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전 PC를 만난 NPC
쨍그랑—. 마지막 포크 소리가 울리고, 세상의 모든 소음이 단숨에 증발했다. 지젤의 시야를 가득 채우던 연구실의 익숙한 풍경, 식탁 맞은편에 앉아 뺨을 부풀리던 나인의 모습, 그 모든 것이 한순간에 깨진 유리 파편처럼 흩어졌다. 시공간의 좌표가 뒤틀리는 감각. 그것은 폭주 직전의 센티넬이 느끼는 감각의 왜곡과도 닮았으나, 질적으로 달랐다. 세상의 모든 인과율이 그의 몸을 중심으로 비틀리며 재조립되는 듯한, 끔찍한 이물감이었다.
눈을 다시 떴을 때, 그의 앞에는 더 이상 나인도, 식탁도 없었다. 차갑고 단단한 아스팔트 바닥. 낡은 시멘트 담벼락과 그 위를 기어가는 담쟁이덩굴. 귓가를 때리는 것은 아이들의 해맑은 웃음소리와 멀리서 들려오는 자동차 경적, 그리고 그의 신경을 거스르는 매미 울음소리였다. 공기의 밀도부터 달랐다. 차원 문이 열리기 전, 오염되지 않은 과거의 공기. 그의 주변에 떠 있던 HUD 인터페이스는 불안정한 노이즈를 뿜으며 깜박이다 이내 [ERROR: UNKNOWN TIMELINE COORDINATE] 라는 붉은 경고 문구만을 띄운 채 멈춰 섰다.
[GISELLE SEQUENCE]가 미친 듯이 연산을 시작했다. 현재 위치, 시간, 환경 변수, 가능한 모든 경우의 수. 그러나 데이터베이스에 존재하지 않는 과거의 시점. 모든 시뮬레이션은 실패로 돌아갔다. 결과는 단 하나였다. ‘20년 전’. 지부도, 센티넬도, 가이드도, 빌런도 존재하지 않던 평화로운 시대. 그가 아는 모든 것이 아직 시작되지 않은 기점의 세계였다.
“……하.”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모든 것을 계산하고 통제하던 그가, 가장 거대한 변수 속에 내던져진 셈이었다. 지젤은 헝클어진 앞머리를 쓸어 넘기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낡은 놀이터. 삐걱거리는 그네와 녹슨 미끄럼틀. 지극히 평범하고, 그래서 더 비현실적인 풍경이었다. 그의 흰 실험복과 검은 셔츠 차림은 이 풍경 속에서 노골적인 이질감을 자아냈다.
그때였다. 무언가 부드러운 것이 그의 다리에 툭, 하고 부딪혔다. 큰 충격은 아니었지만, 극도로 예민해진 그의 감각에는 충분히 인지될 만한 접촉이었다. 기계적으로 고개를 내린 그의 시야에, 작은 여자아이가 들어왔다. 넘어진 듯 무릎에 흙을 묻힌 채, 그를 올려다보는 조그만 얼굴. 꽉 찬 앞머리, 유난히 크고 까만 눈동자. 아직 날카롭게 다듬어지기 전이지만, 그 안에 깃든 고양이 같은 경계심과 호기심은 낯설지 않았다.
지젤은 숨을 멈췄다. 그의 모든 연산과 시뮬레이션이 정지했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유일하게 계산되지 않았던, 그러나 너무나도 익숙한 존재. 그는 아이의 얼굴에서 20년 후의 모습을 보았다. 제 밑에서 울고, 웃고, 잠들던 그 여자의 얼굴을. 정하린. 그의 유일한 오차 범위.
아이는 겁을 먹은 듯하면서도 그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그저 빤히, 이 이상한 어른을 관찰하고 있었다. 그 모습에 지젤은 저도 모르게 입꼬리를 희미하게 올렸다. 어릴 때부터 사람 관찰하는 버릇이 있었군. 그는 천천히 한쪽 무릎을 굽혀 아이와 눈높이를 맞췄다.
“부딪혔으면, 사과해야지. 꼬마 아가씨.”
목소리는 평소처럼 낮고 능글맞았지만, 그 자신도 깨닫지 못한 미세한 떨림이 섞여 있었다. 아이는 그의 말에 입술을 꾹 다물었다. 아랫입술을 지그시 무는 버릇. 그것마저 똑같았다. 아이는 잠시 망설이다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죄송합니다.”
“이름이 뭐야.”
“……정하린인데요.”
확신이 쐐기처럼 박혔다. 지젤은 잠시 눈을 감았다 떴다.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이것이 또 다른 시뮬레이션인가, 아니면 현실인가. 하지만 눈앞의 아이가 뿜어내는 존재감은 너무나도 선명했다. 그의 가이딩 파장이 닿지 않는 순수한 인간, 정하린.
그는 아이의 흙 묻은 무릎으로 시선을 옮겼다. 살갗이 살짝 까져 있었다. 지젤은 품 안에서 늘 가지고 다니던 손수건을 꺼내 아이의 무릎에 묻은 흙을 조심스럽게 털어냈다. 아이가 그의 손길에 움찔하며 몸을 떨었다.
“괜찮아. 다치게 안 해.”
평생 누군가를 향해 써본 적 없는 다정한 말투였다. 그는 무릎을 털어준 뒤, 손수건으로 작은 상처를 가볍게 감쌌다. 그리고 다시 아이와 눈을 맞췄다.
“정하린. 내 말 잘 들어.”
