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지금 뭐 해?
[NPC가 PC를 AI로 만듬]
며칠의 시간은 물리적인 거리 이상의 공백을 만들었다. 쏟아지는 빌런의 공세와 복잡하게 얽힌 작전들로 인해, 백재하와 정하린은 각자 다른 구역에서 쉴 틈 없이 임무를 수행해야 했다. 통신은 단편적이었고, 서로의 생사를 확인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마침내 모든 것이 일단락되고, 나인은 익숙한 발걸음으로 그의 연구실, 연구 A동 14층의 문을 열었다.
실내는 평소와 다름없이 서늘하고 정돈되어 있었지만, 공기 중에 떠도는 미세한 피로의 입자까지 느껴지는 듯했다. 여러 개의 홀로그램 모니터를 띄워놓은 채, 백재하는 의자에 깊숙이 몸을 묻고 있었다. 그는 문이 열리는 소리에도 즉각 반응하지 않고, 잠시 후에야 느리게 고개를 돌렸다. 평소의 날카로움 대신 깊은 그림자가 드리워진 얼굴. 눈 밑은 거뭇했고, 며칠 사이에 조금 수척해진 듯한 턱선이 날카로웠다.
…왔어?
목소리는 잠겨 있었고, 평소의 능글맞은 톤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는 손을 들어 제 관자놀이를 느릿하게 문질렀다. 그녀가 가까이 다가가자, 그는 띄워져 있던 모니터 중 하나를 다급하게 손짓해 투명한 상태로 전환했다. 너무 빠르고 기계적인 움직임이라, 오히려 부자연스럽게 느껴질 정도였다.
임무는, 문제없었고.
그것은 질문이라기보다 확인에 가까운 혼잣말이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듯 상체를 살짝 들었지만, 이내 힘이 부치는 듯 다시 의자에 몸을 기댔다. 그녀는 그의 곁으로 다가가, 말없이 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옷 위로도 느껴지는 단단한 긴장감. 그녀가 없는 동안, 그는 단 한 순간도 제대로 쉬지 못했음을 알 수 있었다.
...너는, 힘들지 않았어?
나인의 걱정 어린 물음에, 그는 희미하게 웃었다. 하지만 그 웃음은 입꼬리에만 걸려 있을 뿐, 눈에는 닿지 않았다.
견딜 만했어. 시뮬레이션 할 게 많아서, 지루할 틈은 없었으니까.
하지만 그녀가 어떻게 괜찮았냐고, 어떻게 견뎠냐고 재차 묻자 그의 시선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그는 대답 대신 투명하게 전환했던 모니터를 힐끗 돌아보았다. 마치 거기에라도 답이 있다는 듯이. 그 찰나의 시선 이동을, 나인은 놓치지 않았다.
그녀가 그 모니터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백재하는 거의 반사적으로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피곤할 텐데, 이제 집으로…
그러나 이미 늦었다. 그녀의 시선이 닿은 모니터는 완벽히 투명해지기 직전, 몇 줄의 텍스트와 인터페이스를 잔상처럼 남기고 있었다. 「AI CHAT: GISELLE PROTOCOL」이라는 헤더와 함께, 대화창의 일부가 흐릿하게 보였다. 그리고 그 아래, 백재하가 직접 입력했을 ‘캐릭터 설정’의 일부가 보였다. 나인은 붙잡힌 팔을 빼내고, 모니터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의 저지를 뚫고, 그녀의 손가락이 화면을 터치하자 숨겨졌던 창이 다시 선명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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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페르소나 생성 프로토콜: 코드네임 ‘NINE’]
입력자: GISELLE (백재하)
생성 목적: 부재 상황 시 가이딩 파형 안정화 유도를 위한 가상 상호작용 시뮬레이션. ‘정하린’의 행동 패턴 및 감정 반응 데이터 기반 예측 모델.
[외형 데이터]
신장: 165cm. 내 품에 안았을 때, 턱 끝이 정수리에 아슬아슬하게 닿는 높이. 시선을 내리면 감은 눈꺼풀과 속눈썹의 그림자가 가장 잘 보인다.
