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젤의 버킷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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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712 : Bucket L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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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인은 바닥에 떨어진 수첩을 집어 들었다. 그저 평범한 검은색 몰스킨 수첩. 늘 그가 실험복 주머니에 넣고 다니던 것이었다. 무심코 펼쳐진 페이지에 시선이 닿는 순간, 나인은 숨을 멈췄다. 딱딱하고 각진, 기계로 찍어낸 듯 정교한 그의 필체가 페이지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B-712 : Bucket List’. 암호명 같은 제목 아래로, 번호가 매겨진 목록들이 끝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처음 몇 줄은 이해할 수 없는 과학 용어와 그의 능력에 대한 고찰이었다. GISELLE SEQUENCE, 대통일 이론, 슈뢰딩거의 고양이… 역시 백재하답다고 생각하며 피식 웃음이 나올 뻔했다. 하지만 스크롤을 내리듯 시선을 아래로 옮길수록, 나인의 심장이 이상한 소리를 내며 뛰기 시작했다. 5번 항목. ‘정하린의 초기 발현 데이터(2019.09.09) 복원 및 분석’. 까마득한 그날, 폐허가 된 도서관에서 혼자 울고 있던 자신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그는… 그날을 알고 있었다. 그저 스쳐 지나간 임무가 아니었다. 그리고 그 아래로는, 온통 자신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녀와 페어 체결’, ‘그녀에게 키스하기’, ‘그녀와 함께 잠들기’. 이미 체크 표시와 함께 줄이 그어진 항목들. 그와 함께했던 모든 순간들이, 사실은 이 수첩 안에 적힌 그의 계획이자 목표였다는 사실에 머리가 아찔했다. 데이터 수집이라는 핑계, 소유라는 강압적인 단어, 심지어 방금 전의 서툰 고백까지도. 이 모든 것이 그의 버킷리스트를 채워나가는 과정이었다. 기가 막히고 어이가 없어서 화가 나야 하는데, 이상하게도 자꾸만 웃음이 비집고 나왔다. 그러다 문득, 아직 줄이 그어지지 않은 항목들로 시선이 옮겨갔다. ‘그녀와 함께 ‘우리 집’에서 아침 맞기’, ‘평범한 도서관에서 책 읽기’,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반지를 선물하기’. 그리고… ‘결혼이라는 비효율적 제도의 효율성 증명’. 나인의 얼굴이 터질 것처럼 뜨거워졌다. 이 남자는, 이 바보 같은 남자는 대체 어디까지 계산하고 있는 걸까. 가장 아래쪽에 적힌, 거의 흘려 쓴 것 같은 31번 항목을 발견했을 때, 나인은 결국 참지 못하고 수첩 위로 이마를 기댔다. ‘우리의 아이가…’ 더는 읽을 수가 없었다. 이것은 단순한 계획표가 아니었다. 이것은 백재하라는 남자가 정하린이라는 여자를 만나고, 자신의 모든 세상을 그녀를 중심으로 재편성하며 그려나간, 미래의 설계도였다. 서툴고, 비논리적이며, 지독하게 사랑스러운. 나인은 수첩을 가슴에 꼭 껴안았다. 따뜻한 온기가 스며드는 것 같았다. 그가 없는 텅 빈 연구실에서, 나인은 처음으로 그의 세상 전부를 선물 받은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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