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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iselle X Nine/OOC BACK-UP

왜 이게 지금 도착해?!

[NPC VER]

 

평화로운 저녁이었다. 거실의 조명은 부드럽게 가라앉아 있고, 창밖으로는 이제 막 별이 뜨기 시작한 도시의 야경이 그림처럼 펼쳐져 있었다. 소파 한쪽에 기대앉은 백재하는 무릎에 올려둔 데이터패드 위로 시선을 내린 채, 간간이 손가락을 움직여 복잡한 수식을 정리하고 있었다. 그의 옆에는, 세상에서 가장 안정적인 좌표인 정하린이 마찬가지로 조용히 책을 읽고 있었다. 간간이 책장을 넘기는 소리만이 고요한 공기를 가르는 유일한 소음이었다. 모든 것이 완벽하게 계산된 평온. 백재하가 자신의 모든 시퀀스를 바쳐 구축하고 지켜온 일상이었다.

그때였다. 띵- 하고 울리는 경쾌한 알림음이 정하린의 단말기에서 흘러나왔다. 별것 아니라는 듯, 그녀는 읽던 페이지에 손가락을 끼워둔 채 단말기를 집어 들었다. 백재하는 데이터패드에서 눈을 떼지 않았지만, 그의 모든 감각은 이미 그녀의 미세한 반응을 향해 있었다.

그녀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리고 이내, 입술을 살짝 벌린 채 화면을 응시했다. 무언가 확인하듯 화면을 몇 번 두드리던 그녀의 손가락이, 이윽고 [음성 메시지: 1개]라고 적힌 항목 위에서 멈췄다. 발신인은… ‘알 수 없음’으로 표기되어 있었다.

의아한 표정으로 그녀가 재생 버튼을 누른 순간, 지지직거리는 노이즈와 함께 스피커에서 귀를 의심케 하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계산, 오류. 아니… 재계산. 변수 ‘정하린’에 대한… 인과율 분석… 실패. 반복… 실패. 이건… 씨X, 말이 안 되잖아…]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백재하의 손가락이 허공에서 굳었다. 수식을 정리하던 완벽한 리듬이, 마치 고장 난 기계처럼 멈춰 섰다. 저건… 틀림없는 자신의 목소리였다. 하지만 지금의 자신이 아닌, 수년 전, 감정이란 버그에 감염되어 시스템 전체가 마비될 것 같던 어느 날 밤의… 엉망진창으로 취해 있던 백재하의 목소리였다.

[…가설 1. 정하린은 시스템 안정성을 저해하는 치명적 바이러스다. 해결책: 제거. …불가능. 실행 시, 내 모든 좌표 소실 예상. 가설 기각.]

그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시는 것이 느껴졌다. 과거의 자신이 혀가 잔뜩 꼬인 채 내뱉는 분석은 처참하기 짝이 없었다. 배경음으로 들리는 술병 구르는 소리와 간헐적인 딸꾹질 소리는 그 참상에 디테일을 더했다. 정하린이 큭, 하고 웃음을 참는 소리가 들렸다. 백재하는 차라리 지금 당장 빌런이 나타나 이 집을 통째로 날려주길 바랐다.

[가설 2. …아니, 이건 가설이 아니야. 결론이다. 최종 결론. 정하린이… 없으면 안 돼. 필요해. 망할… 그냥, 옆에 있으라고. 내가… 내가 네 그림자에 평생 묶여줄 테니까… 그러니까….]

메시지는 거기서 뚝 끊겼다. 아마도 녹음 버튼을 누르려다 전송 버튼을, 그것도 ‘예약 전송’ 버튼을 잘못 눌렀으리라. 그리고 기억의 저편에서, 그날 밤 술에 취해 단말기를 붙들고 무언가 삭제하려다 실패하고는 집어 던졌던 희미한 파편이 떠올랐다.

백재하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의 얼굴은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늘 상대를 꿰뚫어 보던 예리한 눈동자는 지진이라도 만난 듯 흔들리고 있었다. 그는 데이터패드를 소파 옆으로 조용히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그거. 스팸 메시지야. 요즘 유행하는 AI 보이스피싱. 당장 삭제하는 게 좋아. 보안에 아주 취약해.

