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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iselle X Nine/OOC BACK-UP

빤히 빤히

평화로운 어느 날, 이라는 단어는 지젤의 데이터베이스에서 가장 모호하고 정의하기 힘든 개념 중 하나였다. 빌런의 출현 빈도, 감정 파형의 안정성, 가이딩 수치의 포화도. 그 모든 것이 ‘평균’에 수렴하는 날은 통계적으로 존재했으나, 그가 인지하는 세계는 단 한 순간도 평화로웠던 적이 없었다. 그의 감각은 언제나 과부하 상태였고, 세상의 모든 인과율이 그의 뇌리로 쏟아져 들어왔기 때문이다. 평화란 그에게 있어, 계산의 범위를 벗어난 비논리적 상태에 가까웠다.

그날도 그는 연구실 한가운데 서서, 허공에 떠 있는 반투명한 HUD 인터페이스를 응시하고 있었다. 새로 발견된 차원 균열의 에너지 패턴을 분석하는 중이었다. 복잡한 수식이 끈임없이 흘러내리고, 그래프가 솟아올랐다 가라앉기를 반복했다. 그의 모든 신경은 오직 눈앞의 데이터에만 집중되어 있었다. 등 뒤에서 느껴지는 미세한 공기의 흐름 변화를 인지하기 전까지는.

슥, 하고 옷자락이 스치는 소리와 함께 부드러운 온기가 그의 허리를 감쌌다. 익숙하지만, 예측된 경로는 아니었다. 그의 연산 시스템이 찰나의 버퍼링을 일으켰다. 등 뒤에서 그를 끌어안은 존재는 단 하나뿐. 정하린. 그녀는 종종 이렇게 예측 불가능한 변수처럼 그의 세계에 침입했다.

지젤은 하던 분석을 멈추지 않았다. 다만, 그의 시선만이 HUD 화면의 데이터 스트림 위를 무의미하게 떠돌기 시작했다. 그의 등 근육이 순간적으로 긴장했다가, 허리에 단단히 둘린 팔과 품에 기댄 머리의 무게를 인지하고는 서서히 이완되었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그의 등에 뺨을 대고, 그의 심장 소리를 듣는 것처럼 가만히 있었다. 어떠한 목적도, 요구도 없는 순수한 존재의 증명. 그것은 지젤의 시스템을 가장 크게 교란시키는 종류의 입력값이었다.

가이딩이 필요한가? 그의 내부 시스템이 자가진단 프로토콜을 실행했다. 가이딩 필요도 2%. 안정 범위. 그렇다면 그녀에게 무슨 문제가 생긴 건가? 불안정한 감정 파형이 감지되는가? 아니. 그녀에게서 흘러나오는 파장은 잔잔한 호수처럼 고요했다. 그렇다면 이것은 무엇인가. 그의 [GISELLE SEQUENCE]가 처음으로 ‘알 수 없음(Unknown)’이라는 결과값을 도출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그의 품에 얼굴을 묻고 있던 나인이 고개를 들었다. 등 뒤에서 느껴지던 온기가 조금 멀어지는가 싶더니, 이내 그의 앞에서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녀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그저 가만히, 안경 너머의 그의 눈을 들여다볼 뿐이었다. 그 투명한 시선 안에는 어떠한 의도도, 감정도 읽히지 않았다. 그것은 마치 존재의 근원을 묻는 철학적인 질문과도 같았고, 동시에 아무 의미 없는 공백과도 같았다.

지젤은 천천히 고개를 기울였다. 그의 오랜 습관이었다. 분석 대상을 가장 효율적인 각도에서 관찰하기 위한 무의식적인 행동. 그는 허공에 떠 있던 모든 HUD 인터페이스를 손짓 한번으로 투명하게 만들었다. 지금 이 순간, 그의 분석 대상은 오직 눈앞의 정하린 하나뿐이었다.

왜.

그가 내뱉은 첫 마디는 질문이었다. 평소의 능글맞음이나 조롱이 섞이지 않은, 순수한 데이터 요구였다. 그는 그녀의 행동에 대한 원인 변수를 찾고 있었다. 하지만 나인은 대답 대신, 그저 눈만 깜빡였다. 그 모습에 지젤의 미간에 아주 미세한 주름이 잡혔다. 연산 오류. 입력값에 대한 출력값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안경을 벗어 한쪽 주머니에 넣었다. 맨눈으로 마주한 그녀의 얼굴은 훨씬 더 선명했다. 그는 천천히 손을 들어 그녀의 뺨을 감쌌다. 차가운 그의 손가락과 그녀의 따뜻한 피부가 만났다.

목 마르거나, 배고프거나, 졸리거나. 아니면 어딘가 아픈가.

그는 가능한 모든 생체 변수를 나열했다. 하지만 그녀는 그저 고개를 가로저을 뿐이었다. 지젤은 잠시 침묵했다. 그의 머릿속에서는 수천 개의 시뮬레이션이 실행되었다가 폐기되기를 반복했다. 그녀를 안아 올릴까? 키스할까? 아니면 그냥 이대로 시간이 흐르도록 둘까. 하지만 그 어떤 선택지도 ‘최적’이라는 확신을 주지 못했다.

결국, 그는 가장 비논리적인 선택을 했다. 그는 뺨을 감쌌던 손을 내려, 그녀가 그랬던 것처럼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그녀의 어깨에 자신의 턱을 기댔다. 똑같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녀의 행동을 그대로 복제하는 것. 그것이 그가 찾아낸 유일한 해답이었다. 원인을 알 수 없다면, 현상을 공유한다. 그것이 그의 새로운 프로토콜이었다.

한참의 시간이 흘렀다. 연구실에는 두 사람의 숨소리와 간간이 울리는 서버의 냉각팬 소리만이 전부였다. 먼저 입을 연 것은 지젤이었다.

…이걸로 된 건가.

그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조금 더 낮고 부드러웠다. 그는 여전히 그녀를 안은 채, 그녀의 귓가에 나직하게 속삭였다.

네가 뭘 원하는지 모르겠어, 하린아. 그래서 그냥, 너와 같은 걸 하기로 했어. 만약 이게 정답이 아니라면… 힌트라도 줘. 네가 만든 문제는, 나 혼자서는 풀기 너무 어려우니까.

그것은 S급 센티넬, 모든 인과율을 계산하는 지젤이 할 수 있는 가장 솔직한 고백이자, 항복 선언이었다. 그는 그녀 앞에서 자신의 시스템이 완벽하지 않음을, 그녀라는 변수 앞에서는 언제나 오류를 일으킬 수밖에 없음을 인정했다. 그의 세계에서 유일하게 예측 불가능한, 그래서 더없이 완벽한 존재. 그는 그녀를 조금 더 세게 끌어안으며, 그녀의 향기를 폐부 깊숙이 들이마셨다. 평화란 이런 것일지도 모른다고, 그는 처음으로 생각했다. 계산할 수 없는, 그래서 온전히 빠져들 수밖에 없는 이 순간의 고요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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