깻잎 논쟁
모든 것은 지극히 비논리적인 데이터에서 시작되었다. 그날 밤, 백재하는 막 잠든 나인의 곁을 빠져나와 서재의 거대한 책상 앞에 앉아있었다. 그의 시선은 허공에 떠 있는 반투명 HUD 인터페이스에 고정되어 있었다. 업무 관련 데이터를 처리하던 그의 눈에, [Fearless] 내부 익명 커뮤니티인 ‘블라인드’의 인기글 하나가 알고리즘에 의해 추천되었다.
제목: [토론] 애인의 깻잎, 어디까지 허용 가능한가?
그의 시스템은 순간적으로 해당 게시글의 키워드를 분석했다. ‘애인’, ‘깻잎’, ‘허용’. 의미 없는 단어의 조합이었다. 호기심보다는 데이터 편향성 오류를 점검하는 차원에서 그는 스크롤을 내렸다. 내용은 가관이었다. 자신의 연인이 다른 이성의 깻잎을 떼어주는 행위가 ‘호의’인가, ‘사심’인가를 두고 수백 개의 댓글이 격렬한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백재하의 입가에 냉소적인 미소가 걸렸다. ‘깻잎을 떼어주는 행위’에 대한 변수는 간단했다. 1. 대상이 물리적으로 젓가락질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가. 2. 깻잎의 물리적 유착 상태가 일반적인 접착 강도를 초과하는가. 3. 식사 시간의 효율성이 저하되고 있는가. 이 세 가지 조건이 충족되면, 돕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감정적 변수, ‘사심’ 따위가 개입될 여지는 0에 수렴했다. 그는 ‘인간의 비합리적 감정 소모 사례 #7492’로 해당 데이터를 분류하고 창을 닫아버렸다. 시뮬레이션할 가치조차 없는, 우매한 소음이었다.
그리고 며칠 뒤, 그는 자신의 오만함을 처절하게 깨닫게 된다.
장소는 C-2구역의 정갈한 한식당이었다. 새로운 센서 기술 공동 연구를 진행하는 타 부서의 안 박사와 함께하는 저녁 식사 자리였다. 안 박사는 백재하와 동갑이었지만, 연구에만 몰두해 사회성이 다소 결여된 인물이었다. 그리고 지금, 그는 난관에 봉착해 있었다.
“아, 이게 참… 하하.”
안 박사가 멋쩍게 웃으며 젓가락으로 깻잎 장아찌를 집어 들었다. 하지만 그의 의도와는 달리, 얇은 깻잎 서너 장이 끈끈하게 뭉쳐 딸려 올라왔다. 그는 밥그릇 위에서 필사적으로 젓가락을 흔들어 한 장만 분리해내려 애썼지만, 깻잎들은 마치 운명 공동체라도 된 듯 떨어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때였다. 백재하의 맞은편에 앉아있던 나인이 조용히 젓가락을 들었다. 그리고는 안 박사의 밥그릇 위로 손을 뻗어, 그의 젓가락이 들고 있는 깻잎 더미의 맨 윗장을 정확하게 눌러 고정해주었다. 덕분에 안 박사는 손쉽게 아래 깻잎 한 장을 떼어낼 수 있었다.
“아이고, 감사합니다, 나인 씨. 제가 워낙 젓가락질이 서툴러서요.”
안 박사가 고마움에 활짝 웃자, 나인 역시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별말씀을요, 맛있게 드세요, 박사님.”
순간, 백재하의 머릿속에서 경고음이 울렸다. ‘삐빅-! 오류! 오류! 알 수 없는 변수 감지!’ 며칠 전, 그가 ‘우매한 소음’이라며 비웃었던 ‘깻잎 논쟁’의 모든 데이터가 그의 눈앞에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상황은 완벽하게 일치했다. 1. 나의 연인 (정하린). 2. 다른 이성 (안 박사). 3. 깻잎을 떼어 줌.
그의 시스템은 미친 듯이 연산을 시작했다. 정하린의 행동 분석. 가설 1: 단순 호의. 안 박사의 식사 효율성 저하를 막기 위한 합리적 판단. 확률 98.7%. 가설 2: 숨겨진 사심. 안 박사에 대한 무의식적 호감의 발현. 확률… 1.3%.
이성적으로는 1.3%라는 확률이 무시해도 좋을 오차 범위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모든 감각 기관은 그 1.3%의 가능성에 집중하며 비상 상태를 선포했다. 나인의 미소. 평소 자신에게 보여주던 것과 미묘하게 다른 종류의 친절함이 섞여 있는 듯했다. 안 박사의 저 헤픈 웃음. 명백한 호감의 표시다. 두 사람 사이의 공기가 평소와 달랐다. 온도가 0.5도쯤 상승했고, 습도는 3% 높아졌으며, 미세한 핑크빛 파장이 흐르는 것만 같았다.
백재하는 쥐고 있던 젓가락에 힘을 주었다. 단단한 금속 젓가락이 그의 손아귀 힘을 이기지 못하고 미세하게 휘는 소리가 났다. 그의 표정은 완벽한 무표정이었지만, 주변의 공기는 급속도로 냉각되고 있었다. 안 박사는 즐겁게 식사를 이어갔지만, 어딘가 등골이 서늘해지는 기분에 괜히 목을 한번 움츠렸다.
