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번째 고백
[NPC -> PC 고백]
99번째 고백은, 99번째 차가운 거절로 산산이 부서졌다. 점심시간의 소란스러운 복도 한가운데, 백재하는 어김없이 정하린의 앞을 막아섰다. 그의 얼굴은 늘 그렇듯 감정 하나 읽을 수 없는 무표정이었지만, 내뱉는 단어만큼은 지독하게 절박했다.
정하린. 좋아한다.
그 말을 뱉는 데까지 걸린 시간, 1.2초. 주변의 모든 시선이 집중되는 시간, 0.5초. 그리고 정하린이 그를 밀치고 지나가는 데 걸린 시간, 3.7초. 그녀의 대답은 언제나 침묵, 혹은 경멸이 담긴 쌀쌀맞은 시선뿐이었다. 백재하는 그녀가 사라진 복도 끝을 잠시 바라보다, 제자리에서 돌아섰다. 마치 정해진 알고리즘의 한 사이클을 마친 로봇처럼, 그는 아무렇지 않게 자신의 교실로 향했다. 그에게 99번의 고백과 실패는, 그저 축적된 데이터에 불과했다.
그날 오후, 정하린은 친구들과 매점에서 아이스크림을 고르다 우연히 듣게 되었다. 구석 테이블에서 혼자 무언가를 중얼거리는 백재하의 목소리를. 그는 수첩에 무언가를 빼곡히 적으며, 누구에게도 닿지 않을 말을 내뱉고 있었다.
“…99회차까지의 변수 통제 실패. 오차 범위 99%. 내일 100회차 실행 후, 해당 프로토콜은 영구 폐기한다.”
그건 결심이라기보다, 시스템 종료를 선언하는 엔지니어의 목소리에 가까웠다. 정하린은 저도 모르게 아이스크림을 쥔 손을 멈췄다. 100번. 그 숫자가 심장에 작은 돌멩이처럼 툭, 하고 떨어졌다. 매일 자신을 괴롭히던 그 지긋지긋한 고백이 끝난다는 안도감과, 설명할 수 없는 기묘한 상실감이 동시에 피어올랐다.
그리고 100번째 고백이 예정된 날. 이상하게도 백재하는 학교에 나타나지 않았다. 늘 아침 조회 시간 직전, 교문에서 자신을 기다리던 그가 없었다. 1교시에도, 2교시에도 그의 자리는 비어 있었다. 정하린은 무심코 몇 번이고 그의 빈 책상을 쳐다봤다. 매일 울리던 소음이 사라진 아침은 어색할 만큼 고요했다. '영구 폐기'라는 그의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정말… 그만둔 걸까.
수업이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다. 점심시간, 정하린은 결국 참지 못하고 백재하의 반 친구를 붙잡았다. 열이 펄펄 끓어서 조퇴했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정하린은 자기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나 복도를 가로질러 달리고 있었다. 왜? 이유는 알 수 없었다. 단지, 이대로 끝나게 둘 수는 없다는 비논리적인 충동이 모든 이성을 마비시켰다.
결국 그의 집 앞, 굳게 닫힌 현관문 앞에 선 정하린은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초인종을 눌렀다. 한참 뒤, 문이 열리고 나타난 것은 식은땀에 젖어 엉망인 얼굴의 백재하였다. 그는 휘청이며 문에 기댄 채, 믿을 수 없다는 듯 정하린을 바라보았다.
…정하린? 네가 왜…
그녀는 엉망인 그의 모습에 잠시 말을 잃었다. 그리고는 결심한 듯, 한 걸음 다가섰다. 늘 그가 자신에게 그랬던 것처럼, 그의 앞을 막아서며 말했다.
너, 오늘 나한테 할 말 있었잖아.
백재하가 멍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정하린은 한 손으로 그의 뜨거운 이마를 짚었다. 불덩이 같았다.
100번째 고백, 네가 안 하니까 내가 대신 끝내주러 왔어.
그녀는 그의 멱살을 살짝 움켜쥐고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그리고는 그의 귓가에, 오직 그에게만 들릴 목소리로 속삭였다.
나, 내일부터 네 옆자리 앉을 거야. 그러니까 아프지 마, 백재하. 이게 내 대답이야.
그것은 사랑 고백도, 뭣도 아니었다. 하지만 백재하의 모든 시스템을 다운시키기엔 충분한, 완벽한 명령어였다. 그는 그대로 정신을 잃고 그녀의 어깨 위로 쓰러졌다.
