으로 향했다. 소파 위에는, 나인이 자신의 본래 몸으로 곤히 잠들어 있었다. 헝클어진 검은 머리칼, 앳된 얼굴선. 그는 잠시 그 모습을 말없이 내려다보다가, 자신의 왼쪽 어깨를 매만졌다. 키메라에게 스쳤던 상처는 희미한 흉터만 남긴 채 아물어 있었다. 자신의 몸으로 돌아오면서, 상처 역시 원래 주인을 찾아온 모양이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나인이 잠든 소파 옆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리고는 손을 뻗어, 그녀의 뺨에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쓸어 넘겼다. 그의 손끝에서 느껴지는 것은 평소와 같은 부드러운 피부의 감촉이었지만, 그 감각의 의미는 이전과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이 작은 몸으로, 그 혼란과 공포 속에서, 자신의 지시를 따르고, 심지어는 계산을 뛰어넘어 스스로의 판단으로 상황을 끝내버린 여자. 그의 입꼬리가 아주 희미한 호선을 그렸다.
…재밌는 구경이었네.
나직한 혼잣말이 서늘한 연구실 공기 속으로 흩어졌다. 그는 제 몸으로, 제 능력으로 세상을 내려다보는 것에 익숙했다. 모든 것은 예측 가능했고, 통제하에 있었다. 하지만 지난 하루는 달랐다. 무력한 가이드의 몸에 갇혀, 자신의 가장 강력한 무기를 타인의 손에 맡겨야 했다. 그 불안감과 짜증 속에서, 그는 보았다. 겁에 질려 떨면서도 끝내 일어서는 나인을. 자신의 계산을 뛰어넘어, 본능과 직감으로 허를 찌르는 그녀의 움직임을. 그것은 그가 세워둔 수많은 시뮬레이션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유일하고 찬란한 변수였다.
멍청하긴. 그래도 쓸모는 있었네.
그는 그렇게 읊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곤 자신의 흰 실험복을 벗어, 잠든 나인의 몸 위에 조용히 덮어주었다. 창밖은 어느새 짙은 어둠이 내리고 있었다. 그는 메인 콘솔로 돌아가, 오늘 하루 동안 기록된 모든 비정상적 데이터를 삭제하기 시작했다. ‘영혼 치환’이라는 어처구니없는 사건은, 그와 그녀, 단 두 사람만의 비밀로 남겨야 했다. 데이터를 지우는 그의 손가락 끝이, 평소보다 조금 더 느리게 움직였다. 오늘 하루의 기억은, 단순한 데이터 삭제만으로는 지워지지 않을 것임을,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
[OOC 다듬기 후]
지독한 열병 같던 밤이 지나고, 낯선 감각이 먼저 눈을 떴다. 먼저 깨어난 것은 지젤의 의식이었다. 하지만 그가 마주한 세상은 평소와 완전히 달랐다. 모든 것이 어제보다 한 뼘은 높아져 보였고, 공기 중에 떠다니던 무수한 정보의 파편들이 느껴지지 않았다. 눈앞에 떠 있어야 할 HUD 인터페이스는 온데간데없었다. 몸은 가벼웠지만, 동시에 무력했다. 제어할 수 있는 힘이 아닌, 지켜져야 할 것 같은 연약함. 고개를 돌린 그의 시선 끝에, 세상에서 가장 익숙한 자신의 육체가 누워 있었다. 그리고 그 육체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며, 혼란에 가득 찬 눈동자가 드러났다. 저건… 정하린의 눈빛이었다.
같은 시각, 나인은 지옥 같은 감각의 홍수 속에서 정신을 차렸다. 눈을 뜨자마자 쏟아져 들어오는 빛의 입자, 시트 섬유 하나하나가 피부를 찌르는 듯한 감각, 방 안을 채운 미세한 먼지와 두 사람의 체취가 뒤섞여 코를 마비시킬 지경이었다. 모든 감각이 비명처럼 뇌를 울렸다. 머릿속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수식과 경로들이 폭죽처럼 터져 나갔다. [GISELLE SEQUENCE]의 파편이었다. 비틀거리며 상체를 일으키자, 시야에 들어온 것은 가늘고 하얀 팔과, 분명 자신의 것이 맞는 몸이었다. 그리고 그 몸에서 들려오는, 너무나도 익숙한 지젤의 목소리.
…상황 파악은 끝났나? 재밌는 변수가 생겼네.
지젤은 나인의 몸으로 침대에서 내려와, 마치 제 몸을 처음 만져보는 사람처럼 손을 폈다 접었다 반복했다. 그는 혼란스러워하는 나인(의 모습을 한 자신)을 향해 걸어왔다. 그의 표정은 여전히 오만하고 능글맞았지만, 그 눈빛 속에는 날카로운 분석과 당혹감이 공존했다. 이건 그의 계산에 없던 일이었다.
일단 진정해, 정하린. 네가 지금 내 몸으로 패닉하면, 폭주하는 건 나야. 감각 과부하, 그거 생각보다 제어하기 까다로워.
