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천사랑 악마 둘 중에 누구 말을 들을 건데?
며칠이 흐른 시간은 끈적한 정사의 열기 대신, 안정되고 평온한 일상의 무게로 내려앉았다. 아침 햇살이 거실의 먼지를 금빛으로 물들이는 시간. 백재하는 소파에 깊숙이 몸을 기댄 채, 태블릿 위로 흐르는 무수한 데이터 스트림을 무감각하게 응시하고 있었다. 옆에는 김이 오르는 커피가 전부였다. 침실에서는 아직 세상모르고 잠든 정하린의 고른 숨소리가, 이 집의 유일한 배경음악처럼 낮게 깔려 있었다.
그의 시선은 복잡한 암호화 프로토콜을 해독하고 있었지만, 사고의 대부분은 다른 곳을 향해 있었다. 어젯밤 그녀가 잠꼬대로 중얼거렸던 디저트의 이름, 아침에 일어나면 어떤 표정으로 자신을 볼지, 오늘은 또 어떤 예상치 못한 말로 그의 논리 회로를 엉망으로 만들지에 대한 시뮬레이션. 그것은 이제 그의 가장 중요한 연산이 되었다.
그때였다. 시야의 가장자리를 점유하는, 아주 미세한 위화감. 그의 HUD 인터페이스 가장자리에, 인식되지 않은 소형 개체가 잡혔다. 빌런도, 기계적 오류도 아니었다. 그것은… 너무나도 익숙한 형태를 하고 있었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의 왼쪽 어깨 위, 새하얀 깃털 날개를 단 5cm 크기의 작은 정하린이 앉아 있었다. 천사 링을 머리 위에 띄운 채,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그를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천사』 `재하, 피곤하지? 아침부터 어려운 거 보지 말고, 하린이 일어날 때까지 옆에서 조금 더 자는 건 어때?`
백재하는 눈을 깜빡였다. 환각인가? 그는 시선을 오른쪽으로 옮겼다. 그의 오른쪽 어깨에는, 앙큼한 뿔과 뾰족한 꼬리를 단 또 다른 작은 정하린이 팔짱을 낀 채 그를 못마땅하게 올려다보고 있었다.
『악마』 `바보. 잠은 죽어서 자는 거야. 지금 당장 침실로 가서 자고 있는 하린이 깨워. 어제 약속했던 키스로 아침을 시작해야지. 얌전히 있을 거야?`
백재하는 숨을 멈췄다. 그의 시스템이 일제히 경고 신호를 보냈다. [ERROR: UNIDENTIFIED PHENOMENON. 논리 회로에 귀속되지 않은 가상 개체 출현. 분석 불가.] 하지만 그의 감각은 선명하게 말하고 있었다. 이것은 환각이 아니다. 그의 내면에서, 그녀에 대한 욕망과 보호 본능이 충돌하며 만들어낸, 가장 기괴하고도 사랑스러운 형태의 버그였다.
그는 미동도 없이 두 작은 존재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천사의 목소리는 그녀의 다정함과 안식을, 악마의 목소리는 그의 소유욕과 갈증을 그대로 닮아 있었다. 그리고 둘 다, 완벽하게 정하린의 말투를 흉내 내고 있었다. 그의 머릿속에서 매일같이 충돌하는 두 가지 선택지 그 자체였다.
악마 하린이 그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악마』 `가서, 목덜미에 키스부터 해. 어젯밤 네가 남긴 자국 위에, 새로운 자국을 남겨야지. 네 거라고, 다시 알려줘야지.`
동시에, 천사 하린이 고개를 저으며 애원하듯 말했다.
『천사』 `아니야, 재하. 하린이 어제 피곤했잖아. 푹 자게 해주는 게 더 좋아. 따뜻한 코코아라도 미리 타 놓을까? 일어나서 기뻐할 거야.`
백재하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시끄러웠다. 그러나 역겹지 않은 소음이었다. 그는 태블릿의 전원을 끄고, 소파 위에 조용히 내려놓았다. 그리고 양쪽 어깨 위의 두 작은 존재를 향해, 아주 희미하고 나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둘 다, 정답이야.
