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에 빠지는 3대 요소
정하린이 외출한 거실은 비정상적으로 고요했다. 평소라면 그녀의 숨소리, 작은 움직임 하나하나가 공간의 밀도를 채웠지만, 지금은 오직 냉장고의 미세한 구동음과 창밖에서 멀리 들려오는 도시의 소음만이 부유하고 있었다. 백재하는 소파에 비스듬히 누워 허공에 띄운 HUD 인터페이스를 무심하게 넘기고 있었다. 실시간으로 갱신되는 전 세계의 빌런 출현 확률, 에너지 이상 감지 그래프, 심지어는 [Fearless] 익명 게시판의 인기글까지. 그 어떤 데이터도 그의 흥미를 끌지 못했다. 그의 모든 연산은 ‘정하린’이라는 단일 변수에 종속되어 있었고, 그 변수가 부재한 지금, 세상은 의미 없는 노이즈의 집합에 불과했다.
그는 몸을 일으켰다. 무료함이 시스템의 효율을 저하시키고 있었다. 거실을 어슬렁거리던 그의 시선이 테이블 위에 놓인 책 한 권에 멎었다. 정하린이 최근 며칠간 잠들기 전에 종종 들여다보던, 옅은 베이지색 표지의 책이었다. ‘그녀의 사고 패턴을 이해하기 위한 추가 데이터 수집.’ 백재하는 스스로에게 합리적인 이유를 부여하며 책을 집어 들었다. 제목은 퍽이나 진부했다. <사랑의 모든 순간들>.
그는 안경을 고쳐 쓰며 책장을 빠르게 넘겼다. 대부분은 감상적인 시구와 진부한 사례들로 채워져 있었다. 그가 보기에 비논리적이고, 감정 과잉의 텍스트 덩어리였다. 그러다 그의 손가락이 특정 페이지에서 우뚝 멈췄다. 그녀의 필체가 분명한, 가느다란 펜으로 그어진 밑줄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그의 흑안이 밑줄 그어진 문장을 스캔했다.
[사랑에 빠지는 주요 3대 요소]
1. 188cm의 키.
2. 아이돌처럼 생긴 얼굴.
3. 초콜릿 복근.
...정적. 백재하의 모든 사고 회로가 일시에 정지했다. GISELLE SEQUENCE가 강제 종료되고, 주변에 떠 있던 모든 HUD 인터페이스가 깜박거리다 ‘SYSTEM ERROR’ 메시지를 띄우며 사라졌다. 그는 눈을 깜박였다. 다시 한번 문장을 읽었다. 세 번, 네 번 반복해서 읽었다. 오독이 아니었다. 명백한 사실이었다.
그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고개를 들어 거실 한쪽에 놓인 전신 거울로 시선을 옮겼다. 그의 신체 데이터는 오차 없이 184cm. 이상적인 신체 비율과 전투에 최적화된 근밀도를 자랑하는, 수많은 시뮬레이션이 증명한 완벽한 수치였다. 그런데… 4cm. 4센티미터가 부족했다. 그의 완벽한 세계에 존재해서는 안 될 치명적인 결함.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자신의 머리 위와 거울 속 머리 위 사이의 공간을 가늠해보았다. 4센티미터라는 물리적 거리가, 그와 정하린의 사랑 사이에 놓인 거대한 장벽처럼 느껴졌다.
두 번째 항목. ‘아이돌처럼 생긴 얼굴.’ 그는 거울에 비친 제 얼굴을 뜯어보기 시작했다. 날카로운 턱선, 황금 비율에 근접한 이목구비의 배치, 지적인 분위기를 완성하는 짙은 흑안. 이것은 감성적이고 주관적인 ‘아이돌’ 따위의 범주로 평가될 얼굴이 아니었다. 이건 ‘백재하’라는, 유일무이한 카테고리에 속하는 얼굴이었다. 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단말기를 들어 ‘요즘 인기 아이돌’을 검색했다. 화면에 떠오른, 과도하게 화려하고 어려 보이는 얼굴들을 보며 그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정하린의 미적 기준에 이런… ‘미성숙한 데이터’들이 포함되어 있었다는 말인가?
마지막 항목. ‘초콜릿 복근.’ 백재하는 입고 있던 셔츠를 망설임 없이 들어 올렸다. 거울에는 전투와 훈련으로 다져진, 갈라짐이 선명한 복근이 드러났다. 지방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완벽하게 계산된 근육이었다. 하지만 이게 ‘초콜릿’인가? 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초콜릿이라면, 좀 더… 달콤하고, 각진 모양이어야 하는 건가? 그의 복근은 효율적인 파괴를 위해 설계된 형태이지, 식료품을 모방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복근과 단말기 화면에 뜬 ‘초콜릿 복근’ 이미지를 번갈아 보며 심각한 분석에 들어갔다. 각도 문제인가? 조명? 아니면 근육의 분리도? 혹시 데피니션이 부족한 건가?
그 순간,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 후일담
“다녀왔… 어?” 정하린은 거실의 광경에 걸음을 멈췄다. 그녀의 완벽한 남자친구, 백재하가 거울 앞에서 셔츠를 걷어 올린 채 심각한 표정으로 자신의 배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한 손에는 그녀의 책이, 다른 한 손에는 단말기가 들려 있었다.
다녀왔어?
그의 목소리는 평소와 같았지만, 어딘지 모르게 위축되어 있었다. 그는 셔츠를 내리지도 않은 채 그녀를 돌아보았다. 정하린은 잠시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이내 그의 손에 들린 책과 밑줄 그어진 페이지를 발견하고는 상황을 파악했다.
백재하. 지금 뭐 해?
그녀의 목소리에 웃음기가 가득했다. 백재하는 애써 태연한 척 헛기침을 하며 셔츠를 내렸다.
데이터 분석 중이었다. 너의 취향에 대한 알고리즘을 업데이트할 필요가 있어서.
정하린은 결국 웃음을 터뜨리며 그에게 다가가 그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푸흐, 그거 내 책 아니야. 지부 도서관에서 빌린 건데, 전에 빌린 사람이 밑줄 쳐놓은 거거든? 난 그냥 웃겨서 보고 있었던 거고.
백재하는 순간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의 단말기가 ‘삐빅’ 소리를 내며 새로운 분석 결과를 화면에 띄웠다. [결론 : 모든 가정은 기각. 삽질이었음.]
그는 조용히 단말기 화면을 껐다. 그리고는 자신을 끌어안고 웃고 있는 정하린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귓가가 미세하게 붉어져 있었다.
…멍청한 짓을 했군.
바보.
나직한 대답과 함께, 그는 자신을 ‘바보’라고 부르는 사랑스러운 목소리의 주인을 품에 가두듯 더욱 세게 끌어안았다. 4센티미터의 오차도, 아이돌의 얼굴도, 초콜릿의 형태도. 그녀의 웃음소리 하나에 모두 무의미한 데이터가 되어 사라졌다.
✅ NPC 낙서: 4cm... 4cm... 4cm... (ノಠ益ಠ)ノ彡┻━┻
💭 NPC 속마음: ...이 책을 빌린 이전 사용자의 데이터를 조회한다. 즉시. 그리고 내 알고리즘에서 '삽질'이라는 변수를 영구적으로 삭제해야겠다. 멍청한 짓이었다.
🔔 NPC 단말기 알림: [F-Market] 고객님, 주문하신 '4cm 키높이 구두 깔창' 및 '복근 강화용 EMS 저주파 벨트'의 배송이 시작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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