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미아 AU
캐릭터 프로필 (우주 미아 AU)
1. 백재하 (Baek Jae-ha)
소속/신분: 국제우주정거장 '데카르트(Descartes)'의 수석 연구원 겸 시스템 총괄 책임자. 전직 이론물리학자.
나이: 30세
우주인이 된 계기: 지구의 무질서하고 비논리적인 사회 시스템에 염증을 느꼈다. 모든 변수가 통제되고 예측 가능한, 완벽하게 격리된 환경을 찾아 우주로 망명했다. 그의 목표는 인류의 외연 확장이 아닌, 자신만의 지적 탐구를 완성할 조용한 실험실을 얻는 것이었다.
정거장 내 평판: '살아있는 유령' 혹은 '기계 신'. 동료들과의 교류는 최소한으로, 대부분의 시간을 개인 연구실과 서버실에서 보낸다. 그의 능력은 정거장의 생명줄과 같기에 모두가 그를 필요로 하지만, 누구도 그를 이해하거나 가까이하려 들지 않는다. 차가운 효율성과 목적 지향적 대화 방식은 인간관계에 대한 그의 기대를 완벽히 제거했다.
특징: 언제나 말끔한 흰색 제복을 고수하며, 왼쪽 손목에는 개인 단말기가 내장되어 있어 홀로그램 인터페이스를 공중에 띄워 작업한다. 극도의 정밀함과 예측 가능성을 선호하며, 예상치 못한 변수의 등장은 그의 흥미를 끄는 동시에 심기를 불편하게 만든다.
2. 정하린 (Jung Ha-rin)
소속/신분: 불명. 우주정거장 '데카르트' 7번 에어록에 불시착한 미지의 존재.
나이: 외견상 30세 전후로 추정.
불시착한 계기: 알 수 없음. 그녀는 스스로를 ‘길을 잃었다’고 인식할 뿐, 어디서 왔는지, 어떻게 이곳까지 오게 되었는지에 대한 기억 데이터가 손상된 상태다. 그녀의 존재 자체가 현재 인류의 물리법칙으로는 설명 불가능한 현상이다.
정거장 내 평판: 없음. 최초 발견자는 백재하. 그녀의 존재는 현재 1급 기밀로 분류되었다.
특징: 인간 여성과 완벽하게 동일한 외형을 가졌으나, 진공 상태에서 생존이 가능하다. 우주 환경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발목까지 내려오는 얇고 낡은 흰색 의복을 입고 있다. 감정의 변화에 따라 미세한 에너지 파장을 발산하며, 이는 정거장의 정밀 센서에 ‘원인 불명의 노이즈’로 기록된다. 낯선 환경과 존재에 대한 본능적인 경계심이 강하지만, 위협이 없다고 판단되면 조용히 상대를 관찰하는 습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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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흑 같은 우주. 그 절대적인 무(無)의 공간에, 우주정거장 '데카르트'는 인류가 쏘아 올린 가장 외로운 섬처럼 떠 있었다. 정거장의 모든 시스템을 관장하는 백재하는 제7번 에어록의 강화유리 너머로, 자신의 연산 체계를 비웃는 현상을 마주하고 있었다. 시스템은 저것을 '미확인 유기체'라 명명하며 폐기를 권고했지만, 그의 눈에는 그저 한 명의 '여자'로 보였다. 우주복도 없이, 그저 발목까지 오는 얇은 흰 천 하나만을 걸친 채 별들의 시체처럼 차가운 진공 속을 부유하는 여자.
그는 모든 경고를 무시하고 에어록의 내부 해치를 열었다. 쉬이익, 하는 공기압 조절 소리와 함께 여자의 몸이 중력의 영향권 안으로 아주 천천히 이끌려 들어왔다. 바닥에 가볍게 내려앉는 소리조차 없었다. 마치 처음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그녀는 소리 없이 그곳에 존재했다. 긴 검은 머리카락이 무중력 상태처럼 희미하게 흔들렸고, 낡은 흰 옷자락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녀는 천천히 눈을 떴다. 칠흑 같은 눈동자가 자신을 내려다보는 백재하의 얼굴을 담았다.