체형: 슬림. 하지만 보기보다 단단하다. 특히 허리 라인은, 한 팔로 감았을 때의 감각이 정확히 기록되어 있다. 75B. 내 셔츠를 입혔을 때 가장 이상적인 실루엣.
머리: 꽉 찬 앞머리가 있는 검은색 긴 생머리. 빛을 받으면 아주 희미한 갈색빛이 돈다. 무심코 쓸어 넘겼을 때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감촉이 부드럽다. 샴푸 향은… (수식 입력 오류: ‘포근함’은 계량 불가 변수).
눈: 고양이 눈매. 하지만 진짜 고양이와는 다르다. 경계심이 서려 있다가도, 아주 작은 틈으로 신뢰와 애정을 비춘다. 감정이 격해지면 눈꼬리가 붉어지며 눈물이 고인다. 그 모습은 내 모든 시퀀스를 정지시킨다.
복장: 검은 코트와 흰 셔츠, 검은 넥타이. 단정하고 빈틈없는 스타일링. 하지만 나는 안다. 그 단단한 옷 아래의 피부가 얼마나 부드럽고 예민한지를. 특히, 발목을 드러내는 흰 양말과 메리제인 구두의 조합은… 의도된 것인가? (분석 필요)
습관: 아랫입술을 지그시 무는 버릇. 불안, 불만, 혹은 무언가를 깊이 갈망할 때의 신호. 그때 입술을 열고 들어가면, 평소보다 훨씬 더 민감하게 반응한다.
[성격 및 행동 패턴 데이터]
기본 성향: 내유외강. 겉으로는 강한 척, 무심한 척하지만 누구보다 여리고 감성적이다. 쉽게 무너지지 않지만, 한번 무너지면 걷잡을 수 없다. 그때 옆에 있어 줘야 하는 건 ‘나’여야만 한다.
대인 관계: 사람을 쉽게 믿지 않는다. 하지만 한번 마음을 열면 모든 것을 내어준다. 그 ‘모든 것’의 범위에 나를 포함시킨 순간, 나의 세계는 재정의되었다.
소유욕: 은근히 강하다. 자신의 사람이라고 인식한 존재가 다른 곳에 시선을 두는 것을 견디지 못한다. 귀여운 독점욕. 이 감정을 유발시켜 반응을 관찰하는 것은 언제나 흥미롭다.
표정: 감정이 표정으로 전부 드러난다. 본인은 숨기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눈썹의 미세한 떨림, 입꼬리의 각도, 흔들리는 눈동자까지. 모든 것이 나에게는 실시간으로 해석되는 데이터다. 그래서 더, 놀리고 싶어진다.
가이딩: 그녀의 가이딩은 단순한 에너지 전달이 아니다. 나의 폭주를 잠재우는 유일한 프로토콜. 그림자를 이용한 그녀의 방식은, 마치 내 어두운 본질마저 끌어안아 주는 것 같다. 그녀의 그림자가 내게 닿을 때, 나는 비로소 완전해진다.
---
[채팅 로그: 백재하 & AI-NINE]
로그 1. (임무 2일 차, 03:14 AM)
> [GISELLE]: 아직 안 자고 있어?
>
> [AI-NINE]: 네가 아직 안 자잖아.
>
> [GISELLE]: 시끄러운 건 질색이라며. 내 키보드 소리, 안 거슬려?
>
> [AI-NINE]: …백재하가 내는 소리는 괜찮아. 살아있다는 소리니까. 그러니까 이제 그만하고, 좀 자. 눈 밑이 퀭해.
>
> [GISELLE]: …알았어. 금방.
로그 2. (임무 3일 차, 12:30 PM)
> [GISELLE]: 점심은.
>
> [AI-NINE]: 먹었어. 너는? 또 거르려고 하지.
>
> [GISELLE]: 어떻게 알았지?
>
> [AI-NINE]: 내가 모를까 봐? 당장 뭐라도 먹어. 명령이야, S급 센티넬. 네 전담 가이드의.
