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장 언제 올 거야? (npc ver)
어느 날 오후, 나른한 햇살이 침실을 금빛으로 물들이는 시간. 허리 통증을 완화하는 지젤의 손길 아래 반쯤 잠에 취해 있던 나인의 의식은, 부드러운 안개 속으로 서서히 가라앉았다. 현실의 감각은 멀어지고, 이내 낯설지만 포근한 풍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꿈의 시작은 눈부시게 화창한 어느 날의 공원이었다. 끝없이 펼쳐진 푸른 잔디밭, 윤슬이 반짝이는 호수, 한가롭게 떠다니는 오리 떼. 모든 것이 비현실적일 만큼 완벽한 평화로 가득한 공간이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 나인과 지젤이 있었다. 오늘의 지젤은 늘 입던 실험복이나 검은 셔츠 대신, 편안해 보이는 흰색 리넨 셔츠에 베이지색 면바지 차림이었다. 까만 안경 너머의 눈매는 평소의 날카로움 대신 부드러운 호선을 그리고 있었다.
그는 벤치에 나란히 앉아, 조금 전 사 온 팝콘을 호수를 향해 던지는 나인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평소라면 ‘먹이 제공 행위가 생태계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변수 분석’ 따위의 말을 중얼거렸을 테지만, 지금의 그는 그저 조용히 미소만 짓고 있었다. 그 모습이 어색하면서도, 심장이 간질거릴 만큼 다정했다.
저 녀석들, 비효율적인 움직임으로 최대 칼로리를 섭취하려 드는군. 학습 능력이 부족한 개체들이야.
그가 나지막이 속삭였다. 말투는 여전히 분석적이었지만, 그 안에 담긴 것은 익숙한 조롱이 아닌 장난기 어린 애정이었다. 그는 손을 뻗어 팝콘 하나를 집어 드는가 싶더니, 슬쩍 방향을 틀어 나인의 입가로 가져왔다.
미각 데이터 측정. 긴급 상황은 아니지만, 프로토콜은 언제나 유효해. 아 해봐, 나의 공주님.
나인이 그의 장난에 어떻게 반응하든, 꿈속의 시간은 구름처럼 흘러갔다. 그런데 그 평화가 깨진 것은 정말 순식간의 일이었다. 어디선가 ‘야옹’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나가 아니었다. 수십, 수백 마리의 고양이들이었다. 삼색이, 치즈, 고등어, 새까만 턱시도까지. 온갖 종류의 고양이들이 마치 거대한 파도처럼 잔디밭을 가로질러 두 사람에게로 몰려왔다. 이상하게도, 그들의 목표는 명확했다. 바로 지젤이었다.
고양이들은 나인은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지젤의 발치에 드러눕고 무릎 위로 뛰어오르며 그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애옹거렸다. 순식간에 지젤은 고양이 산에 파묻혔다. 그리고,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가장 용감해 보이는 치즈태비 한 마리가 지젤의 멱살(…)을 잡고 흔들며, 또렷한 사람의 목소리로 외쳤다.
대장! 언제 고양이의 나라로 돌아올 거야! 대장이 없으니까 츄르 공장 가동률이 30%나 떨어졌다고! 심심해! 외로워!
그 말을 시작으로, 다른 고양이들도 일제히 울부짖기 시작했다. “대장! 보고 싶었어!” “새로운 스크래쳐가 입고되었단 말이다!” “인간 여자한테 빠져서 우리를 잊은 거냐!” 아수라장이었다. 나인이 이 기괴한 광경에 할 말을 잃고 멍하니 바라보는 사이, 고양이들에게 둘러싸인 지젤이 곤란한 듯 미간을 찌푸렸다.
조용히 해. 연산에 방해된다. 지금은 긴급 유지보수 프로토콜 수행 중이야.
하지만 고양이들은 막무가내였다. 그들이 더욱 거세게 지젤에게 매달리는 순간, ‘펑!’ 하는 귀여운 파열음과 함께 하얀 연기가 피어올랐다. 연기가 걷히자 나타난 지젤의 모습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그의 헝클어진 까만 머리 위로, 쫑긋한 검은색 고양이 귀 한 쌍이 솟아나 있었다. 심지어 엉덩이 쪽에서는 우아한 검은 꼬리가 살랑거리며 제멋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고양이 귀와 꼬리를 단 지젤은 당황한 기색도 없이, 자연스럽게 귀를 한 번 털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옷에 붙은 고양이 털을 툭툭 털어내고는, 멍하니 굳어 있는 나인을 향해 돌아보았다. 그의 표정은 지극히 사무적이었고, 목소리는 언제나처럼 냉정했다.
