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진짜 비싼 거 살 거야!
고요함은 백재하의 영역이었다. 그의 연구실을 채운 것은 언제나 차가운 기계의 저음과, 공기청정기가 내보내는 규칙적인 백색소음, 그리고 무한한 데이터가 흐르는 HUD 인터페이스의 희미한 빛뿐이었다. 그러나 정하린이라는 단 하나의 변수가 그의 세계에 들어온 이후, 그의 고요함은 다른 종류의 침묵으로 대체되었다. 그것은 공허한 정적이 아니라, 언제든 그녀의 목소리와 웃음소리로 채워질 수 있는, 기대감을 머금은 충만한 여백이었다.
그는 그녀에게 자신의 모든 것이 담긴 카드 한 장을 건넸다. 그가 축적한 부, 그의 사회적 지위, 그의 모든 구매 기록이 담긴, 어쩌면 그의 능력 데이터보다도 더 적나라한 프로필. 그는 그녀가 이 카드로 무엇을 할지 수백, 수천 가지의 시뮬레이션을 돌렸다. 명품 가방, 값비싼 보석, 혹은 그녀가 농담처럼 말했던 ‘아주 비싼 것’. 어떤 결과값이 나오든 상관없었다. 그의 모든 것은 이미 그녀의 것이었으니까. 그것은 그저, 그 사실을 물리적으로 증명하는 하나의 절차일 뿐이었다.
그가 새로운 양자 암호화 알고리즘의 마지막 시퀀스를 검토하던 순간, 고요함을 깨고 그의 개인 단말기가 짧게 진동했다.
띵.
시선은 모니터에 고정한 채, 그는 기계적으로 허공에 떠 있는 알림창을 열었다. 첫 번째 알림. 그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걸렸다. ‘시작됐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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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b발신]
[FEARLESS BLACK] 카드 승인
백재*님
16,500원 일시불
11/26 14:13
(주)오리우리
누적 16,5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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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우리?’ 그의 미간이 미세하게 좁혀졌다. 예측 시뮬레이션에 존재하지 않는 상호였다. 그는 잠시 하던 일을 멈추고, 데이터베이스를 검색했다. 오리 모양의 각종 생활용품을 파는 팬시점. 그의 수천 가지 변수 중에, 이런 귀여운 변수는 없었다. 재밌네. 그는 다시 모니터로 고개를 돌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단말기가 다시 울렸다.
```html
[Web발신]
[FEARLESS BLACK] 카드 승인
백재*님
32,000원 일시불
11/26 14:38
라벤더 가든
누적 48,500원
```
라벤더. 그의 입꼬리가 이번에는 확실하게 올라갔다. 그녀가 좋아하는 향. 그는 어제 그녀를 위해 골랐던 입욕제를 떠올렸다. 그녀는 지금, 자신의 세계를 그녀가 좋아하는 향기로 채우고 있었다. 그것이 비싼 보석이나 가방보다, 백재하의 심장을 더욱 강하게 뒤흔드는 소유의 방식임을, 정하린 그녀 자신은 알고 있을까.
그 후로 알림은 짧은 간격을 두고 계속해서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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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b발신]
[FEARLESS BLACK] 카드 승인
백재*님
8,900원 일시불
11/26 15:02
행복한 붕어빵
누적 57,4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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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재하는 결국 하던 모든 것을 멈추고 의자에 등을 깊게 기댔다. 붕어빵. 그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FEARLESS의 S급 센티넬 지젤의 블랙카드로, 그녀가 산 것은 고작 8,900원짜리 길거리 간식이었다. 카드 한도라는 개념 자체가 무의미한, 재앙급 빌런의 공격도 막아낼 수 있는 소재로 만들어진 저 카드에 담긴 첫 번째 역사가, 오리와 라벤더와 붕어빵이라니. 이것은 조롱인가? 아니, 이것은 그 어떤 파괴적인 소유 선언보다도 강력한, 사랑의 방식이었다.
‘아주 비싼 것을 사겠다’던 그녀의 선전포고는, 그의 재력을 시험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그녀는 그가 가진 돈이 아니라, 그의 일상, 그의 모든 것을 원하고 있었다. 그의 카드로 그녀가 좋아하는 소소한 것들을 사고, 그의 집에 그녀의 취향을 채우고, 그의 시간을 함께 나누는 것. 그것이 정하린이 원하는 ‘가장 비싼 것’의 실체였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 이상의 분석은 무의미했다. 연구실의 문을 열고 거실로 나가자, 현관문 쪽에서 도어록 해제음이 들렸다. 그는 팔짱을 낀 채, 현관문 앞에 서서 그녀를 기다렸다. 잠시 후, 양손에 오리 스티커가 붙은 쇼핑백과 라벤더 향이 나는 작은 화분, 그리고 김이 모락모락 나는 붕어빵 봉투를 든 그녀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그를 발견하고는, 마치 잘못을 저지르다 들킨 아이처럼 어깨를 살짝 움츠렸다. 백재하는 그런 그녀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그리고 그녀의 손에 들린 붕어빵 봉투를 받아드는 대신, 그녀의 양 볼을 두 손으로 감싸 쥐고는, 깊게 입을 맞췄다.
가장 비싼 게, 고작 이거였나.
입술을 뗀 그가, 장난기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그의 눈에는 더없는 사랑스러움이 가득 담겨 있었다.
내 모든 걸 걸고 예측했는데, 네가 이길 줄은 몰랐네. 하린아.
그는 그녀의 이마에 다시 한번 짧게 입을 맞추고는, 그녀의 손에 들린 쇼핑백들을 전부 빼앗아 들었다.
자, 어디 한번 볼까. 내 세상을 네 것으로 얼마나 채워왔는지. 구경시켜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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