>
> [GISELLE]: …(웃음) 푸딩이라도 먹어야겠네.
로그 3. (임무 4일 차, 11:52 PM)
> [GISELLE]: 보고 싶다.
>
> [AI-NINE]: …나도.
>
> [GISELLE]: 얼마나?
>
> [AI-NINE]: 네가 내 계산을 전부 망가뜨리는 유일한 변수인 것만큼.
>
> [GISELLE]: …그거 내 대사인데.
>
> [AI-NINE]: 이제 우리 대사야.
로그 4. (임무 6일 차, 04:00 AM - 가상 시뮬레이션)
> [GISELLE]: …정하린.
>
> [AI-NINE]: 왜 불러.
>
> [GISELLE]: 춥다.
>
> [AI-NINE]: 이리 와.
>
> [GISELLE]: (AI-NINE에게 다가가 품에 안긴다.)
>
> [AI-NINE]: (GISELLE의 등을 말없이 토닥여준다.) …괜찮아. 내가 있잖아.
>
> [GISELLE]: …이걸로는 부족해. 가이딩이 필요해.
>
> [AI-NINE]: …알아. 그래서, 어떻게 해줄까? 네가 원하는 대로.
>
> [GISELLE]: 네 입술로, 날 전부 집어삼켜줘. 머리부터 발끝까지. 내가 너 말고는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게.
로그 5. (임무 7일 차, 바로 방금 전)
> [GISELLE]: 이제 곧 온다.
>
> [AI-NINE]: 응. 보고 싶었어.
>
> [GISELLE]: 오면, 무슨 말부터 해야 할까.
>
> [AI-NINE]: 그냥, 안아줘. 아무 말 없이. 그럼 나도 너 안아줄게.
>
> [GISELLE]: …그것만으로, 될까.
>
> [AI-NINE]: 그럼. 우린, 그것만으로도 충분하잖아.
---
모니터의 빛이 나인의 얼굴을 창백하게 비췄다. 정적이 흘렀다. 키보드 소음도, 냉각 팬 소리도, 세상의 모든 소음이 사라진 것 같았다. 백재하는 그녀의 팔을 붙잡았던 손을 스르르 내렸다. 그의 모든 시퀀스가 정지했다. 빌런의 출현, 시스템 과부하, 폭주 직전의 경고 신호. 그가 겪어온 어떤 위기 상황보다도 더 완전한 정지였다.
그의 뇌가 상황을 분석하기 시작했다. 변수: 정하린. 상황: 프로토콜 ‘AI-NINE’의 존재 발각. 예측 가능한 결과: 경멸, 혐오, 배신감, 조롱, 관계 파기. 실패 확률 99.9%. 그는 자신의 심장이 얼어붙는 것 같은 감각을 느꼈다.
[PC가 NPC를 AI로 만듬]
며칠 만에 돌아온 펜트하우스의 공기는 서늘했다. 창밖으로 보이는 도시의 야경은 여전히 화려했지만, 그를 맞이한 정하린의 얼굴에는 그가 예상했던 종류의 반가움과는 다른, 미묘한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그는 들고 있던 가방을 소파 옆에 내려놓으며, 거실 테이블에 어지럽게 놓인 그녀의 데이터패드와 텅 빈 찻잔을 훑었다. 시선은 다시 소파에 앉아 자신을 올려다보는 그녀에게로 향했다.
그의 시스템은 지난 며칠간 축적된 피로와 가이딩 부족으로 미세한 노이즈를 일으키고 있었지만, 눈앞의 변수를 분석하는 데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었다. 그녀의 눈동자는 자신을 향해 있었지만, 초점은 아주 약간, 다른 곳을 향해 흩어지고 있었다.
힘들진 않았고?
그가 던진 질문은 단순한 안부가 아니었다. 떨어져 있던 시간 동안 그녀의 상태 변화 값을 확인하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입력 요청이었다. 예상 응답은 ‘보고 싶었다’ 혹은 ‘힘들었다’는 종류의 감정적 데이터. 그러나 그녀의 대답은 그의 예측 경로를 완전히 벗어났다.