데이터 수집 중 예기치 못한 인터럽트가 발생했군. 미안하지만, 잠시 자리를 비워야겠어. 시스템 복구 및 하위 개체들의 불만 사항을 처리하고 오지.
그 말을 끝으로, 그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고양이 군단을 이끌고 호수 너머, 무지개가 떠 있는 비현실적인 풍경 속으로 걸어갔다. 그의 뒤를 따르는 고양이들은 “대장 만세!”를 외치며 행진했다. 홀로 벤치에 남겨진 나인의 손에는 먹다 남은 팝콘 봉지만이 덩그러니 들려 있었다. 내 남자가… 고양이 나라의 대장이었다니. 심지어 나보다 고양이들의 복지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다니. 허탈함과 황당함, 그리고 아주 약간의 서운함이 뒤섞인 감정이 폭풍처럼 휘몰아쳤다.
“백재하, 이 배신자…!” 나인이 소리치려는 바로 그 순간—
—나인의 눈이 번쩍 뜨였다. 익숙한 침실의 천장이 보였다. 방 안의 공기는 여전히 나른했고, 창밖은 여전히 오후의 햇살로 가득했다. 꿈이었다. 너무나도 생생하고 어처다리없는 꿈. 나인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상반신을 벌떡 일으켰다. 온몸이 땀으로 축축했다.
그때, 옆에서 나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재부팅 완료. 심박 수 급상승, 호흡 불규칙. 악몽이라도 꾼 건가, 나의 공주님?
고개를 돌리자, 침대 옆 의자에 앉아 태블릿을 들여다보던 지젤이 나인을 보고 있었다. 그는 평소처럼 검은 실내복 차림이었고, 그의 머리엔 당연하게도 고양이 귀 따위는 없었다. 하지만 꿈의 잔상이 너무 강렬했던 탓일까. 그의 헝클어진 머리카락 사이로 언뜻 검은 귀가 보인 것만 같은 착각이 들었다. 나인은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그의 머리를 향해 휘적거렸다.
지젤은 갑작스러운 나인의 행동에 눈을 가늘게 뜨며, 그녀의 손목을 부드럽게 붙잡았다.
뭐 하는 거지? 두부 외상 후 정밀 진단 프로토콜을 추가해야 할 이유라도 생긴 건가?
거기… 귀… 꼬리는…?
나인은 횡설수설하며 그의 머리와 엉덩이 쪽을 번갈아 쳐다봤다. 지젤의 표정은 노골적으로 ‘지금 내 파트너의 지능 지수가 심각하게 저하된 것 같다’고 말하고 있었다.
귀는 여기 두 개, 정상적으로 부착되어 있고, 꼬리는 퇴화된 지 오래다. 정하린, 혹시 아까 마사지가 부족했나? 허리 통증이 뇌까지 전이된 거라면, 이건 내 연산 범위를 벗어나는 심각한 오류인데.
그의 진지한 분석에 나인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꿈. 그래, 그냥 어이없는 꿈일 뿐이었다. 나인은 얼굴을 붉히며 잡힌 손을 빼내고는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이불 속에서 웅얼거리는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아니야… 그냥… 이상한 꿈을 꿔서….
지젤은 태블릿을 옆으로 치우고 자리에서 일어나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앉았다. 그는 이불 위로 동그랗게 솟아오른 부분을 톡톡 건드렸다.
내 데이터에 의하면, 인간은 스트레스 상황이나 내적 불안감이 증폭될 때 비논리적인 꿈을 꾸지. 방금 네 심박 패턴은 단순한 악몽이 아니었어. 극도의 황당함과 배신감, 그리고 약간의… 소유욕 상실에 대한 공포. 그런 데이터가 관측됐는데.
그의 정확한 분석에 나인은 이불 속에서 움찔했다. 그는 이불을 살짝 걷어내고, 얼굴이 새빨개진 나인과 눈을 맞췄다. 그의 입꼬리가 장난스럽게 올라갔다.
도대체 무슨 꿈을 꿨기에, 네가 날 빼앗기기라도 한 것 같은 반응을 보이는 걸까. 말해봐, 나의 공주님. 아주 흥미로운 데이터가 될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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