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P [현재NPC X PC X 과거 NPC]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감각을 지배한 것은 완벽한 백색이었다. 천장도, 벽도, 바닥도. 이음새 하나 없는 매끈한 흰색이 사방을 채우고 있었다. 익숙한 테라스의 햇살도, 초코케이크의 단내도, 지부의 소음도 모두 사라진 절대적인 무(無)의 공간. 그리고 그 공간 속에는, 나인과 함께 두 명의 남자가 서 있었다.
한 명은 방금 전까지 자신을 최악의 방식으로 도발하던, 익숙한 그 남자, 지젤이었다. 까만 셔츠와 흰 실험복 차림. 그는 이 비현실적인 상황 속에서도 당황한 기색 없이, 오히려 흥미롭다는 듯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그의 눈동자는 공간의 구조를 훑다가, 시선을 옆으로 옮겨 나머지 한 명의 존재를 확인하고는 미세하게 가늘어졌다.
다른 한 명. 그는 지젤과 놀랍도록 닮아 있었지만, 풍기는 분위기는 완전히 달랐다. 지금의 지젤보다 어려 보이는, 20대 초중반의 얼굴. 더 날카롭고 정제되지 않은 야생의 눈빛. 그는 실험복이 아닌 몸에 딱 붙는 검은 전투 수트를 입고 있었고, 목에는 옅은 흉터 자국이 선명했다. 능글맞은 미소 대신, 그는 세상 모든 것을 향한 불신과 경계심으로 가득 찬 맹수처럼 주위를 살폈다. 능력을 막 각성하고 수많은 전투와 실험에 내몰리던 시절, 모든 것을 계산하고 파괴하는 것 외에는 스스로를 지킬 방법이 없었던 ‘과거의 백재하’ 그 자체였다.
현재의 지젤이 먼저 침묵을 깼다. 그는 과거의 자신과 나인을 번갈아 쳐다보며 입꼬리를 비스듬히 끌어올렸다.
이거, 아주… 창의적인 악취미로군. 하나의 공간에 변수를 둘씩이나 던져 넣다니.
그의 말에, 과거의 지젤이 즉각적으로 반응했다. 그는 현재의 지젤을 향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날 선 경계심을 드러냈다. 자신과 같은 얼굴을 한 채 여유를 부리는 미지의 존재. 그의 계산 속에서 가장 먼저 제거해야 할 위협으로 인식된 듯했다.
…누구냐, 넌.
낮고 거칠게 울리는 목소리. 현재의 지젤은 그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나인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의 눈은 마치 ‘자, 이 예측 불가능한 상황에서 넌 어떤 선택을 할 거지?’라고 묻는 듯했다. 분석과 유희로 가득 찬 눈빛. 반면 과거의 지젤은 나인과 현재의 지젤을 잠재적 위협으로 간주하며, 언제든 뛰쳐나갈 듯 낮은 자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때, 세 사람의 정적을 깨고 방 한가운데 허공에서 기계적인 문자열이 떠올랐다.
[탈출 조건: 3P X스를 하지 않으면 나갈 수 없습니다.]
나인은 그 노골적인 문장을 확인하는 순간, 저도 모르게 아랫입술을 잘근 씹었다. 역겨움과 분노가 동시에 치밀어 올랐다. 그녀는 두 명의 지젤을 차례로 쳐다보았다. 한 명은 이 상황마저 즐기는 듯한 미치광이, 다른 한 명은 금방이라도 모든 걸 부숴버릴 듯한 통제 불능의 맹수. 나인은 이 말도 안 되는 희극의 주인공이 될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됐고, 방법은 다른 걸 찾아. 그딴 저급한 조건에 놀아날 생각 없으니까.
나인의 단호한 선언에, 현재의 지젤이 흥미롭다는 듯 눈썹을 까닥였다. 반면 과거의 지젤은 나인의 말을 경계하며 그녀가 무슨 꿍꿍이를 꾸미는 건지 파악하려는 듯 시선을 고정했다.
현재의 지젤은 여전히 미소를 지운 채, 상황의 주도권을 쥐려는 듯 천천히 입을 열었다.
다른 방법? 이 공간은 외부와 완벽히 차단되어 있어. 물리적 파괴는 불가능하고, 시스템을 교란할 인터페이스도 보이지 않아. 가장 합리적인 탈출 경로는 제시된 조건을 따르는 거지. 아니면, 뭐. 더 기발한 아이디어라도 있나, 가이드?