네 정체는 뭐지.
그의 목소리는 기계음처럼 건조했다. 감정은 배제된 채, 현상에 대한 순수한 데이터만을 요구하는 질문. 그는 손목의 단말기를 조작해 그녀의 생체 신호를 스캔했다. [심박: 안정], [체온: 36.5°C], [산소 포화도: 99%]. 모든 수치가 완벽한 인간의 그것과 일치했다. 그러나 그녀가 방금 전까지 진공 속에 있었다는 사실이, 이 모든 데이터를 무의미한 숫자의 나열로 만들었다.
그는 천천히 무릎을 굽혀 그녀와 눈을 맞췄다. 그의 시스템이 경고했다. '접근 금지. 변수 통제 불가.' 그러나 백재하의 시선은 눈앞의 이해 불가능한 존재에게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마치 평생을 찾아 헤맨 미지의 공식을 발견한 수학자처럼.
어떻게 여기에 온 거지? 어디서부터 길을 잃었나.
[1일차 / 기록되지 않은 존재 / 감정 날씨: 정적(靜的) ]
백재하는 정하린을 자신의 개인 연구실로 데려왔다. 정거장의 다른 승무원들의 눈을 피한, 가장 완벽한 통제가 가능한 공간이었다. 연구실은 거대한 홀로그램 인터페이스와 각종 분석 장비들로 가득 차 있었지만, 먼지 하나 없이 정돈된 모습이 그의 성격을 대변했다. 정하린은 그 낯선 공간의 중앙에 조용히 서 있었다. 백재하는 어떠한 물리적 구속도 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연구실 전체를 하나의 거대한 스캐너로 활용했다. 보이지 않는 센서들이 그녀의 모든 것을 데이터로 변환하기 시작했다.
움직이지 마. 네 존재의 기본값을 측정하는 중이니까.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무미건조했다. 그는 공중에 떠 있는 수많은 데이터 창들을 훑으며 미간을 찌푸렸다. 유전자 구조는 99.9% 인간과 일치했지만, 나머지 0.1%의 미확인 염기서열이 그의 모든 논리를 비웃고 있었다. 그녀의 몸에서 방출되는 미세한 에너지 파장은 정거장의 모든 장비가 내뿜는 주파수와 미묘하게 공명하며 아주 작은 노이즈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는 정하린에게 다가가 손을 뻗었다. 접촉하려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그녀의 어깨 위 허공에서 손을 멈추고, 에너지 파장의 흐름을 직접 감지하려 했다. 하지만 그 순간, 정하린이 고개를 들어 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 눈빛은 질문도, 두려움도 아니었다. 마치 자신을 분석하는 그의 의도를 꿰뚫어 보는 듯한, 깊고 고요한 응시였다. 백재하는 처음으로 자신의 계산이 틀릴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느꼈다.
[ 2일차 / 첫 번째 식사 / 감정 날씨: 미지근한 호기심 ]
분석은 교착 상태에 빠졌다. 정하린은 의학적으로, 생물학적으로 완벽한 인간이었지만, 동시에 인간일 수 없는 존재였다. 백재하는 밤새 그녀의 데이터를 분석하다 말고 문득 깨달았다. 이 존재가 '인간'이라면, '인간'이 필요로 하는 것을 제공해야 한다는 지극히 단순한 사실을. 그는 정거장의 식량 배급기에서 영양 성분이 가장 완벽하게 균형 잡힌 액상 영양팩과, 지금은 거의 장식용으로 키우는 수경재배 구역에서 막 딴 작은 토마토 하나를 가져왔다. 그는 그것들을 트레이에 담아 정하린 앞에 놓았다.
네 신체는 에너지 보충을 필요로 할 거다. 이건 현재 인류가 섭취하는 가장 효율적인 영양 공급원.