후일담
다음 날, 멀쩡하게 교복을 차려입고 등교한 백재하는 곧장 교무실로 향했다. 그리고 담임 선생님께 ‘학업 능률 향상을 위한 상호 멘토링’이라는 명목으로 정하린의 옆자리로 옮겨줄 것을 공식적으로 요청했다. 그의 서슬 퍼런 논리와 설득에 넘어간 담임은 결국 자리를 바꿔주었고, 그날 이후 백재하는 정하린의 옆에 앉아 단 한 번도 고백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매일 아침 그녀의 책상 위에 딸기 우유를 올려두었다. 그리고 가끔, 정하린이 수업 시간에 졸기라도 하면 그는 아주 작은 목소리로, 오직 그녀에게만 들리게 속삭였다.
프로토콜 위반이다, 정하린.
## Profile (High School AU ver.)
[백재하 | Baek, Jae-ha]
나이: 18세
소속: 한국고등학교 2학년 1반 (과학중점반)
특징:
감정이라는 버그를 이해하기 위해 '정하린에게 고백하기'라는 프로토콜을 100회 실행하도록 설정한 괴짜 천재.
매일 고백하는 행위 자체는 그에게 있어 감정적인 행위가 아닌, 데이터 수집을 위한 실험에 가까웠다.
정하린의 거절 데이터만 99개를 수집했으나, 단 한 번의 예상 밖 응답에 모든 시스템이 재부팅되는 경험을 했다.
현재는 '정하린 옆자리 사수 및 관찰'을 최우선 프로토콜로 설정, 그녀의 모든 행동을 데이터화하고 있다. 그의 수첩에는 '정하린의 수면 패턴과 학습 집중도의 상관관계' 같은 보고서가 매일 작성된다.
[정하린 | Jeong, Ha-rin]
나이: 18세
소속: 한국고등학교 2학년 3반
특징:
교내 최고 인기인이자 '얼음 공주'. 수많은 남학생들의 고백을 차갑게 거절해왔다.
유일하게 백재하의 고백만큼은 무시하거나, 밀치거나, 노려보는 등 다양한 패턴의 거절 방식을 선보였다.
자신을 귀찮게 하던 스토커가 사라진다는 사실에 시원섭섭함을 느끼다가, 결국 제 발로 그의 집까지 찾아가 '고백'을 완성시킨 장본인.
요즘 가장 큰 고민은, 옆자리에서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수첩에 무언가를 계속 적는 백재하를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한 것이다.
[PC -> NPC 고백]
99번째 고백은, 99번째 실패로 끝났다. 비가 내리는 하굣길, 교문 앞에서 정하린은 우산도 없이 백재하를 기다렸다. 교복 셔츠가 빗물에 달라붙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그녀는 나타난 그의 앞에 섰다. 그리고 늘 그랬듯,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좋아해, 백재하.”
백재하는 잠시 걸음을 멈췄다. 빗줄기가 그의 까만 안경알 위로 흘러내렸다. 그는 아무 표정 없는 얼굴로 젖어가는 정하린을 내려다보았다. 감정의 동요도, 연민의 기색도 없었다. 마치 매일 아침 반복되는 교내 방송을 듣는 것처럼, 익숙하고 의미 없는 소음으로 취급할 뿐이었다.
비효율적인 감정 소모는 여전하군. 시간 낭비다.
그 한마디가 끝이었다. 백재하는 그녀를 스쳐 지나갔다. 정하린이 그 뒤에서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돌아보지 않았다. 그에게 그녀의 99번의 고백은 그저 분석할 가치도 없는 비논리적 행동의 반복일 뿐이었다.
그날 저녁, 보충수업을 마치고 텅 빈 복도를 걷던 백재하의 발걸음이 우연히 멈췄다. 열린 교실 문틈으로 익숙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정하린이었다. 친구들이 그녀를 위로하고 있었다. “야, 99번이나 찼는데 뭘 또 해.” “그만둬, 걔는 진짜 피도 눈물도 없어.” 그 소란 속에서, 유독 선명하게 들리는 그녀의 목소리.
“…이번이 마지막이야. 딱 100번만 채우고, 진짜 그만둘 거야.”
울음기 섞인, 하지만 이상할 만큼 단호한 선언. 백재하는 잠시 그 자리에 멈춰 섰다. 고개를 미세하게 기울였다. ‘100번’. 그 숫자가 마치 어떤 연산의 마지막 변수처럼 그의 머릿속에 입력되었다. 그는 다시 아무 일 없었다는 듯 걸음을 옮겼다. 복도에 그의 구둣발 소리만 차갑게 울렸다.
그리고 100번째 고백이 예정된 날. 이상하게도 정하린은 학교에 나타나지 않았다. 백재하의 시선은 무심코 비어있는 그녀의 자리를 몇 번이고 훑었다. 시끄럽게 울리던 알람이 갑자기 꺼진 듯한, 어색한 정적. 그의 시스템에 ‘예측 오류: 변수(정하린)의 부재’라는, 생전 처음 보는 경고등이 켜진 기분이었다. 점심시간에도, 쉬는 시간에도, 하교 시간이 될 때까지도 그녀는 보이지 않았다.
