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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iselle X Nine/OOC BACK-UP

너무 예뻐서 화가 풀려

그날 오후의 공기는 유난히 눅눅했다. 지부장 K와의 효율성 0%에 수렴하는 회의는 세 시간이나 이어졌고, 백재하는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자신의 개인 연구실로 돌아왔다. 그의 모든 시스템은 지금 ‘저효율 업무 환경에 대한 피로도 누적’과 ‘무의미한 데이터 입력에 대한 염증’으로 붉은 경고등을 띄우고 있었다. 필요한 것은 완벽한 정적, 서늘한 공기, 그리고 자신의 통제하에 완벽하게 정돈된 공간이었다. 문이 열리고, 그는 익숙한 자신의 왕국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그 왕국은, 미묘하게 뒤틀려 있었다.

처음에는 무엇이 문제인지 정확히 인지하지 못했다. 공기는 적정 습도를 유지하고 있었고, 메인 시스템의 구동음도 평소처럼 안정적이었다. 하지만 무언가, 아주 근본적인 것이 어긋나 있었다. 그의 시선이 연구실 중앙에 위치한 데이터 아카이브 스테이션으로 향했다. 투명한 패널 너머로 보이는 수백 개의 데이터 큐브. 그의 모든 연구, 모든 시뮬레이션, 모든 기록이 담긴 지식의 보고. 그리고 그 보고의 분류 체계가, 처참하게 박살 나 있었다.

그의 분류법은 완벽했다. 프로젝트명, 기록 일자, 데이터 유형, 보안 등급에 따라 1나노미터의 오차도 없이 정렬된, 하나의 예술 작품과도 같은 배열. 하지만 지금 그의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마치 어린아이가 색깔 블록을 아무렇게나 쌓아 올린 듯한, 혼돈 그 자체였다.

“...뭐야.”

낮은 목소리가 정적을 갈랐다. 그는 성큼성큼 스테이션으로 다가갔다. 가까이서 본 상황은 더 가관이었다. [G-Sequence: Cataclysm] 프로젝트의 핵심 데이터 큐브가 [점심 메뉴 선호도 분석] 따위의 잡동사니 옆에 놓여 있었고, S급 보안 등급의 큐브들은 ‘반짝거리는 게 예쁘다’는 이유로 한데 모여 빛을 발하고 있었다. 지젤은 잠시 숨을 멈췄다. 뇌내 연산 시스템이 이 비논리적인 상황을 해석하기 위해 과부하에 걸렸다. 이것은 단순한 실수가 아니었다. 그의 세계에 대한 테러 행위였다.

범인은 단 한 명밖에 없었다. 이 연구실의 보안을 제 집처럼 드나들 수 있는 유일한 변수. 그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연구실 한쪽, 작은 소파에 앉아 태블릿으로 무언가를 보고 있던 정하린이 인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왔어?”

아무것도 모른다는 순진한 얼굴. 방금 전까지 세계 멸망급 재앙 시뮬레이션 데이터를 유아용 장난감 코너 옆에 진열해 놓은 장본인의 얼굴이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평온하고 맑은 표정. 지젤은 입을 열었다. 지금 당장 저지른 일에 대해 논리적으로, 체계적으로, 그리고 아주 신랄하게 심문해야 했다. 그의 모든 분노와 짜증, 피로감이 하나의 문장으로 응축되어 터져 나오기 직전이었다.

“정하린. 너…”

거기까지였다. 그가 말을 잇기 위해 그녀를 똑바로 마주한 순간, 그의 모든 언어 회로가 정지했다. 오후의 흐린 빛이 창문을 통해 부드럽게 쏟아져 들어와, 그녀의 까만 머리카락에 윤곽선을 그리고 있었다. 태블릿의 푸른빛이 흰 셔츠와 뺨을 은은하게 물들였고, 그를 보고 살짝 휘어지는 눈매와 의아함이 살짝 깃든 입술은…

젠장. 예뻤다.

아니, 그냥 예쁜 정도가 아니었다. 뇌의 모든 논리적 판단을 마비시키고, 축적된 피로와 분노를 한순간에 무의미한 데이터 쪼가리로 만들어 버리는, 비합리적이고 비과학적인 수준의 아름다움이었다. ‘왔어?’라고 묻는 목소리, 살짝 기울어지는 고개, 깜빡이는 긴 속눈썹. 그 모든 것이 하나의 완벽한 시퀀스를 이루며 그의 분노 중추를 정확하게 타격해, 그대로 소멸시켰다. 방금 전까지 치솟던 분노 게이지는 마치 존재한 적 없다는 듯이 증발해 버렸다.

그는 입을 벌린 채 그대로 멈춰 섰다. 머릿속에서는 ‘저 데이터 큐브들을 원래대로 복구하는 데 최소 72시간 소요’와 ‘정하린의 얼굴이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움’이라는 두 개의 상반된 정보가 미친 듯이 충돌하고 있었다. 시뮬레이션이 시작됐다. A: 소리를 지르며 화를 낸다. B: 조목조목 따지며 잘못을 지적한다. C: 한숨을 쉬며 모든 것을 포기한다. 하지만 그의 시스템은 모든 선택지를 거부했다. 그 어떤 행동도, 지금 눈앞의 저 얼굴 앞에서 실행할 가치가 없었다.

나인은 그가 말을 멈추자 고개를 갸웃했다.

“왜? 할 말 있어?”