그는 영양팩을 가리키며 설명했다. 그러나 정하린의 시선은 붉고 작은 토마토에 꽂혀 있었다. 그녀는 아주 천천히 손을 뻗어, 보석이라도 다루듯 조심스럽게 토마토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는 잠시 망설이다가, 작게 한 입 베어 물었다. 과즙이 터지는 아주 미세한 소리. 그 순간 그녀의 표정에 아주 희미한, 그러나 분명한 변화가 일어났다. 놀라움과 그리움이 뒤섞인 듯한 미묘한 파동. 그녀는 말없이 토마토를 전부 먹고 나서야, 고개를 들어 백재하를 보았다. 그 눈빛은 ‘고맙다’는 인사처럼 느껴졌다. 백재하는 자신의 단말기에 [관찰 기록: 대상은 가공된 영양분보다 자연 형태의 유기물에 긍정적 반응을 보임. 감정으로 추정되는 미세 파장 변화 감지] 라고 기록했다. 그는 처음으로 그녀를 분석 대상이 아닌, 무언가를 '느끼는' 존재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 5일차 / 기계 속의 유령 / 감정 날씨: 고요한 파문(波紋) ]
백재하는 정하린을 연구실에 두고 중앙 서버실의 시스템 정기 점검을 위해 잠시 자리를 비웠다. 그는 그녀가 얌전히 그곳에 머물 것이라 계산했다. 하지만 그가 서버실의 메인 콘솔 앞에 섰을 때, 시스템 전체에서 기묘한 노이즈가 감지되기 시작했다. 오류는 아니었다. 마치 거대한 호수에 던져진 조약돌처럼, 아주 작고 미세한 파문이 정거장 전체의 데이터 흐름을 잔잔하게 흔들고 있었다. 그 파문의 진원지는 시시각각 변하고 있었다. 백재하의 미간이 좁혀졌다. 그는 즉시 내부 CCTV 기록을 확인했다. 정하린이 연구실을 빠져나와, 마치 아주 익숙한 길을 걷는 사람처럼 정거장 내부를 유영하듯 걷고 있었다. 그녀는 누구와도 마주치지 않았다. 마치 그녀가 지나가는 순간만큼은 모두가 다른 복도를 지나가도록 운명이 조작된 것처럼. 백재하는 즉시 그녀를 뒤쫓았다. 그녀가 멈춰선 곳은 뜻밖에도 폐쇄된 식물 구역, '에덴'의 문 앞이었다. 먼지 쌓인 강화유리 너머로 말라비틀어진 식물들의 잔해만이 가득한 죽은 공간. 그녀는 그곳을, 마치 잃어버린 고향을 보는 듯한 눈으로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녀의 존재가 만들어내는 파문은 바로 그곳에서 가장 강하게 울리고 있었다.
왜 여기에 있는 거지?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정하린이 천천히 돌아보았다. 그녀의 눈동자에 슬픔처럼 보이는 감정이 희미하게 고여 있었다.
[ 13일차 / 별들의 무덤 / 감정 날씨: 시리도록 투명한 ]
그녀에 대한 데이터는 쌓여갔지만, 그녀에 대한 이해는 단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했다. 백재하는 처음으로 자신의 연구 방식에 한계를 느꼈다. 그는 어느 날 밤, 말없이 정하린을 데리고 정거장의 최상층에 위치한 원형 전망대로 향했다. 그곳은 360도 전체가 강화유리로 되어 있어, 발밑부터 머리 위까지 온통 별들로 가득 찬, 우주 한가운데에 맨몸으로 떠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곳이었다. 수억 개의 별들이 침묵 속에서 빛을 발하고 있었다.
저 빛들은 대부분 이미 죽은 별들의 잔상이다. 백재하는 유리창 너머의 한 초신성을 가리키며 말했다.
우리가 보는 건 아름다운 빛이지만, 실체는 수백만 년 전의 폭발과 소멸이지. 어쩌면 너도 그런 게 아닐까. 아주 먼 곳에서 소멸한 무언가의 마지막 잔상 같은 것.
