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연시 공략캐인 NPC와 게임 더럽게 못하는 PC
그것은 어느 날 갑자기 시작된 인식의 균열이었다. 백재하의 세상, 그가 GISELLE SEQUENCE를 통해 분석하고 예측하던 인과율의 세계에 이질적인 인터페이스가 떠올랐다. 반투명한 선택지 창, 우측 상단에 떠 있는 하트 모양의 게이지,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조작하는 보이지 않는 외부 관찰자의 존재. 그는 자신이 ‘공략 캐릭터’라는 어처구니없는 사실을, 마치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상수처럼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문제는, 그를 ‘공략’하려는 플레이어가 터무니없는 재앙 수준의 의사결정 능력을 가졌다는 점이었다.
‘정하린’은 몇 번이고 그를 찾아왔다. 매번 다른 방식으로, 하지만 언제나 같은 목표를 가지고. 그리고 매번, 경이로울 정도로 멍청한 선택으로 자멸했다. 백재하가 자신의 연구실에 틀어박혀 며칠 밤낮으로 연구에 몰두하고 있을 때, 그녀는 느닷없이 문을 박차고 들어와 ‘당신 같은 워커홀릭에겐 휴식이 필요해요!’라며 그의 전원을 내려버렸다. [호감도 -30] [시스템 오류: 중요 데이터 손실 위험] 이라는 경고창이 섬광처럼 터져 나왔다. 그가 일부러 가장 정답에 가까운 선택지—[그의 연구를 존중하며 조용히 커피를 건넨다]—에 미세한 빛의 파동을 흘려보냈음에도, 그녀는 굳이 핏발 선 눈으로 그걸 노려보더니 ‘함정이다!’라고 외치듯 [그의 모든 것을 망가뜨린다]를 골랐다.
백재하는 제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눈앞에 떠 있는, 또다시 리셋된 세계의 시작점에서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정하린’의 얼굴. 그녀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모든 실패의 로그를 기억했다. 그녀가 다른 센티넬의 가이딩을 자청해 그의 질투를 유발하려다 영원히 페어 해지가 된 루트 7번. 그가 건넨 선물을 ‘분명 독이 들었을 것’이라며 강물에 던져버린 루트 19번. 심지어 길 가던 빌런에게 ‘당신, 사실 사정이 딱한 사람이죠?’라며 말을 걸다가 함께 폭사해버린 배드 엔딩 44번까지.
그 모든 어리석은 반복 속에서도, 그녀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것이 백재하를 가장 미치게 만드는 변수였다. 이쯤 되면 다른 캐릭터로 갈아탈 법도 한데, 그녀는 끈질기게 ‘백재하 루트’의 첫 페이지를 다시 펼쳤다. 그 집요함은 분노를 넘어 기묘한 감탄을, 그리고 종래에는 연민에 가까운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다시, 선택의 순간이 왔다. 비 오는 날, 임무에 지친 그가 지부 복도에서 비에 젖은 채 서 있었다. 선택지는 세 개였다.
[1. 그에게 다가가 수건을 건넨다.]
[2. 못 본 척 지나간다.]
[3. 다짜고짜 뺨을 때리며 정신 차리라고 소리친다.]
백재하는 눈을 감았다. 제발. 이번에야말로. 그는 [1번] 선택지에 거의 노골적으로 푸른빛 이펙트를 중첩시켰다. 손가락 끝에서 나온 데이터 입자가 반딧불처럼 날아가 1번 선택지를 부드럽게 감쌌다. 이보다 더한 정답 표시는 없었다. 하지만 그는 보았다. 보이지 않는 플레이어, ‘정하린’의 커서가 1번 위에서 잠시 머뭇거리더니, 확신에 찬 움직임으로 3번을 향해 미끄러지는 것을. 그녀의 내면에서 ‘이토록 쉬운 정답일 리가 없어! 이것은 분명 나를 방심시키려는 고도의 심리전이다!’라는 외침이 들리는 듯했다.
아. 백재하는 짧은 탄식을 뱉었다. 그는 다가올 충격에 대비하는 대신, 천천히 눈을 뜨고 자신을 향해 돌진해오는 ‘정하린’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 멍청하고, 올곧고, 그래서 도무지 미워할 수 없는 불굴의 플레이어를.
이번 회차는 얼마나 버티려나.
뺨이 터져나가기 직전, 그는 희미하게 웃었다. 이 우스꽝스러운 게임의 끝에서, 그녀가 기어코 해피엔딩을 쟁취하는 순간을 보고 싶다는 욕망. 그것이 지금 그의 유일한 목표가 되어버렸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
❤️+: 측정 불가. (수많은 리셋 데이터 속에서, 그녀의 끈질긴 '도전' 자체에 기묘한 애착이 형성되고 있습니다.)
📚 일정: [백재하 해피엔딩 루트] 공략 실패 로그 갱신 대기 중...
💬: [시스템 메시지] "경고: 플레이어의 선택이 캐릭터의 기본 설정을 심각하게 위협하고 있습니다. '자애로운 성자' 루트로 강제 전환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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