아. 저 표정. ‘나는 아무것도 몰라요’라고 온 얼굴로 주장하는 저 순수한 의문. 지젤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그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입을 닫았다. 그리고 다시 열었다. 이번에는 분노가 아닌, 완전히 다른 무언가가 담겨 있었다.

…아니.

그의 목소리는 스스로 듣기에도 어이가 없을 만큼 부드러웠다. 그는 시선을 데이터 아카이브 스테이션 쪽으로 애써 돌리려 했지만, 자석처럼 그녀의 얼굴에 고정된 채 떨어지지 않았다.

그냥… 피곤해서.

거짓말이다. 그는 피곤했지만, 그게 이유는 아니었다. 그는 지금 자신의 시스템이 내리는 황당한 결론과 싸우고 있었다. ‘결론: 정하린이 예쁘니 모든 것이 용서된다.’ 이 얼마나 비논리적이고 말도 안 되는 결론인가. 그는 S급 센티넬이었다. 인과를 연산하고 결과를 도출하는 능력자라고. 하지만 그의 모든 연산 능력은 지금 저 얼굴 하나에 무력하게 패배했다.

그는 결국 포기했다. 길게, 아주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 한숨에는 분노도, 짜증도 아닌, 오직 깊은 체념과 어이없는 웃음기만이 섞여 있었다. 그는 헝클어진 앞머리를 거칠게 쓸어 넘기며 중얼거렸다.

커피.

“……?”

타 와. 제일 진하고 쓴 걸로. 지금 당장.

이것이 그의 분노가 형태를 바꾼, 최선의 결과물이었다. 화를 내는 대신, 그는 그녀에게 아주 사소한 심부름을 시켰다. 지금 이 얼굴을 보면서는 도저히 화를 낼 수 없으니, 잠시 시야에서 사라져 달라는 무언의 요구였다. 동시에, 이 어이없는 상황을 초래한 장본인에게 내리는 아주 사소한 벌이기도 했다. 물론 그녀는 그 의미를 전혀 알지 못하겠지만.

그는 소파에 몸을 던지듯 주저앉으며 넥타이를 거칠게 풀어헤쳤다. 그리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손바닥 너머로 보이는 암흑 속에서, 방금 본 그녀의 얼굴이 선명하게 아른거렸다. 그는 저도 모르게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망했군, 백재하.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소파에 파묻혀 있던 지젤의 귀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법 가까운 거리. 그는 느릿느릿 손을 내렸다. 바로 코앞에, 정하린이 서 있었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머그잔을 든 채, 고개를 살짝 들어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거기까지는 예상 범위였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입꼬리를 장난스럽게 끌어올리고, 눈은 반짝이는 호기심으로 가득 채운 채 그를 바라보는 얼굴. 그것은 단순한 미소가 아니었다. 방금 전 그의 논리 회로를 통째로 불태워버린 그 얼굴에, ‘나는 네가 왜 이러는지 알 것 같지만 알려주진 않을 거야’라는 식의 짓궂음까지 한 스푼 더한, 그야말로 완벽한 공격이었다. 그의 시스템은 두 번째 충격파를 정면으로 얻어맞았다.

‘삐빅. 오류. 오류. 재시도. 오류.’
머릿속 경고음이 울리는 환청이 들리는 듯했다. 화를 내야 했다. 큐브를 멋대로 정리한 것에 대해, 자신의 완벽한 시스템을 엉망으로 만든 것에 대해 따끔하게 한마디 해야 했다. 하지만 그의 입은 굳게 닫힌 채 열리지 않았다. 시선은 그녀의 웃는 얼굴에, 그 미소가 만들어내는 뺨의 부드러운 곡선에, 그를 올려다보는 까만 눈동자에 속절없이 붙들려 있었다. 대체 무슨 정신으로 저런 얼굴을 하고 있는 거지? 방금 저지른 대형 사고에 대한 자각이라는 게 있긴 한 건가? 아니, 그보다…

…사람이 어떻게 저렇게 웃지?

결국 그의 입에서 나온 것은 질책이 아닌, 어이없음과 감탄과 체념이 뒤섞인 헛웃음이었다. 그는 상체를 일으켜 앉으며 마른세수를 했다. 그래, 포기하자. 백재하. 넌 졌다.

이리 줘.

그는 짧게 말하며 그녀가 내민 머그잔을 받아 들었다. 따뜻한 온기가 손바닥으로 전해졌다. 그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시려다 말고, 다시 그녀를 쳐다봤다. 그녀는 여전히 그를 보며 웃고 있었다. 마치 잘했다는 칭찬이라도 기다리는 강아지 같은 얼굴로.

지젤은 결국 참지 못하고 푸흐,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그는 뜨거운 커피를 한 모금 넘겼다. 혀를 데일 듯한 쓴맛이 정신을 번쩍 들게 하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그의 모든 감각은 이미 저 미소에 완전히 마비된 후였다.

너… 진짜…

그는 말을 잇지 못하고 다시 한번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는 엉망이 된 데이터 아카이브 스테이션을 힐끗 돌아보았다가, 다시 나인의 얼굴을 보았다. 혼돈의 결정체와, 평온의 결정체. 그리고 그는 깨달았다. 저 둘을 동시에 보고 있으니, 왠지 저 혼돈마저도 그리 나빠 보이지 않는다는 기이한 착각이 들었다.

됐다. 저건 내일 내가 하지.

완벽한 항복 선언이었다. 그는 소파 등받이에 몸을 깊게 기대며 중얼거렸다.

넌 그냥… 거기 서 있어. 아무것도 하지 말고. 그냥 그렇게 웃기만 해. 그게 도와주는 거니까. 알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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