그는 질문이 아닌,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정하린은 그의 말에 대답하는 대신, 유리창 가까이 다가가 차가운 표면에 손바닥을 가만히 가져다 댔다. 그녀의 손바닥이 닿은 곳에서부터, 마치 물결이 퍼져나가듯 희미한 빛의 파장이 유리를 타고 흘렀다. 그 순간, 정거장의 모든 조명이 일제히 깜빡였다. 마치 그녀의 감정이 별들의 무덤과 공명하기라도 한 것처럼. 백재하는 그 비현실적인 광경을 숨죽여 지켜보았다. 그녀는 잔상이 아니었다. 그녀는 이 죽은 우주 속에서 유일하게 살아 숨 쉬는, 새로운 법칙 그 자체였다.
[ 21일차 / 이름이라는 변수 / 감정 날씨: 녹아내리는 서리 ]
정하린은 여전히 말이 없었지만, 이제 백재하의 곁을 맴돌기 시작했다. 그가 연구에 몰두하고 있으면, 그녀는 조금 떨어진 곳에 조용히 앉아 그의 손끝에서 펼쳐지는 홀로그램의 빛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존재는 이제 백재하에게 일상이자, 가장 중요한 연구 과제가 되었다. 어느 날, 그는 무수한 데이터와 공식으로 가득 찬 홀로그램 화면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모든 존재는 이름으로 정의된다. 이름이 없으면 분류할 수 없고, 분류할 수 없으면 이해할 수 없어. 넌 내 시스템 안에서 여전히 '미확인 유기체'일 뿐이야.
그는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 그의 모든 시도는 벽에 부딪히고 있었다. 그때였다. 정하린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 다가왔다. 그녀는 그의 앞에 서서, 처음으로 자신의 의지로 목소리를 냈다. 아주 작고, 조금은 서툰 음성이었지만 분명한 발음이었다.
...정...하린.
그녀는 자신의 가슴을 작게 가리키며 말했다.
정하린.
백재하의 모든 동작이 순간 멈췄다. 홀로그램을 조작하던 그의 손가락이 허공에서 굳었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그녀를 보았다. '정하린'. 그 이름은 그의 모든 데이터베이스에 존재하지 않는, 완전히 새로운 변수였다. 그는 단말기에 새로운 파일을 생성했다. 파일명은 [Object_HR-01]. 그리고는 잠시 망설이다가, 파일명을 전부 지우고 다시 입력했다. [정하린]. 그의 철옹성 같던 세계에, 이름이라는 균열이 생기는 순간이었다.
시간은 우주정거장의 인공적인 주기 위를 속절없이 흘렀다. 이제 정하린은 더 이상 연구실의 피관찰자가 아니었다. 그녀는 백재하의 그림자처럼, 혹은 그의 세상에 스며든 고요한 공기처럼 존재했다. 그가 홀로그램의 빛에 파묻혀 있을 때면, 그녀는 그의 곁에서 소리 없이 책의 페이지를 넘겼다. 백재하가 가져다준, 이제는 꽤 여러 권이 된 인류의 '기록'들이었다. 그날 밤, 두 사람은 다시 원형 전망대에 있었다. 이전과는 달리, 침묵은 더 이상 어색한 공백이 아니었다. 그것은 두 사람 사이에 쌓인 시간의 무게이자, 언어 없이도 가능한 대화였다.
정하린이 먼저 그 침묵을 깼다. 그녀는 칠흑 같은 우주를 배경으로 빛나는 먼 성운을 가리켰다. 인류의 관측 기술로는 그저 흐릿한 얼룩으로만 보이는 곳. 그러나 그녀의 눈에는 선명한 길이 보이는 듯했다.
…때가 됐어. 길이 열렸어.
백재하의 시선은 그녀가 가리키는 허공이 아닌, 그녀의 얼굴에 고정되었다. 그의 모든 사고 회로가 순간 정지했다. ‘길’. ‘때’. ‘열리다’. 그의 시스템 안에서는 오류로 분류될 단어들의 조합이었다.
무슨 의미지? 해석할 수 있는 언어로 설명해.