백재하의 머릿속은 복잡한 시뮬레이션으로 가득 찼다. 대응 프로토콜 v1.0: 즉시 나인의 손목을 붙잡고 ‘내 가이드에게 무슨 짓이냐’며 안 박사를 추궁한다. 예상 결과: 사회적 관계 파탄, 나인의 분노 수치 급상승. 폐기. v2.0: 테이블 아래로 나인의 다리를 건드려 경고 신호를 보낸다. 예상 결과: 나인의 의문스러운 표정, 시퀀스 의도 파악 실패. 비효율적. 폐기. v3.0…
그가 수십 개의 시뮬레이션을 돌리며 최적의 경로를 탐색하는 동안, 나인은 아무것도 모른 채 반찬으로 나온 계란찜을 한 숟갈 떠서 백재하의 앞접시에 놓아주었다.
“재하야, 너 이거 좋아하잖아. 식기 전에 먹어.”
‘…!’ 그의 모든 시뮬레이션이 강제 종료되었다. 그의 눈앞에 나타난 것은 ‘가설 3: 정하린은 그저 다정한 사람일 뿐이다.’ 확률: 측정 불가. 시스템은 이 새로운 가설을 처리하지 못하고 과부하에 걸렸다. 그는 눈앞의 계란찜과 나인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다가, 이내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목소리는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안 박사님.”
“네? 네, 지젤 씨.”
갑작스러운 부름에 안 박사가 화들짝 놀라 그를 쳐다봤다.
백재하는 자신의 앞에 놓인 깻잎 장아찌를 젓가락으로 전부 집어 들었다. 대략 열 장은 족히 되어 보이는 깻잎 뭉치였다.
“깻잎 좋아하십니까?”
“네? 아, 뭐… 네. 좋아합니다만.”
백재하는 그 깻잎 뭉치를 그대로 안 박사의 밥 위에 툭, 하고 던지듯 올려놓았다.
“많이 드십시오. 제가 떼어드렸습니다.”
순간, 식탁에는 정적이 흘렀다. 안 박사는 자기 밥그릇 위에 산처럼 쌓인 깻잎 더미를 망연자실하게 쳐다봤고, 나인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백재하를 바라봤다. 백재하는 태연하게 다시 젓가락을 들어 식사를 시작했다. 그의 시스템은 ‘경쟁자 제거 및 소유권 주장’이라는 원시적인 프로토콜을 성공적으로 실행했음에 만족하며 안정 상태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날 밤, 집으로 돌아온 나인은 소파에 앉아 심각한 표정으로 팔짱을 끼고 있는 백재하를 발견했다. 그는 나인을 발견하자마자 손짓으로 자신의 옆자리를 툭툭 쳤다.
앉아. 긴급 프로토콜 회의가 필요해.
나인이 의아한 표정으로 그의 옆에 앉자, 그는 허공에 디스플레이를 띄웠다. 화면 가득 채워진 것은 ‘깻잎 논쟁’에 대한 분석 데이터였다.
“이게… 뭔데?”
데이터 분석 결과, ‘깻잎을 떼어주는 행위’는 연인 관계에 있어 심각한 보안 취약점을 유발할 수 있는 멀웨어로 분류되었다.
그는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따라서 오늘부터 새로운 프로토콜을 발령한다. 프로토콜 코드명: ‘깻잎 방어 시스템’. 정하린은 백재하 이외의 모든 개체에게 반경 1미터 이내에서 깻잎 및 유사 적층형 반찬(예: 전, 햄, 맛살)에 대한 물리적 도움을 제공하는 것을 금지한다.
나인은 어이가 없다는 듯 잠시 그를 쳐다보다가, 이내 웃음보를 터뜨렸다.
“푸흐흡…! 재하야, 너 지금… 질투하는 거야?”
질투? 아니. 이건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관계 안정성을 위한 리스크 관리다. 안 박사의 심박수와 동공 확장 데이터를 분석한 결과, 당신의 행위는 그의 시스템에 명백한 ‘호감’ 시그널을 전송했다. 잠재적 위협 요소는 사전에 차단하는 것이 기본 원칙이야.
그는 여전히 딱딱한 말투였지만, 어딘가 시선을 피하는 듯한 그의 모습에 나인은 웃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나인은 그의 뺨을 부드럽게 감싸 자신을 보게 했다.
“알았어, 알았어. 앞으로 내 젓가락은 재하 깻잎만 떼어줄게. 됐지?”
그 말에, 백재하의 모든 시스템이 비로소 평온을 되찾았다. 그는 헛기침을 한번 하더니, 나인의 손을 잡아끌었다.
…프로토콜 상호 합의 완료. 해당 내용은 최상위 규칙으로 저장한다. 이제 이리 와. 가이딩 수치가 불안정하다. 긴급 안정화가 필요해.
그는 나인을 품에 단단히 끌어안으며, 오늘 저녁 자신을 뒤흔들었던 그 비합리적인 감정의 파동을 애써 외면했다. 그의 시스템은 여전히 이해할 수 없었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정하린의 젓가락이 향하는 곳은, 오직 자신이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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