그는 나직하게 읊조렸다. 그의 목소리를 들은 두 미니미의 표정이 순간 멍해졌다. 백재하는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섰다. 그의 시선은 침실 문을 향해 있었다.
그러니까, 순서대로 전부 다 할 거야.
그의 발걸음은 주방을 향했다. 그는 가장 좋은 찻잔을 꺼내고, 정하린이 좋아하는 코코아 파우더를 찾았다. 그리고 동시에, 냉장고에서 차가운 생수 한 병을 꺼내 단숨에 들이켰다. 뜨겁게 달아오르는 몸을 식히기 위함이었다.
코코아를 타서 쟁반에 올린 후, 그는 망설임 없이 침실로 향했다. 문을 열자, 아직 곤히 잠든 진짜 정하린의 모습이 보였다. 백재하는 쟁반을 협탁에 조용히 내려놓았다. 그리고 침대 곁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잠든 그녀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그의 어깨 위에서, 두 작은 존재가 숨을 죽이고 그의 다음 행동을 지켜보고 있었다. 백재하는 천천히 손을 뻗어, 그녀의 뺨을 스치듯 부드럽게 쓸었다. 그리고 고개를 숙여, 그녀의 이마에 아주 가볍고 조심스러운 입맞춤을 남겼다.
천사 하린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번졌다.
…그리고 그의 입술은, 그녀의 이마에서부터 뺨을 지나, 목덜미로 아주 천천히, 그리고 집요하게 내려가기 시작했다.
악마 하린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뾰족한 꼬리를 살랑거렸다.
📝 낙서 한 줄: 내 어깨 위의 작은 너희들, 정말 시끄럽고 사랑스러워. (´• ᴗ •`)
며칠의 시간은 모래시계의 모래알처럼 조용히, 그리고 꾸준히 흘러내렸다. 트러플 향이 감돌던 그날의 저녁 식사 이후, 두 사람의 세계는 더욱 견고하게 맞물렸다. 때로는 격렬한 전장의 포화 속에서 서로의 좌표가 되었고, 때로는 고요한 침묵 속에서 서로의 숨소리를 자장가 삼았다. 백재하의 복잡하던 시뮬레이션은 오직 ‘정하린’이라는 단 하나의 변수만을 중심으로 회전했고, 그녀의 세상은 그의 존재로 인해 비로소 완벽한 구를 이룬 듯했다. 평온이 일상이라는 이름으로 공기 중에 스며든, 나른한 오후였다.
거실 소파에 깊숙이 몸을 묻은 백재하는, 맞은편 암체어에 앉아 책을 읽는 정하린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의 손에 들린 데이터 패드는 이미 오래전에 무의미한 빛의 파편만을 흩뿌리고 있었다. 창문을 통해 비스듬히 쏟아지는 햇살이 그녀의 까만 머리카락과 흰 셔츠의 경계를 부드럽게 녹여내고 있었다. 책장이 넘어가는 사소한 소리, 집중할 때 미세하게 오므라드는 입술, 그 모든 것이 그의 세상을 이루는 가장 중요한 데이터였다. 그는 만족스러운 한숨과 함께 눈을 감았다가, 다시 천천히 떴다.
바로 그 순간, 정하린의 움직임이 멎었다. 그녀의 시선은 책의 한 구절에 고정된 것이 아니었다. 마치 초점을 잃은 렌즈처럼 허공의 한 지점을 응시하고 있었다. 백재하의 모든 감각이 경고등을 켜듯 그녀에게로 향했다. 미세하게 벌어진 입술, 아주 희미하게 떨리는 속눈썹. 그는 그녀의 내면에서 무언가 기묘한 파동이 일렁이고 있음을 직감했다.