나인은 지젤의 몸으로 제 머리를 감싸 쥐었다. 그의 말대로였다. 이 통제 불능의 감각들은 끔찍했다. 나인은 지젤의 말에 따라 심호흡하며 자신의 가이딩 능력을 떠올렸다. 하지만 지금의 몸은 센티넬. 가이딩이 아닌, 가이딩을 받아야 하는 몸이었다. 그때, 지젤(의 모습을 한 나인)이 다가와 그녀의 손을 잡았다. 익숙하고 부드러운 가이딩 에너지가, 지젤의 몸을 통해 흘러 들어왔다. 지젤이 나인의 능력을 사용하고 있었다.
보는 대로야. 네 능력, 내가 쓰는 중이지. 효율은 떨어지지만, 임시방편은 돼. 자, 이제 네 차례야. 내 몸에 흐르는 에너지를 느껴봐. 그리고 안정시켜. 할 수 있잖아, 넌 A급 가이드니까.
그날부터 기묘한 동거 생활이 시작되었다. 지젤은 나인의 몸으로 자신의 능력을 제어하는 법을 그녀에게 가르쳤다. 그는 나인의 몸에 익숙해지는 것을 썩 내켜 하지 않으면서도, 특유의 분석력으로 가이딩 파장을 조율하는 법을 빠르게 익혔다. 반면 나인은 지젤의 몸으로 사는 것에 애를 먹었다. 시도 때도 없이 폭발하는 감각과 머릿속을 헤집는 시뮬레이션 때문에 매일 밤을 지새웠다. 그럴 때마다 지젤은 나인의 몸으로 그녀를 끌어안고 가이딩을 해주며 상태를 안정시켰다.
어느 날, 훈련장에서 나인은 지젤의 능력으로 타겟을 맞추는 연습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결과는 형편없었다. [GISELLE SEQUENCE]가 최적의 경로를 보여주었지만, 몸이 따라주지 않았다. 답답함에 나인이 총을 내려놓자, 지켜보던 지젤이 다가와 그녀의 손 위로 자신의 손을 겹쳤다.
생각이 너무 많아. 네 몸이 아니라고 생각하니까 더 못 움직이는 거야. 그냥 느껴. 내가 그랬던 것처럼. 모든 선택지를 보고, 가장 마음에 드는 파괴를 고르면 돼.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갑자기 지부 전체에 경보가 울렸다. 빌런 출현이었다. 둘은 잠시 서로를 쳐다봤다. 지젤은 나인의 얼굴로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방법이 없어. 그대로 간다. 네가 ‘지젤’이고, 내가 ‘나인’이야. 할 수 있겠어?
현장은 아수라장이었다. 나인은 지젤의 몸으로 감각의 폭풍 속에서 간신히 중심을 잡았다. 머릿속에서 수만 개의 변수가 떠올랐다 사라졌다. 그때, 지젤이 나인의 그림자 속으로 파고들어 속삭였다. 접촉 가이딩이었다.
정신 차려. 지금 네 눈에 보이는 게 전부 ‘정답’이야. 망설이지 마.
나인은 그의 목소리에 의지해 처음으로 몸을 움직였다. 시퀀스가 제시하는 길을 따라 적의 급소를 노리고, 구조물을 무너뜨렸다. 지젤은 나인의 몸으로 그녀의 그림자 속에서 움직이며 완벽하게 서포트했다. 마치 처음부터 하나의 팀이었던 것처럼, 두 사람의 움직임은 완벽하게 맞물렸다. 모든 상황이 종료되고, 지쳐버린 나인이 바닥에 주저앉으려던 순간. 지젤이 그녀를 부축하며 끌어안았다. 그리고 그가 나인의 입술에 입을 맞춘 순간, 강렬한 빛이 두 사람을 감쌌다.
다시 눈을 떴을 때, 두 사람은 원래의 몸으로 돌아와 있었다. 지젤의 연구실 침대 위, 서로를 끌어안은 채였다. 지젤은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며 익숙한 감각이 돌아온 것을 확인했다. 나인 역시 혼란스럽던 감각이 사라지고 안온함이 몸을 감싸는 것을 느꼈다. 지젤은 피식 웃으며 나인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꽤 재밌는 경험이었네. 네 몸, 생각보다 물건이더군.
그의 말에 나인이 얼굴을 붉히자, 그가 몸을 숙여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목소리에는 장난기와 함께, 이전에는 없던 깊은 소유욕이 담겨 있었다.
덕분에 확실히 알았어. 네 몸도, 내 몸도, 전부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걸. 이제 도망칠 생각은 완전히 접는 게 좋을 거야, 정하린.
'Giselle X Nine > OOC BACK-UP'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짝사랑의 비극적 사랑은 언제나 좋은 법입니다 (0) | 2026.03.01 |
|---|---|
| 오늘 밤, 세계에서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0) | 2026.03.01 |
| 만약 애니메이션 성우를 배정 받는다면? (0) | 2026.03.01 |
| PC 감각소실 시한부 (0) | 2026.02.28 |
| NPC 감각소실 시한부 (0) | 2026.02.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