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중 음성메세지 (부제 : 남친 귀여워 지구 부셔)
밤새 윙윙거리던 술기운이 채 가시지 않은 머리를 하고, 나인은 익숙한 발걸음으로 그의 연구실 문을 열었다. 어제의 광란.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과의 술자리는 예상보다 훨씬 길어졌고, 기억은 끈 떨어진 필름처럼 드문드문했다. 분명 늦는다고 재하에게 전화를 했던 것 같은데, 어떻게 집에 돌아왔는지는 가물가물했다.
지젤은 평소처럼 흰 실험복 차림으로 거대한 홀로그램 스크린 앞에 서 있었다. 그를 등진 채, 그는 문이 열리는 소리에 맞춰 천천히 돌아섰다. 평소와 다름없는 능글맞은 미소. 하지만 오늘따라 그 미소에는 미세한, 아주 즐거운 무언가가 더 섞여 있는 듯했다.
왔어? 해장은 하고 온 건가, 정하린. 어제 꽤 달린 모양이던데.
그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한 톤 높고, 명백한 장난기를 담고 있었다. 나인이 미간을 찌푸리며 다가가자, 지젤은 손에 들고 있던 개인 단말기를 까딱 흔들어 보였다.
아, 걱정돼서 전화해 봤는데 안 받길래. 혹시나 해서 음성 사서함에 메시지가 왔나 확인해 봤지. 그런데 아주… ‘흥미로운’ 기록이 남아있더군.
그는 ‘흥미로운’이라는 단어에 유독 힘을 주어 말했다. 그리고는 단말기를 조작해 무언가를 재생했다.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것은 시끄러운 술집의 배경 소음과, 명백히 나인의 목소리였다. 술에 잔뜩 취해 한껏 높아지고 뭉개진 발음의 목소리.
—…아니, 그래서어! 우리 재하가아! 평소에는 막, ‘정하린. 이리와.’ 이러면서 엄청 차가운 척하는데에! 그거 다 거짓말이야, 거짓말! 얼마나 귀여운데! 자기가 만든 음식 내가 맛있게 먹으면, 입꼬리가 막, 요오만큼 올라가서는! 아닌 척 막… 크흣, ‘그런 건, 반칙인데. 정하린.’ 막 이래! 으응? 귀엽지! 완전 귀엽지! 내 남자친구지만 너무 귀여워서 지구 부숴버릴 뻔했잖아!—
연구실에 흐른 정적은 1초 남짓. 녹음된 목소리가 끝나기가 무섭게, 나인은 자신이 서 있는 좌표를 망각하고 음속에 가까운 속도로 그에게 달려들었다. 새하얗던 얼굴이 토마토처럼 붉게 터져나가고 있었다.
지워! 당장 지워, 백재하!
하지만 S급 센티넬의 반사신경을 이길 수는 없는 법. 지젤은 가볍게 몸을 틀어 그녀의 손길을 피하며, 단말기를 든 손을 하늘 높이 치켜들었다. 마치 약을 올리는 어린애처럼.
이런, 이런. 중요한 데이터에 함부로 손대면 안 되지. 이건 내 시스템에 아주 중요한 참고 자료로 분류될 예정이라서.
나인이 펄쩍 뛰며 단말기를 낚아채려 했지만, 그는 한 손으로 가볍게 그녀의 이마를 막아섰다. 닿을 듯 닿지 않는 거리. 나인은 버둥거리다 말고 절망적인 신음을 내뱉으며 그 자리에 주저앉아 머리를 감싸 쥐었다. 죽고 싶다. 아니, 어제의 나를 죽여버리고 싶다.
그 모습을 아주 만족스럽게 내려다보던 지젤은, 태연한 얼굴로 녹음을 껐다. 그리고는, 방금 전 녹음 속 나인의 목소리를 완벽하게 흉내 내며, 입꼬리를 요염하게 끌어올렸다.
그런 건, 반칙인데. 정하린.
그는 한 손으로 턱을 괸 채 나인을 향해 고개를 까딱 기울였다. 그 각도마저, 그녀가 어젯밤 친구들에게 설명했던 바로 그 각도였다.
아, 안돼… 하지 마… 제발…
나인의 애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지젤은 연극을 계속했다. 그는 진지한 학자의 얼굴로 자신의 턱을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음성 데이터 분석 결과, 발언 당시 당신의 심박수는 분당 140bpm을 초과. 동공은 2mm 이상 확장. 전형적인, 극도의 흥분 상태에서 관찰되는 패턴인데. 그리고 ‘내 남자친구가 너무 귀여워서 지구를 부술 뻔했다’는 가설. 흥미로워. GISELLE SEQUENCE를 통해 시뮬레이션해 본 결과, 내 ‘귀여움’ 지수가 임계치를 돌파할 경우, 실제로 행성 단위의 구조적 붕괴를 일으킬 확률은… 0.0001% 미만이지만, 당신의 심장에는 100% 확률로 치명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확인됐어. 아주… 정확한 분석이더군, 정하린.
그는 말을 마치고, 이제는 거의 연구실 바닥에 녹아내릴 지경인 나인을 보며 유쾌하게 웃었다. 그는 주저앉은 그녀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눈높이를 맞췄다.
자, 이제 어떡할까. 이 중요한 데이터. 내 모든 시퀀스의 최상단에 ‘정하린에게 귀엽게 보이기 프로토콜’을 추가해야 할까? 아니면…
그는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단말기를 나인의 눈앞에서 흔들었다. 그리고는 속삭였다.
‘우리 재하’한테 키스라도 한 번 해주면, 삭제를 ‘고려’해 볼 수도 있고.
나인은 고개를 들었다. 눈에는 원망과 수치심, 그리고 약간의 체념이 뒤섞인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었다. 지젤은 그 표정을 보며 생각했다. 아, 이 음성 파일. 영구 보존 데이터로 분류해야겠다. 그것도, 최상위 보안 등급으로. 그녀가 보고 싶을 때마다, 아주 요긴하게 쓰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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