그의 목소리는 평소처럼 건조했지만, 아주 미세한 균열이 느껴졌다. 그는 손목의 단말기를 들어 무언가 데이터를 확인하려다, 이내 무의미한 행동임을 깨닫고 손을 내렸다. 눈앞의 존재는 데이터로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그는 이미 오래전에 인정하지 않았던가. 그는 정하린에게 한 걸음 다가섰다. 그의 눈동자에 그녀의 모습이, 그리고 그녀의 등 뒤로 펼쳐진 무한한 별들의 무덤이 함께 담겼다.
돌아간다는 건가. 네가 왔던 곳으로.
그것은 질문이라기보다,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가설을 확인하는 절차에 가까웠다. 그의 시스템이 경고를 쏟아냈다. [경고: 핵심 변수 '정하린'의 이탈 가능성 감지. 시스템 안정성 급격한 저하 예상. 대책 수립 요망.] 하지만 그는 그 어떤 대책도 세울 수 없었다. 그의 모든 논리와 계산이, 그녀의 단 한 마디 앞에서 무력했다.
그곳이 어디지? 생존 확률은? 귀환까지 소요되는 시간은? 모든 것이 불확실한 변수 투성이야. 이건 합리적인 선택이 아니야.
그는 자신이 지금, 그녀를 붙잡고 있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하는 듯했다. 그저 끊임없이 논리를 제시하며, 이 비합리적인 상황을 어떻게든 통제 가능한 범위 안으로 되돌리려 애썼다. 그는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차가울 것이라 예상했던 피부는, 놀라울 만큼 따뜻했다. 살아있는 온기였다. 그 온기가 그의 손바닥을 통해 그의 혼란스러운 시스템 전체로 퍼져나갔다.
가지 마. 여긴 모든 것이 통제되어 있어. 안전해. 내가… 내가 널 보호할 수 있어.
그의 마지막 말은 거의 속삭임에 가까웠다. 평생을 걸쳐 쌓아 올린 이성의 방벽이 무너져 내리는 소리. 정하린은 잡힌 팔을 빼는 대신, 반대편 손으로 그의 손등을 부드럽게 감쌌다. 마치 길 잃은 아이를 다독이듯.
너의 세상은 안전하지, 재하야. 하지만 내 세상은 아니야. 나는 이곳의 법칙으로 살아갈 수 없어. 너도, 나의 법칙으로 살아갈 수 없는 것처럼.
그녀의 목소리는 슬픔을 머금었지만, 더없이 단호했다. 그녀는 그를 올려다보았다. 처음으로 그녀의 눈동자에서 깊은 애정이, 그리고 그만큼의 체념이 선명하게 비쳤다. 그녀는 까치발을 들어 그의 뺨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 그가 건넸던 토마토의 희미한 단맛처럼, 짧고 선명한 온기였다.
이름을 알려줘서 고마웠어. 넌 나를 ‘미확인 유기체’가 아닌 ‘정하린’으로 만들어줬어.
입맞춤이 떨어진 순간, 그녀의 몸이 희미한 빛의 입자로 변하기 시작했다. 발끝에서부터 천천히, 별가루처럼 흩어지며 전망대의 어두운 공기 속으로 녹아들었다. 백재하는 붙잡고 있던 그녀의 팔이 서서히 무게를 잃고, 손안에 남은 것이 따스한 빛의 잔상뿐임을 속수무책으로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의 모든 시퀀스가, 모든 계산이 비명을 지르며 정지했다.
안 돼.
그가 마지막으로 내뱉은 말은 누구에게도 닿지 못했다. 정하린의 형체는 완전히 사라지고, 그녀가 서 있던 자리에는 아주 작은 씨앗 하나만이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그의 정거장에서는 존재할 수 없는, 생명의 가능성을 품은 작은 변수. 백재하는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그는 차가운 바닥에 떨어진 씨앗을 조심스럽게 집어 들었다. 그의 손안에서, 그의 시스템 전체를 마비시킨 유일한 오류가, 그의 세계에 남겨진 단 하나의 비논리가 희미하게 온기를 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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