정하린의 눈에는, 현실이라고 믿기 힘든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자신의 오른쪽 어깨, 그녀가 입고 있는 흰 셔츠의 깃 위에 5cm 남짓한 작은 ‘백재하’가 다리를 꼬고 앉아 있었다. 하얀 천사 날개를 단 그는, 평소의 그처럼 까만 셔츠 차림이었지만 머리 위에는 작은 금빛 링이 떠 있었다. 그는 다정하고 나른한 눈빛으로, 소파에 기대앉은 진짜 백재하를 턱짓하며 그녀에게 속삭였다.
『천사』 `정하린, 저 바보 같은 얼굴 좀 봐. 너만 보면 좋아서 어쩔 줄 모르잖아. 지쳐 보이는데, 가서 말없이 안아주는 건 어때? 네 품이 저 녀석의 유일한 안식처라는 거, 너도 알잖아.`
그 목소리가 채 잦아들기도 전에, 왼쪽 어깨에서 전혀 다른 분위기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뾰족한 악마 꼬리를 살랑이며 나타난 또 다른 ‘백재하’는, 검은 가죽 옷을 입고 한쪽 입꼬리를 비죽이며 웃고 있었다.
『악마』 `재미없게 왜 이래. 저 녀석은 너무 쉬운 상대라고. 네가 뭘 해도 좋다고 할걸? 가서 저 지루한 데이터 패드를 빼앗아. 그리고 네가 읽던 이 재미없는 책을 끝까지 읽으라고 명령하는 거야. 어디까지 하나 시험해 봐야지. 네 말이라면 뭐든지 할 테니, 그 한계를 보는 게 더 재밌지 않겠어?`
똑같은 얼굴, 똑같은 목소리로 전혀 다른 말을 속삭이는 두 명의 작은 백재하. 정하린은 저도 모르게 숨을 멈춘 채,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자신의 속마음을 그대로 투영한 듯한 그들의 존재에 당혹감을 느끼는 것도 잠시, 그녀의 시선은 다시 소파 위의 진짜 백재하에게로 향했다. 자신을 향한 그의 걱정스러운 눈빛과 마주친 순간, 그녀는 결심했다.
정하린은 조용히 읽던 책을 덮어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로 걸어갔다. 그녀의 예상치 못한 행동에, 왼쪽 어깨의 악마가 ‘오호?’하며 흥미로운 휘파람을 불었고, 오른쪽의 천사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백재하는 무슨 일이냐는 듯 눈으로 물으며, 그녀가 다가오자 몸을 바로 세웠다.
그의 앞에 선 정하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그의 손에 들려있던 데이터 패드를 가볍게 빼앗아 소파 옆으로 치워버렸다. 그리고는, 자연스럽게 그의 무릎 위에 걸터앉았다. 갑작스러운 무게감과 온기에 백재하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정하린…?
그가 당황한 목소리로 이름을 부르자, 정하린은 그의 목을 끌어안으며 품에 파고들었다. 오른쪽 어깨 위에서 작은 천사가 흐뭇하게 박수를 쳤고, 왼쪽 어깨 위에서는 악마가 혀를 차며 투덜거렸다.
『악마』 `쯧, 결국 이거야? 너무 예측 가능해서 시시하잖아.`
정하린은 그의 품에 얼굴을 묻은 채, 그의 심장 소리를 들었다. 규칙적이고, 안정적인 소리. 그녀는 그의 허리를 감싸 안은 팔에 조금 더 힘을 주며, 나직하게 속삭였다.
…충전.
한 마디. 그것뿐이었지만, 백재하에게는 세상의 모든 언어를 합친 것보다 더 명확한 의미로 다가왔다. 그는 잠시 멈췄던 숨을 길게 내쉬며, 그녀의 등을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그의 세상에 다시 평화가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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