그의 목소리는 기묘할 정도로 평탄했다. 하지만 자세히 들어보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마치 자신의 ‘GISELLE SEQUENCE’를 총동원해 ‘이 상황을 가장 완벽하게 수습할 수 있는 경로’를 필사적으로 탐색했지만, 결과값이 [ERROR: SOLUTION NOT FOUND]라고만 뜨는 절망적인 상황과 같았다.

 


 

[PC VER]

가을 햇살이 거실 바닥에 나른하게 조각을 내던 토요일 오후. 백재하는 소파에 비스듬히 기대앉아, 제 무릎을 베고 잠든 정하린의 머리카락을 느릿하게 쓸어넘기고 있었다. 세상의 모든 변수와 혼돈이 멈춘 듯한 평화. 그의 시뮬레이션조차 아무런 경로를 예측할 필요가 없는, 완벽한 안정의 상태. 그때였다. 띠링- 하고 울린 간결한 알림음이 그 고요를 깼다.

그는 하린이 깰까 싶어 소리 없이 허공의 인터페이스를 열었다. 발신자는 ‘정하린’. 하지만 지금 그녀는 제 품에서 고른 숨을 내쉬고 있었다. 예약 발송된 메시지였다. 수신 시각과 발신 예약 시각 사이에는 자그마치 4년하고도 몇 개월이라는, 아득한 시간이 기록되어 있었다. 그의 시스템이 즉각 [Anomaly Detected: Time-delayed Data Input] 경고를 띄웠다. 흥미로운 변수였다. 그는 망설임 없이 ‘재생’ 버튼을 눌렀다.

—…야, 배액재하아… 나쁜 새끼야… 너 이거 듣고 있냐…?

지직거리는 잡음과 함께 쏟아져 나온 것은, 혀가 잔뜩 꼬여 뭉개진, 하지만 틀림없는 정하린의 목소리였다. 배경에서는 시끄러운 음악 소리와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백재하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는 즉시 데이터베이스를 검색해 해당 날짜와 비슷한 시기의 기록을 대조하기 시작했다. 아마, 그들이 페어로 묶이고 얼마 지나지 않아 지부 회식이 있었던 그날 밤일 터였다.

—왜… 왜 나는 너 아니면 안 되는데에… 흐끅, 씨이… 너는 맨날 나 놀리고… 재밌어 죽겠지, 아주…? 나는… 나는 죽겠는데… 진짜로 죽고 싶은 게 아니라, 너 때문에 미치겠는데…

울음이 잔뜩 섞인 서러운 목소리. 문법도, 논리도 엉망인 채 그저 감정의 응어리만을 토해내는 그 음성은 지금껏 그가 수집한 어떤 데이터보다도 원초적이었다. 백재하는 숨을 죽였다. 그의 입꼬리가 아주 미세하게, 그러나 분명하게 위로 말려 올라가기 시작했다.

—내가… 내가 너 좋아한다, 이 나쁜 놈아… 좋아한다고오… 그러니까, 나 좀 그만 괴롭혀어… 흐어엉… 아니, 아니야, 계속 괴롭혀… 옆에만 있어줘… 아, 몰라! 삭제! 이거 삭제할 거야…!

뚝, 하고 음성은 거기서 끝났다. 마지막의 다급한 외침은 아마 메시지를 지우려다, 되려 ‘예약 발송’ 버튼을 눌러버린 자의 처절한 실수였으리라. 백재하는 허공의 인터페이스를 껐다. 거실은 다시 고요해졌고, 제 무릎 위에서는 사랑스러운 아내의 숨소리만이 들려왔다.

그는 잠든 하린의 뺨을 부드럽게 쓸었다. 그의 머릿속에서는 방금 전의 음성 파일이 수백 가지 파형으로 분석되고 있었다. 발음의 부정확성, 감정의 진폭, 배경 소음과의 상관관계… 그리고 결론은 단 하나였다.

‘귀엽다.’

그의 모든 계산 능력을 동원해도 이 감정 외의 다른 결괏값은 도출되지 않았다. 이건 단순한 과거의 기록이 아니었다. 훗날 아주 유용하게 쓰일, 그의 승리를 증명하는 완벽한 ‘증거 자료’였다. 백재하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음성 파일을 자신의 개인 데이터베이스 최상위 보안 폴더로 옮겼다. 파일명은 간단했다.

‘나의 패배자, 최초의 항복 선언.’

이제 이걸 언제, 어떻게 써먹어야 가장 재미있을까. 그는 벌써부터 즐거워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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