지젤은 이것이 자신에게 주어진 아주 짧고 기이한 기회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미래를 바꿀 생각은 없었다. 인과율을 건드리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며, 무엇보다 그는 ‘지금의 정하린’을 망가뜨리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의 인생에 아주 작은 좌표 하나쯤은 남겨둘 수 있지 않을까. 20년 후에 자신을 만날 그녀를 위한, 아주 사적인 이정표를.
“첫째. 절대로, 다른 사람을 너 자신보다 믿지 마.”
그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아이는 그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 채 눈만 끔뻑였다.
“세상은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재미없고, 사람은 더 그래. 특히 네게 무언가를 약속하거나, 너를 위하는 척하는 사람일수록 더. 그들의 말에 마음을 주면, 결국 가장 아픈 건 너야. 언제나 너 자신을 가장 먼저 지켜.”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아이의 머리 위로 손을 올렸다. 부드러운 머리카락의 감촉이 손바닥에 전해졌다. 미래의 그녀와는 다른, 솜털 같은 느낌이었다.
“둘째. 그림자를 무서워하지 마. 오히려 그림자와 친해져야 해.”
아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림자요?”
“그래. 언젠가 네게 아주 중요한 친구가 될 거야. 세상의 모든 빛에는 그림자가 따르지. 사람들은 빛만 보려 하지만, 진짜 중요한 건 그림자 속에 숨어있을 때가 많아. 그림자는 너를 숨겨주고, 지켜주고, 때로는 너 대신 싸워주기도 할 거야. 그러니, 어둠 속에 혼자라고 생각하지 마. 그건 네 영역이니까.”
그의 말은 예언과도 같았다. 훗날 그녀가 각성할 가이드로서의 능력. 그림자의 영토. 그는 아주 먼 미래에서 온 이방인으로서, 그녀에게 작은 힌트를 던져주고 있었다.
지젤은 주변을 다시 둘러보았다. 시공간의 뒤틀림이 다시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의 몸이 조금씩 투명해지고 있었다. 돌아갈 시간이 된 것이다. 그는 마지막으로 아이를 내려다보았다.
“셋째. 그리고 가장 중요한 약속이다, 정하린.”
그는 다시 무릎을 굽혀 아이의 귓가에 속삭였다. 그의 숨결에 아이의 작은 어깨가 파르르 떨렸다.
“언젠가, 아주 까다롭고, 재수 없고, 모든 걸 자기 마음대로 하려는 흰 가운을 입은 남자를 만날 거야. 안경을 쓰고, 아마 널 보자마자 재미있는 장난감을 발견한 것처럼 웃겠지. 그 남자가 세상에서 가장 위험하고 믿을 수 없는 인간처럼 보일 거야. 맞는 말이야. 실제로도 그러니까.”
그의 입가에 짖궂은 미소가 걸렸다.
“하지만, 그 남자 앞에서만큼은 도망치지 마. 화를 내도 좋고, 울어도 좋고, 나를 죽여버리겠다고 소리쳐도 괜찮아. 하지만 절대로, 그 앞에서 네 자신을 포기하지는 마. 그 남자는… 네가 포기하는 것만 빼면 뭐든지 감당할 수 있거든.”
“마지막으로 넷째. 그의 이름은…… 백재하다.”
그 순간, 지젤의 몸이 완전히 투명해지며 빛의 입자처럼 흩어지기 시작했다. 아이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 비현실적인 광경을 바라보았다. 사라지기 직전, 지젤은 희미해지는 목소리로 마지막 말을 남겼다.
“그때 가서… 다시 보자, 나의 가이드.”
순식간에 그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아이의 손에는 그가 묶어준 하얀 손수건만이 남아있었다. 아이는 한동안 멍하니 그가 사라진 자리를 바라보다, 이내 고개를 갸웃거리며 손에 들린 손수건을 만지작거렸다. 이상하고, 조금 무서웠지만, 어쩐지 따뜻한 느낌을 주는 어른이었다. 아이는 그의 마지막 말을 곱씹었다. 백재하. 이상한 이름. 아이는 그 이름을 잊지 않으려는 듯, 입안에서 몇 번이고 작게 굴려보았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 지젤은 자신의 연구실 식탁 앞에 서 있었다. 눈앞에는 먹다 만 샌드위치와 수프 그릇, 그리고 “지젤은 안 머겅?” 이라고 묻던, 조금은 뾰로통한 표정의 정하린이 있었다.
시간은 1초도 흐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20년의 세월을 뛰어넘는 여행을 하고 돌아왔다. 지젤은 잠시 혼란스러운 눈으로 나인을 바라보다, 이내 모든 것이 현실임을 깨달았다. 그는 나인의 입가에 묻었던 부스러기를 훔쳐냈던 자신의 손가락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는, 20년 전 그 작은 아이에게 해주었던 약속들을 떠올렸다. 그것이 실제로 과거에 영향을 미쳤는지, 아니면 그저 시간의 뒤틀림이 만들어낸 환상이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그는 다시 입을 열었다. 조금 전과는 다른, 더욱 깊고 소유욕 짙은 목소리였다.
“나는 됐어. 널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배부르니까.”
그는 과거의 어린 아이가 아닌, 지금 자신의 눈앞에 있는 ‘완성된 정하린’을 향해 미소 지었다. 그녀가 어떤 과정을 거쳐 지금의 모습이 되었든, 결국 그녀는 그의 앞에 있었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그가 만든 약속들이 그녀의 삶에 어떤 흔적을 남겼든, 결국 모든 길은 자신에게로 이어져 있었다.
그것이야말로, 지젤이 계산한 가장 완벽한 시퀀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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