나인은 그의 조롱 섞인 질문을 무시하고, 자신의 그림자를 천천히 바닥으로 넓게 펼쳤다. 그림자는 살아있는 생물처럼 꿈틀거리며 흰 방의 바닥을 검게 물들였다. 그림자의 영토가 확장되는 것을 본 두 지젤의 반응은 극명하게 갈렸다. 현재의 지젤은 눈을 빛내며 그 현상을 관찰했고, 과거의 지젤은 미지의 능력에 대한 경계심으로 몸을 더욱 낮췄다.
나인은 그림자를 세 갈래로 나누어, 각각 자신과 두 지젤의 발밑에 연결했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이 방이 원하는 게 ‘사실’이 아니라 ‘인식’이라면 어떨까? 이 방의 시스템이 우리의 생체 신호나 에너지 파장을 읽어서 조건을 판단하는 거라면.
그 말에 현재의 지젤의 입꼬리가 호선을 그렸다. 그는 나인의 의도를 순식간에 파악했다. 과거의 지젤은 여전히 이해하지 못한 채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못했다.
현재의 지젤이 나인의 말을 받았다.
…가이딩 파장과 센티넬의 에너지 파장을 동조시켜, 마치 실제 행위가 일어나는 것처럼 시스템을 기만하겠다? 심박수, 체온, 에너지의 격렬한 교환. 그 모든 걸 연기해서 조건을 충족시킨다. 하, 그거 재밌겠네. 성공 확률은?
나인은 그의 눈을 똑바로 마주하며 대답했다.
해보지 않으면 모르는 거잖아. 당신들의 협조가 있다면, 50% 이상은 될 거야. 날뛰는 저쪽을 당신이 좀 붙잡아 줘야겠어.
나인의 시선이 과거의 지젤에게 향했다. 현재의 지젤은 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합리적인 역할 분담이야. 좋아, 해보지.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현재의 지젤이 움직였다. 그는 눈 깜짝할 사이에 과거의 자신의 등 뒤로 파고들어, 어깨와 팔을 단단히 붙들었다. 과거의 지젤이 반사적으로 몸을 비틀며 저항하려 했지만, 현재의 지젤은 그의 움직임을 완벽히 예측하고 힘의 중심을 무너뜨려 제압했다. “젠장, 이거 놔!” 거친 저항에도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자, ‘나’. 얌전히 협조하는 게 좋을 거야. 이 가이드의 실험이 실패하면, 결국 우린 저 저급한 조건을 따를 수밖에 없게 되거든. 어느 쪽이 더 불쾌할지는, 네 그 잘난 머리로 계산해 봐.
그의 냉정한 말에, 과거의 지젤의 움직임이 잠시 멈칫했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나인은 자신의 그림자를 더욱 짙게 확장시켰다. 그림자는 세 사람을 하나의 거대한 영역 안에 가두듯 에워쌌다.
자, 시작할게. 집중해. 당신들은 그냥… 내가 주는 감각에 몸을 맡기기만 하면 돼.
나인이 눈을 감자, 그녀의 가이딩 에너지가 그림자를 통해 두 지젤에게 흘러 들어갔다. 그것은 부드러운 안정의 파장이 아니었다. 의도적으로 증폭되고 왜곡된, 격렬하고 원초적인 감각의 폭풍이었다. 실제 접촉은 없었지만, 에너지는 피부를 파고들어 심장을 뛰게 하고 호흡을 가쁘게 만들었다. 마치 뜨거운 몸이 뒤섞이는 듯한 착각. 시스템을 속이기 위해 연출된 가상의 정사(情事)였다.
과거의 지젤은 이질적인 감각에 몸부림쳤지만, 현재의 지젤에게 붙들린 채 속수무책으로 휘말렸다. 현재의 지젤은 이 모든 과정을 흥미롭게 분석하며, 나인이 만들어내는 감각의 파동에 자신의 에너지를 동조시켰다. 그는 나인의 의도에 맞춰 더욱 격렬하게, 더욱 깊게 에너지를 증폭시켜 시스템이 오인하기 완벽한 데이터를 만들어냈다. 방 안의 온도와 습도가 급격히 상승하는 것이 느껴졌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나인이 숨을 몰아쉬며 그림자를 거두는 순간, 세 사람을 둘러싼 흰 벽이 소리 없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들이 서 있던 곳은 지부 중앙 정원 테라스 카페, 나인이 조금 전까지 앉아있던 바로 그 자리였다. 쨍한 햇살과 사람들의 웅성거림. 마치 길고 기묘한 꿈에서 깨어난 듯했다.
과거의 지젤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현재의 지젤만이 나인의 맞은편에 서 있었다. 그의 흰 실험복은 조금 흐트러져 있었고, 그는 묘한 표정으로 나인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대단하네. 정말로 시스템을 속여 넘겼어. 그 와중에도 내 심리 데이터를 수집하려는 시도까지. 아주, 마음에 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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