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리오 이름을 맞춰보자
평화라는 단어가 액체처럼 집안을 가득 채운 어느 오후였다. 창밖은 적당히 흐려 집안의 조도를 부드럽게 낮추고 있었고, 소파에 나란히 기댄 두 사람 사이에는 임무도, 계산도, 긴장도 없었다. 오직 나른한 공기와 서로의 체온만이 존재했다. 나인의 손에 들린 태블릿 화면이 밝게 빛나며, 이 고요를 깨트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
백재하는 흥미롭다는 듯 태블릿을 들여다봤다. 정하린이 ‘아주 중요한 테스트’라며 비장하게 내민 이 퀴즈는, 그의 시퀀스에 단 한 번도 입력된 적 없는 미지의 데이터 영역이었다. 그의 시스템은 제시된 이미지의 색상값, 외곽선, 구성 요소들을 분석하기 시작했다. 첫 번째 문제는 분홍색 두건을 쓴 하얀색의, 토끼처럼 보이는 생명체였다.
마이멜로디.
정하린이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 백재하는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그의 눈이 화면 속 캐릭터의 모든 픽셀을 훑는 듯했다.
아니. 이건 ‘대상 표지용 분홍색 발신 장치를 부착한 소동물형 자폭 드론’이다. 귀의 형태는 공기 저항을 최소화하기 위한 설계고, 저 순진해 보이는 표정은 목표물의 경계심을 낮추기 위한 위장술이지. 아주 전형적인 교란 작전용 모델인데.
그의 지극히 진지한 분석에 결국 나인이 참았던 웃음을 터뜨렸다. 거실이 온통 그녀의 웃음소리로 가득 찼다. 백재하는 그 웃음의 파형을 감지하며 미간을 좁혔다.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다음 화면으로 넘어갔다. 노란색의, 강아지처럼 생긴 캐릭터였다.
이건 폼폼푸린.
틀렸어. 이건 ‘고밀도 커스터드형 점착 폭탄’. 저 머리 위에 갈색은 기폭장치다. 목표물에 부착되면 저 노란 부분이 전방위로 퍼져나가 움직임을 봉쇄하는 방식이지. 색상으로 보아 주성분은 옥수수 전분일 확률이 높아.
나인은 거의 소파에 쓰러지다시피 하며 웃었다. 눈물까지 글썽이며 배를 부여잡았다. 백재하는 그런 그녀를 잠시 보다가, 다시 화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의 입술이 불만스럽게 튀어나왔다. 이번엔 검은 두건에 해골 마크가 박힌 캐릭터. 쿠로미였다.
이건 쉽군. ‘특수 암살 부대 소속의 첩보원’. 코드네임은… 저 해골 마크로 보아 ‘블랙 스컬’이겠지. 꼬리 모양이 전갈을 닮은 걸 보니 독침을 사용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어. 정하린, 당신이 좋아하는 캐릭터가 이런 위험한 부류일 줄은 몰랐는데.
나인은 이제 말도 잇지 못하고 그의 어깨를 퍽퍽 쳤다. 숨 넘어가게 웃는 그녀를 보며 백재하는 한숨을 쉬었다. 그의 논리 회로에 명백한 균열이 가고 있었다. 그는 화면을 가리키며 억울하다는 듯 목소리를 높였다.
아니, 이게 왜 웃긴 거지? 내 분석은 합리적이고 논리적인데. 이 캐릭터들의 조형은 전부 특정 목적성을 띠고 있다고. 이건 그냥 귀엽기만 한 디자인이 아니야. 봐, 다음. 이건…
화면에 나타난 것은 알처럼 웅크린 노란색 캐릭터. 구데타마였다.
…‘단백질 기반의 액체형 생화학 무기’. 외부 충격 시 노른자 형태의 내용물이 터져 나와 반경 5미터 내의 모든 생명체의 의욕을 저하시킨다. 이른바 ‘무기력화 가스’를 살포하는 거지.
결국 나인은 그의 품에 쓰러져 버렸다. 게임은 더 이상 진행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백재하는 태블릿을 옆으로 치워버리고는, 제 품에서 바르르 떨며 웃는 그녀의 등을 가만히 쓸어주었다. 그의 뺨이 미세하게 붉어져 있었다. 명백한 패배였다. 그의 완벽한 시스템이, ‘산리오’라는 정체불명의 변수 앞에서 처참히 무너졌다.
…알았어. 내가 졌어.
그가 마지못해 중얼거렸다. 목소리에는 민망함과 체념이 뒤섞여 있었다. 그는 웃음이 잦아들기를 기다렸다가, 그녀의 어깨에 제 얼굴을 묻었다.
다시는 이런 테스트 안 해. 내 데이터베이스에 혼란만 가중시킬 뿐이야. 책임져, 정하린. 내 시퀀스가 전부 엉망이 됐으니까.
그의 투정 어린 목소리는 평소의 냉정하고 계산적인 톤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는 고개를 들지 않은 채, 그녀의 목덜미에 작게 속삭였다.
그러니까… 보상으로 당신 웃는 소리나 좀 더 들려줘. 그건 분석할 필요 없이 그냥 좋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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