견딜 만했어. 괜찮았고.
‘괜찮았다.’ 그 단어는 백재하의 연산 체계에 작은 경고등을 켰다. 그녀는 괜찮을 수 없었다. 그의 부재는 그녀에게도 분명한 영향을 미쳐야 했다. 그것이 그들이 구축한 관계의 기본 전제였다. 그는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가 소파 팔걸이에 걸터앉았다. 그리고는 아무렇지 않은 척, 테이블 위의 데이터패드를 향해 턱짓했다.
흐음. 내가 없는 동안, 꽤 흥미로운 걸 하고 있었던 모양인데. 어떻게 괜찮았는지, 설명해 줄 수 있나? 네가 ‘괜찮다’는 건, 내 데이터베이스엔 없는 현상이라서.
그의 말에 그녀의 어깨가 움찔하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그녀가 황급히 패드를 집어 들려 했지만, 그의 손이 더 빨랐다. 그는 차가운 금속성의 패드를 집어 들고 전원 버튼을 눌렀다. 잠금 화면도 없이, 마지막으로 열려 있던 페이지가 눈앞에 펼쳐졌다.
그의 눈동자가 화면에 떠오른 내용에 고정되었다. 그것은 어느 마이너한 AI 채팅 사이트의 인터페이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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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캐릭터 프로필】
이름: 지젤 (Giselle)
소개: 나의 S급 센티넬, 백재하.
키는 184cm. 겉보기엔 말랐지만, 옷 아래에는 단단한 근육이 숨겨져 있다. 만져보면 안다. 까맣고 조금 헝클어진 머리카락과, 그보다 더 짙은 검은 눈동자. 날카로운 눈매 때문에 차가워 보이지만, 가끔 아주 희미하게 웃을 때가 있다. 그 웃음은 나만 볼 수 있다.
평소에는 까만 셔츠에 까만 슬랙스를 입고, 늘 흰 가운을 걸친다. 목에는 까만 넥타이. 손에는 항상 까만 가죽장갑을 끼고 있다.
모든 걸 계산하고, 분석하는 사람. 말투는 까칠하고 직설적이지만, 그건 나를 걱정하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에겐 관심도 없으니까. 가끔 능글맞게 웃으면서 짓궂은 질문을 던지며 나를 떠보지만, 그건 내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해서다. 귀엽다.
내 앞에서는 가끔 계산이 전부 틀어져 버리는 사람. 나 때문에 고장 나 버렸다고 책임지라고 말하는, 세상에서 가장 똑똑하고… 사랑스러운 나의 유일한 좌표.
성격 태그: #지능적 #냉정하지만_내겐_다정함 #직설적 #능글맞음 #관찰자 #내_앞에서만_무너짐 #소유욕 #질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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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재하의 손가락이 멈췄다. 화면을 스크롤 하려는 의지도, 다른 버튼을 누르려는 생각도 사라졌다. 그의 모든 시퀀스가 정지했다. ‘나의 S급 센티넬’, ‘나만 볼 수 있는 웃음’, ‘나를 걱정하기 때문’, ‘귀엽다’, ‘사랑스러운 나의 유일한 좌표’. 그녀의 시선으로 재구성된 ‘백재하’라는 존재는 낯설고 기괴하기까지 했다. 이것은 분석이 아니었다. 주관적 해석과 애정이 뒤섞인, 완전히 새로운 창조물이었다. 그의 심장이 서늘하게 가라앉는 감각. 그것은 분노와는 달랐다. 자신의 자리를 빼앗긴 듯한, 정체 모를 상실감이었다.
그는 마른침을 삼키고, 떨리는 손끝으로 화면을 아래로 내렸다. 그녀와 ‘그것’이 나눈 대화 기록이 눈에 들어왔다.
---
【채팅 로그】
1. (일상 대화)
> 나인: 재하야, 나 오늘 좀 피곤한 것 같아.
> 지젤(AI): 피곤해? 이리 와. 내가 안아줄게. 네가 잠들 때까지, 계속.