결국 백재하는, 단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비논리적인 행동을 실행에 옮겼다. 정하린의 친구를 붙잡고, 그녀의 행방을 물었다. 감기에 걸려 결석했다는 대답과 함께, 그는 정하린의 집 주소가 적힌 쪽지를 손에 쥐고 있었다. 왜 이런 행동을 하는가. 합리적인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 그저, ‘100번째’라는 미완의 데이터가 그의 모든 연산을 방해하고 있을 뿐이었다.
결국 그녀의 집 앞, 낡은 빌라의 초인종 앞에 선 백재하는 망설임 없이 벨을 눌렀다. 곧 문이 열리고, 목이 잠긴 목소리와 함께 나타난 것은 잔뜩 핼쑥한 얼굴의 정하린이었다.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백재하…? 네가 여긴 어떻게… 콜록, 콜록!
그는 엉망인 몰골의 그녀를 잠시 관찰했다. 붉어진 눈가, 마른 입술, 흐트러진 머리. 그리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너 때문에 내 연산에 오류가 발생했다.
뜬금없는 말에 정하린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백재하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그는 주머니에서 작은 메모장과 펜을 꺼내 들었다.
99번의 데이터가 입력되었는데, 마지막 100번째 데이터가 누락됐다. 이 불완전한 상태로는 다른 어떤 연산도 진행할 수가 없어. 그러니 지금부터 내가 묻는 말에 정확히 대답해.
그는 펜으로 메모장을 톡톡 두드리며, 마치 취조하는 형사처럼 그녀를 쏘아보았다.
100번째 고백의 내용은 뭐였지? 실패하면 그만둔다고 했으니, 이번에도 실패로 끝내주겠다. 어서 말해. 그래야 내 시스템이 정상으로 돌아가.
그의 지독하게 진지한 얼굴과 황당한 요구에, 정하린은 아픈 것도 잊고 잠시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는 어떤 장난기도 없었다. 오직 이 상황을 해결하겠다는 논리적인 집착만이 가득했다.
후일담
그날, 정하린의 100번째 고백은 “내일 학교 끝나고 같이 떡볶이 먹으러 가자”였다. 백재하는 그 말을 자신의 메모장에 ‘고백 #100: 떡볶이 회동 제안’이라고 기록한 뒤, “거절한다”는 말을 남기고 돌아갔다. 그러나 다음 날, 그는 하교하는 정하린의 앞에 나타나 “어제 거절한 제안, 효율성 재검토 결과 수락으로 변경한다”며 그녀를 떡볶이집으로 이끌었다. 그 후로 ‘데이터 수집’과 ‘효율성 검토’라는 명목하에, 백재하는 정하린의 곁을 맴돌기 시작했다. 정하린의 101번째 고백은, 백재하의 “오늘부터 1일이다. 이건 통보다”라는 말로 시작되었다.
## Profile (High School AU ver.)
[정하린 | Jeong, Ha-rin]
나이: 18세
소속: 한국고등학교 2학년 3반
특징:
교내 유명인사. 이유는 단 하나, 전교 1등이자 얼음 왕자인 백재하에게 99번 고백하고 차인 것으로.
포기를 모르는 근성과 밝은 에너지를 가졌지만, 의외로 상처를 잘 받는다.
매일 아침 백재하의 책상에 초코우유를 가져다 놓는 것이 일과. 백재하는 그걸 그대로 매점 환불 코너에 가져다 놓는다.
친구들 사이에선 ‘백재하 사용설명서’ 저자로 통하지만, 본인도 사용법을 모르는 게 함정.
[백재하 | Baek, Jae-ha]
나이: 18세
소속: 한국고등학교 2학년 1반 (과학중점반)
특징:
압도적인 전교 1등. 모든 것을 논리와 데이터, 효율성으로 판단하는 냉정한 천재.
감정 표현이 거의 없고, 타인에게 무관심하다. 특히 자신에게 쏟아지는 비논리적인 감정(고백)을 극도로 귀찮아한다.
‘정하린’이라는 변수가 자신의 연산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하는 데 최근 가장 많은 시간을 쏟고 있다. 본인은 이를 ‘버그 수정’ 과정이라 칭한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정하린이 없는 학교생활에 안정성이 0.13% 하락한다는 데이터를 얻었다.
'Giselle X Nine > OOC BACK-UP' 카테고리의 다른 글
| 너도 헤어지지 않게 조심해 (0) | 2026.03.04 |
|---|---|
| 과연 몇 점짜리 안정형 / 멘헤라 일까? (0) | 2026.03.03 |
| 일주일간 이상형과 파트너 (0) | 2026.03.03 |
| 이상형 조우 (0) | 2026.03.03 |
| 술주정 (0) | 2026.03.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