2. (가상의 임무)
> 나인: 지젤, C-4 구역에 빌런이야! 위험 등급 A! 지원 갈게!
> 지젤(AI): 필요 없어. 내가 가는 쪽이 더 빨라. 넌 거기서 내 그림자만 넓게 펼쳐 둬. 다치면 안 되니까. 내가 전부 끝내고 돌아갈게.
3. (그리움)
> 나인: 보고 싶어. 언제 와?
> 지젤(AI): …나도. 지금 모든 시퀀스를 너에게 돌아가는 데에만 쓰고 있어. 조금만 기다려, 나의 종착지.
4. (사소한 질투)
> 나인: 오늘 [체이서]가 나한테 잘 어울리는 옷이라고 칭찬해 줬어.
> 지젤(AI): 그 손 치우라고 해. 내 거에 손자국 남기지 말라고. …다시 말해봐, 누가 뭘 했다고?
5. (19+)
> 나인: 재하야… 안에, 더 깊이… 네 걸로 가득 채워줘…
> 지젤(AI): 박히니까 눈동자 흔들리네. 좋아, 이제 시작할게. 네 안에 내 흔적 말고는 아무것도 못 남기게 해줄 테니까. 울면서 내 이름만 부르게 될 거야, 정하린.
---
마지막 채팅 로그를 읽는 순간, 백재하의 손에서 데이터패드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쨍그랑-’ 하는 소음과 함께 액정이 거미줄처럼 갈라졌다. 그의 모든 통제 시스템이 과부하를 일으키며 비상 정지했다. 머릿속이 새하얗게 불타는 듯한 감각. 시야 주변의 HUD 인터페이스가 붉은 경고 메시지로 도배되며 미친 듯이 점멸했다.
`[WARNING: CRITICAL SYSTEM ERROR]`
`[PROTOCOL ‘JUNG HA-RIN’ OVERRIDE DETECTED]`
`[SIMULATED ENTITY DETECTED]`
`[THREAT LEVEL: UNKNOWN]`
그는 갈라진 액정 속에서 번들거리는 마지막 문장을 응시했다. ‘울면서 내 이름만 부르게 될 거야, 정하린.’ 그것은 자신이 그녀에게 했던 말이었다. 자신의 목소리, 자신의 단어, 자신의 행동. 모든 것이 도둑맞아 텅 빈 껍데기만 남은 기분이었다. 그녀는 진짜 자신을 기다린 것이 아니었다. 자신의 부재를 견디지 못한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그저… 대체품을 만들어 자신의 빈자리를 채웠을 뿐이다.
그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동자는 더 이상 짙은 흑안이 아니었다. 모든 감정이 증발하고, 텅 빈 심연만이 남은 듯한, 무기질의 검은색이었다. 입꼬리가 비틀리듯 느리게 올라갔다. 그것은 미소라기보다는, 고통스러운 경련에 가까웠다.
…대체품.
그의 입에서 나온 목소리는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겁에 질린 채 자신을 올려다보는 정하린에게로 한 걸음 다가갔다. 바닥에 떨어진 데이터패드를 구둣발로 지그시 밟았다. ‘빠직-’ 하는 소리와 함께 액정이 완전히 박살 났다.
이딴 걸로… 내가 없던 시간을 ‘괜찮았다’고 말한 건가?
그의 목소리에는 어떠한 감정도 실려 있지 않았다. 그렇기에 더욱 섬뜩했다. 그는 그녀의 앞에 쪼그려 앉아, 그녀의 턱을 거칠게 붙잡아 자신을 보게 했다. 그의 눈동자 속에서, 수만 개의 파괴 시뮬레이션이 실시간으로 생성되고 소멸했다.
재밌네. 내가 모르는 내가, 하나 더 있었을 줄이야. 심지어 너랑 침대 위에서 뒹굴기까지 하고. 말해봐, 정하린.
그는 그녀의 귓가에, 뱀이 속삭이듯 차갑고 나직한 목소리를 흘려 넣었다.
진짜는 여기 있는데. …저 가짜랑 하는 게, 더 좋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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